출애굽기 (1)
스페인에 도착한 콘도르 군단이 국민파에게 제공한 무기는 독일제다운 준수한 성능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모든 무기가 다 같은 평을 듣는 것은 아니었다.
-적 전차 출현! 썅, T-26이다!
-조종수 후진! 아니, 전진해!
-놈이 이쪽으로 온다!
전선을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던 1호 전차들은 공화파의 T-26 전차들이 대거 출현하자 패닉에 빠졌다.
일부 용감한 전차들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겨우 기관총 따위로 전차의 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총탄을 가뿐하게 튕겨내며 전진하던 T-26의 포구에서 이내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T-26의 45mm 전차포에 명중당한 1호 전차는 불덩이가 되어 정지했다. 전차장과 조종수는 탈출할 새도 없이 즉사했다.
-3호차가 당했다!
-제기랄, 저놈을 무슨 수로 이겨!
T-26의 장갑은 가장 두꺼운 곳조차 겨우 15mm에 불과할 정도로 방어력이 허약한 편이지만, 기관총 따위는 거뜬하게 방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포탑에 탑재된 45mm 20-K 전차포는 독일군이 보유한 1호 전차와 2호 전차의 전면장갑을 표준 교전거리에서 한방에 관통할 수 있는 강력한 위력을 자랑했다.
1호 전차로 T-26을 상대하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었다.
-파시스트 놈들이 도망친다!
-계속 쏴! 저 돼지 새끼들이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마라!
공화파 전차병들은 호랑이와 마주친 토끼마냥 도망치기 바쁜 적들을 비웃으며 여유롭게 포탄을 날렸다.
퇴각하는 적 전차들을 저격하는 일은 오리 사냥을 하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끼아아아아악!!!!”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채 허둥지둥 전차에서 빠져나오는 국민파 전차병을 향해 총탄이 쏟아졌다.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오던 전차병은 무수한 총탄을 맞고 도로 전차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이윽고 1호 전차는 측면에 스페인어로 쓰여진 ‘불사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완전히 화염에 휩싸여 불타올랐다.
1호 전차 2개 소대가 전멸하는 동안 공화파의 피해는 엔진고장으로 전차 1대가 멈춰 선 것이 전부.
전투는 공화파의 완승으로 끝났다.
***
다음날, 어제의 승리로 사기가 고무된 공화파는 내친김에 역습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목표는 일주일 전 국민파 손에 떨어진 마을 인근 고지를 탈환하는 것.
T-26, BT-5가 공격의 선두에 서고, 무기를 든 병사들이 전차들을 뒤를 따라 전진했다.
이번 공세에 동원된 병사들은 전투경험이 전무한, 훈련 때 실탄 몇 발 쏴본 게 전부인 아마추어들이었지만 소련제 전차들의 존재 덕분에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 강철 괴물들과 함께라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파시스트 떨거지 놈들, 우릴 보면 아주 기절초풍하겠지?”
“바지에 똥을 지릴지도 몰라.”
“후딱 해치우고 밥이나 먹자고.”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
공화파 병사들은 죽거나 다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보다 사로잡은 적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주된 관심사였다.
“파시스트 놈들은 모조리 다 죽여야 해. 살려둘 가치가 없는 놈들이라고.”
“굳이 다 죽일 필요는 없지. 화장실 청소시킬 놈 정도는 남겨놔야 하지 않겠어?”
“제라스, 네가 이번 주 화장실 청소 담당이란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본보기로 최소한 세 놈 정도는 죽여야 해.”
이번 공격에 참가한 여군 중 한 명이 포로들의 바지를 내리고 낭심을 발로 걷어차줄 것이라고 말하자 좌우에서 폭소가 쏟아졌다.
그때, 느닷없이 공격이 시작되었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는 날 선 쇳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선두에서 덜그덕거리며 굴러가던 T-26이 별안간 불길에 휩싸였다.
“으아아아!!!”
오른 다리가 잘려 나간 전차병이 비명을 지르며 해치 밖으로 기어 나오고, 무수한 총탄의 비가 쏟아졌다.
“기습이다!”
“엎드려!”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공화파 병사들은 갑작스런 국민파의 기습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운 좋게 제때 몸을 엎드린 병사들은 살았지만, 행동이 굼뜬 이들은 진작에 벌집이 되어 고꾸라졌다.
포로들의 낭심을 걷어찰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여군도 관자놀이에 총탄이 박혀 쓰러졌다.
독일이 제공한 Kar98k와 MG34가 연달아 불을 뿜고 PaK 36 대전차포가 포탄을 발사했다.
총탄 정도는 너끈하게 튕겨낼 수 있어도 그 이상의 무기는 방호가 불가능한 T-26은 37mm 철갑탄 한 발에 격파당했다.
T-26과 달리 전면이 경사진 BT-5조차 독일제 대전차포 앞에선 무력했다. 벌써 2대의 전차가 격파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11시 방향에 T-26! 거리 400, 발사!”
국민파 병사들이 열심히 총을 쏘는 동안, 콘도르 군단 소속 독일 국방군 병사들은 대전차포를 조작해 공화파의 전차들을 한 대씩 격파했다.
위장을 철저히 한 덕에 공화파는 어디서 포탄이 날아오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제라스! 제라스! 젠장, 제라스가 죽었어!”
“엄마! 아빠! 살려줘!”
“응사해! 씨발, 응사하라고!”
혼란에 빠진 공화파를 향해 국민파 전차들이 달려들었다.
어제의 복수를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던 전차병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적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탄을 난사했다.
“페르난도, 포탑 돌려! 좌측에 적이다!”
“어, 어디에 있습니까?”
“2시 방향! 빨리! 라울, 넌 철갑탄 장전해!”
“알겠습니다!”
T-26 한 대가 급하게 포탑을 돌리다가 정면에서 날아든 철갑탄을 맞고 격파되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T-26은 2호 전차의 20mm 기관포의 집중공격을 받고 격파되었다. 기관포탄이 뚫고 지나간 구멍으로 연기가 새어 나왔다.
공화파 전차들도 반격을 가해 2호 전차를 명중시켰다. 차체 하단에 맞은 탓에 조종수는 전사하고 전차장과 탄약수만 살아남았다.
어느 BT-5는 2호 전차에 먼저 공격을 가했지만, 하필이면 궤도를 노린 탓에 20mm 기관포에 반격당하며 격파되었다.
보유한 전차가 모두 격파당하자 공화파는 공격 계획을 취소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모처럼 잡은 사냥감을 사냥꾼이 풀어줄 리 없었다.
1호와 2호 전차들은 도주하는 공화파를 추격해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사격했다.
전투가 끝난 들판에는 토막 나고, 구멍이 숭숭 뚫린 시체들로 가득했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살 타는 누린내로 코가 썩을 지경이었다.
시체의 피 냄새를 맡고 날파리와 까마귀들이 모여들었다.
전투가 벌어진 곳이면 어김없이 이들이 나타나 시체의 살을 뜯고 땅에 고인 피를 마시며 배를 채웠다.
시체의 살이 모두 썩고 백골만 남게 된 후에도 죽음의 냄새는 오래도록 자리에 머물렀다.
***
“쯧쯧쯧.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스페인에서 싸우고 있는 콘도르 군단이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보고서에는 알짜배기 정보들로 가득했다.
역시나 1호 전차는 전장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없는 것보다는 낫긴 하나, 정찰용으로나 써먹어야 할 놈을 당당하게 1선에 내보냈다가 소련제 T-26, BT-5에게 격파당하기 일쑤였다.
2호 전차의 경우, 1호 전차보다 훨씬 더 쓸모가 있지만 역시나 소련제 전차들과 1:1 대결은 무리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국민파가 보유한 전차들 중에 2호 전차의 20mm 기관포를 정면에서 방호할 수 있는 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화력은 나쁘지 않다고 평할 수 있었지만, 전차포가 없어 한방에 적 진지를 제압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거기다 장갑도 1호 전차보다는 두꺼웠지만 45mm 전차포에 무력한 것은 똑같았고.
“할 말들 있소? 반론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보시오.”
“······.”
1호 전차만으로 충분하다고 큰소리치던 장군들은 내가 콘도르 군단의 보고서를 보여주자 바로 버로우했다.
어쭙잖게 변명했으면 개같이 털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최소한의 눈치는 있군.
“토마 대령이 뭐라고 썼는지 아는가? ‘현재 우리 군이 보유한 전차 중 가장 강력한 전차는 러시아인들이 만든 T-26, BT-5 전차입니다’라고 썼다네. 전에 그대들은 내게 뭐라고 했지? 1호 전차만으로도 충분하니 2호 전차를 보낼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꼴에 장군이랍시고 꺼드럭거리던 놈들이 설설 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그간 툭하면 반대만 외쳐대다가 자신들의 주장이 틀렸음이 입증되었으니 쪽팔리겠지.
뭐, 꼽주는 건 이쯤하고 할 일을 해야지.
병사들의 피로 얻어낸 결과이니만큼 이를 허투루 써먹어선 안 된다.
그래야 죽은 병사들을 볼 면목이 있지 않겠는가.
“1호 전차는 물론, 2호 전차도 약세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4호 전차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뿐일세. 늦어도 1939년까지는 4호 전차를 주력으로 삼고, 1호와 2호를 후방이나 2선급으로 돌려야 하네. 내 말 명심하도록.”
보다 더 강력한, 고성능의 무기가 필요했다.
그러자면 역시 돈이 필요했다.
돈을 무작정 쏟아붓는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될 일도 안 된다. 그만큼 돈은 정말로 소중하다.
나는 중국에서 해답을 찾았다.
1927년까지 소련과 군사협력을 맺어오던 중국의 장제스 정권은 국공결렬 및 중국 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 폭동으로 소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협력대상을 찾고 있었다.
장제스가 주목한 새 협력대상은 독일이었다.
1928년, 루덴도르프가 가장 신뢰하는 참모이자 세계 각국에서 군사고문을 지냈던 막스 바우어 대령이 군사고문단을 이끌고 중국으로 가면서 독일과 중국의 군사협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바우어가 1929년에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예비역 중령이자 나치당 원로로 맥주홀 폭동에 참가한 바 있던 헤르만 크리벨이 고문단장 대행을 맡았다.
그는 곧 게오르크 베첼 중장에게 자리를 내주고 독일로 돌아왔다.
베첼 다음은 독일의 명장 중 한 명인 한스 폰 젝트가 맡았다.
하지만 젝트도 1935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본국으로 돌아왔고, 1936년 현재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은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 맡고 있었다.
참고로 크리벨은 2년 전에 다시 중국으로 가 상하이 독일 총영사겸 나치당 극동지부 부장을 맡고 있다.
이토록 독일과 중국과의 관계는 무척 원만한 편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군이 연승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본 히틀러가 중국 대신 일본과 손을 잡기로 결정하면서 독중관계는 깨지고 만다.
역사가들은 만약 히틀러가 중국과 손절하지 않았더라면 역사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독일이 일본 대신 중국과 우호관계를 이어나갔다면 진주만을 공습한 일본을 따라 미국에 선전포고할 일도 없었을 테고, 미국도 유럽 전쟁에 개입하지 못했을 테니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매우 흥미로운 가정이 아닐 수 없다.
미래에 일본이 영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중국과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무엇보다 중국은 독일과 관계가 악화되기 전까지 독일에서 상당한 양의 무기를 사들이고 독일에 자원을 수출하던 나라다.
독일은 중국 덕분에 짭짤한 수익은 물론,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각종 자원들을 비축할 수 있었다.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벌고, 거기에 필요한 자원까지 얻는다. 이게 바로 일석이조 아니겠나.
참, 오늘이 며칠이지? 11월 22일이군.
곧 중국에서 ‘그 사건’이 터진다.
“슬슬 장제스와도 얘기를 나눠야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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