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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2) (25/150)

냉정과 열정 사이 (2)

“입맛에 맞으실지 잘 모르겠지만, 모쪼록 마음껏 즐겨주시오. 그럼, 건배합시다.”

와인잔 4개가 허공에 부딪혀 청아하고 맑은 소리를 냈다.

술이라곤 소주와 막걸리, 기껏해야 사케나 맥주 정도만 마셔봤던 손기정과 남승룡에겐 처음 맛보는 와인이었다.

두 조선 청년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고향에서도, 일본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만찬이 펼쳐져 있었다.

“두 분이 고향에서 즐겨 드시던 음식들을 많이 구하지 못해서 할 수 없이 독일 요리들을 내왔습니다. 그래도 맛이라도 한 번 보시죠.”

“아, 예. 감사합니다, 총통.”

손기정은 주저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커다란 고깃덩이를 포크로 찍어 접시로 가져갔다.

표면은 바삭한데 속은 또 야들야들하고 쫄깃한 것이 독특한 맛이었다.

조금 느끼해서 많이 먹을 수 없다는 게 흠이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맛있었다.

“돼지고기 같은데, 이름이 뭐지?”

“슈바인스학세라고, 독일 요리일세.”

타무라가 조용히 알려주었다. 정작 타무라도 이 요리를 책에서만 봤을 뿐 실제로 먹기는 처음이었다.

가난한 형편 탓에 고기는커녕 쌀밥조차 자주 먹어보지 못했던 두 청년에게 고기가 한상 가득 차려진 만찬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죽어서 극락에 갔을 때나 이런 만찬을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살아생전에 맛보게 되다니.

“소시지도 한 번 맛보시오. 독일 소시지는 세계에서 알아주니까.”

“아, 감사합니다.”

음식의 종류가 너무 많아 무엇을 먹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으면 히틀러 총통이 넌지시 이것저것을 권했다.

그럴 때마다 두 청년은 입안 가득 음식을 쑤셔 넣었다.

21세기 한국에선 소시지가 흔한 음식이지만, 1936년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소시지가 무척 생소한 음식이었다.

대부분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국의 요리였지만 뜻밖에 익숙한 요리도 있었다.

“이건 두부와 김치 아닙니까?”

“두 분을 모시기 위해 공수했지요.”

어제 공장에서 동포들과 함께 먹었던 두부와 김치가 놓여 있었다.

손기정은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것이 어제 자신들이 갔었던 공장에서 조달된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다.

반가운 음식은 또 있었다. 솥에 삶아낸 닭으로, 영락없는 백숙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남승룡이 놀라서 물었다.

“독일 사람들도 백숙을 먹습니까?”

타무라는 남승룡이 말한 백숙을 한국에서만 먹는 삶은 닭이라고 통역해서 히틀러에게 말해주었다. 히틀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내가 두 사람을 위해 준비시킨 거라오.”

“어떻게 백숙을 알고 계셨습니까?”

“글쎄. 상상에 맡기겠소.”

실상은 물에 마늘과 소금, 후추, 월계수 잎과 생닭을 넣고 푹 삶아낸 것이었지만 맛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기정과 남승룡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대체 독일 총통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음식들까지 다 준비했을까? 독일인이 한국 음식을 즐길 리는 없을 테고, 정말로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란 말인가?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나?

“총통,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오.”

“금메달을 딴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총통과 만찬을 함께 했습니까?”

“아니오. 그대들이 처음이오.”

“어째서 저희들에게 이렇게나 잘 대해주시는 겁니까? 저흰 독일인도 아니고, 그저 조선인일 뿐인데.”

“이유는 간단하오. 그대들이 내게 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지. 남의 나라 식민지에서 태어났는데도, 그대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승리를 쟁취했잖소.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말이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만나봐야 하지 않겠소?”

***

식사를 끝내고, 디저트로 커피와 케이크까지 먹인 후에야 나는 두 동포와 작별했다.

두 사람은 내가 베푼 친절에 진심으로 감동한 눈치였다.

하기사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 없는 나라에서 이렇게나 극진하게 챙겨주니 감동할만하지.

마지막으로 난 이들을 위해 전용차를 내주어 베를린 관광까지 시켜줬다.

이게 바로 진짜 풀코스지. 허울뿐인 부산 풀코스가 아니라.

떠나기 전, 올림픽이 끝나 고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와의 만남은 모두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사적으로 올림픽 선수들과 만난 것이 알려지면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설명을 덧붙여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총통 각하. 비밀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오늘 일은 죽어서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조심해서 가시오. 기회가 된다면 또 봅시다.”

베를린 올림픽이 끝나고 조선에 돌아간 손기정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조선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부쩍 높아진 그를 경계하여 일본은 손기정을 죄인마냥 포승줄로 묶어서 압송한데다 해방 전까지 미행을 붙여 손기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남승룡의 경우 손기정처럼 심한 감시를 받지 않았지만, 동메달리스트라는 이유로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들이 조선에 돌아가서 겪을 고난을 생각하면 착잡한 마음뿐이다.

오늘 받았던 대접이 추억이 되어 앞으로의 험난한 나날들을 이겨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할 뿐.

손기정과 남승룡 외에도, 따로 만난 외국인 선수는 한 명이 더 있었다.

바로 제시 오언스. 미국의 흑인 육상선수로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으로 유명한 친구다.

대중들에겐 오언스가 금메달을 따자 히틀러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실제로 히틀러는 오언스를 축하하며 손을 흔든 반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그를 만나기는커녕 언급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거 그림 하나 제대로 나오겠구만.

“당신이 제시 오언스로군. 전부터 소문을 들어서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구려.”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저도 총통을 만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오언스도 앞의 손기정과 남승룡처럼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게르만 민족은 세계 제일을 외치던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흑인인 자신과 만나고 싶어 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간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소만. 듣자 하니 당신은 미국 국민인데도 식당이나 화장실도 마음대로 이용하지 못했다면서요?”

“미국의 모든 흑인들 모두가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참 이상한 일이오. 링컨이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킨 지 수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차별이 있다니. 뭐어, 우리 독일도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긴 하지만.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소.”

“총통께서 이토록 넓은 시각을 가지신 줄은 몰랐습니다.”

오언스는 내가 한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인지, 립서비스인지 분간하기 어려워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립서비스나 하자고 흑인인 자신을 이 자리에 부를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곤 감격한 얼굴이 되었다.

“모든 미국인들이 총통의 반만 되어도 세상에는 차별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과찬은. 사실 나도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은 아니오. 그저 피부색 따위로 사람을 차별하는 게 영 못마땅해서 그런 것일 뿐이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세상에 피부색이 전부인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오언스는 그간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당했던 숱한 차별과 멸시, 미국에서 흑인들이 받는 대우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것이 어지간히 쌓인 게 많았나 보다.

나는 중간중간에 맞장구를 치며 그가 하는 얘기를 끝까지 들었고.

“올림픽이 끝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겠지. 그래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조금은 당신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지 않겠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확신이 없네요. 금메달리스트여도 사람들에겐 내가 흑인인 것이 더 먼저일 테니까요.”

***

“총통 각하,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굳이 그자와 식사를 같이 하실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제시 오언스와 저녁을 함께 한 날 저녁, 힘러가 한 말이었다.

그래, 너라면 그럴 줄 알았지. 너무 예상대로여서 놀랍지도 않다.

“오언스, 그자는 심지어 게르만인도 아닌 흑인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랬기에 그와 만난 것일세.”

“예? 아니, 그자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만나셨다고요?”

“어째서입니까?”

잠자코 있던 괴링까지 나서서 의문을 제기했다. 내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군.

“잘 생각해보게. 미국에서 흑인들이 받는 취급을.”

“어··· 그리 좋지 않지요?”

“하지만 원래 흑인이 대우받는 나라는 흑인들이 세운 나라 외에는 잘 없지 않습니까?”

괴벨스의 지적. 맞는 말이다. 아이티나 라이베리아처럼 국민들 절대다수가 흑인들인 나라 외에 흑인이 사람으로 대우받는 나라는 잘 없다.

“그렇지. 하지만 미국은 세계 제일의 강대국일세. 그런 강대국에서조차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아주 당연하지.”

“그건 독일도 마찬가지 잖습니까?”

“맞네. 하지만 독일에는 흑인들이 많이 없지.”

“······?”

“생각해보게. 흑인들이 많이 사는 미국에서, 제시 오언스가 받을 취급을. 금메달을 땄어도, 미국인들 대부분에게 그는 그저 깜둥이일 뿐이야. 금메달을 따른 뭘 따든 간에 그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일세.

자신이 태어난 조국에서조차 멸시받는 흑인이, 정작 독일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정확히는 미국 내 흑인들 말일세. 조국에 실망하게 되겠지. 반대급부로 우리 독일의 위상은 올라갈 테고.

대전쟁에서도 그랬듯이, 미국은 독일이 유럽의 패권을 쥐게 되는 일을 막으려고 방해할 것일세. 그때 미국에 있는 흑인들을 선동한다면, 필시 우리에게 이롭지 않겠나?”

전에도 누누이 강조했지만, 먼 미래에도 그렇고 지금도 중요한 것은 바로 명분과 이미지다.

이게 없거나 부족해서 이길 수도 있었던 전쟁에서 지고, 반대로 멸망할 뻔했던 나라가 되살아난 경우들이 수없이 많다.

말은 이렇게 했다만, 미국 내 흑인들을 선동해서 소란을 일으킨다는 계획이 별로 현실성 없는 소리란 것쯤은 나도 안다.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할 생각이다. 미국과의 전쟁 자체가 사실상 패전이나 다름없는 짓인데 미쳤다고 전쟁하리?

미국과 전쟁을 벌여서 살아남거나 승리한 국가는 북한,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 북한은 중국, 소련과의 전면전을 우려한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 덕분에 어부지리로 살아남았고, 베트남 역시 소련과의 전면전 우려 때문에 확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프간의 경우 전비 부담을 견디지 못한 미국이 깔끔하게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승리한 것이지, 승전까지 소요된 시간과 피해를 생각하면 완승이라고 할 수도 없다.

반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을 제대로 열받게 만들었던 일본은 그야말로 본토 전역이 불바다가 된 끝에 비참하게 몰락했다.

일본과 한패였던 독일,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내가 제시 오언스를 만나 그를 대접했다는 사실은 미국 내 흑인들이 독일에 우호적인 인식을 심어줄 것이고, 훗날 미국과 독일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총통 각하, 외람되오나 각하의 구상은 그리 현실성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설사 우리의 선동이 먹혀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더라도, 금방 진압되지 않겠습니까?”

하이드리히가 말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 구상이 그다지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철저한 계획이다기 보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찔러보는 수준이라고 봐야지. 단 몇 시간만으로 상대국 국민들의 인식을 바꿔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수지맞는 장사도 없지 않겠나?”

“그렇지만 흑인과 식사를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각하의 위신에도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상관없네. 나는 이미 ‘명예 중국인’이라는 소리까지 들어본 사람이야. 나를 증오하는 놈들이 나를 가리켜 ‘명예 흑인’이라고 불러도 난 전혀 개의치 않네. 그놈들은 내가 뭘 하든 간에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흠집을 내려는 놈들이니까.”

하이드리히도 더 이상 내 말에 딴지를 걸지 못했다. 자기가 들어도 그럴듯하게 들렸나 보다.

***

올림픽은 예정대로 차질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조선에 돌아간 손기정과 남승룡은 높아진 인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제시 오언스의 경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미 정부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금메달리스트들은 모두 백악관에 초청을 받았음에도 흑인이었던 그는 예외였다.

올림픽이 끝나고, 세계의 관심은 다시 스페인에 집중되었다.

프랑스와 멕시코, 소련은 스페인 공화파를 지원했고 이탈리아와 독일, 포르투갈은 국민파를 지원함으로써 스페인 내전은 일종의 대리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정면에 적 전차다!”

“씨발! 모두 흩어져!”

“엄마! 엄마아아아아!!!”

전선에선 연일 포성과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피가 튀기고, 사람이었던 것이 으스러져 흙에 파묻히는 지옥이 스페인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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