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1)
1936년 7월 18일
사회주의 성향의 공화파가 집권한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 극우, 반공을 내세운 국민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2차대전의 튜토리얼이라 평가받는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었다.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와 전쟁 중인 상황인데도 곧바로 국민파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다.
가뜩이나 에티오피아에서 입은 피해조차 회복하지 못했는데 남에게 퍼주기나 하다니.
하여간 저놈의 허세 하나는 인정해줘야 한다. 육체를 이긴 가오, 아니 육체를 이긴 허세인가.
나 또한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과 물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기존 무기들의 성능 점검 겸 군사교리 확립과 훈련에 필요한 각종 데이터 수집을 위해선 군사고문단 파견이 필수였다.
겸사겸사 스페인에 있는 광산과 항구들도 뜯어내고 말이지.
“슈페를레 장군.”
“예, 총통 각하.”
“장군만 믿겠소. 가서 빨갱이들에게 게르만 민족의 힘을 보여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일 군사고문단 ‘콘도르 군단’의 사령관으로 루프트바페의 후고 슈페를레 소장이, 슈페를레의 참모장으로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대령이 뽑혔다.
육군에서는 빌헬름 리터 폰 토마 대령이 콘도르 군단 소속 육군 전투부대 ‘임머 전투단’ 지휘관으로 선발되어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콘도르 군단의 파견을 앞두고, 나는 육군 상층부와 논쟁을 벌였다. 스페인에 어떤 장비를 보낼지 의견이 갈려서였다.
“1호 전차만으로 충분합니다, 총통 각하! 굳이 2호 전차를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놈의 융커들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스페인 공화파를 상대하는데 1호 전차면 충분하다며 큰소리를 쳤다.
쪽수만 많지 실상은 민병대 수준에 불과한 공화파는 전장에서 전차만 나타나도 도망치기 바쁠 것이라면서.
이놈들이 어디서 개구라를 쳐? 내가 미래에서 와서 아는데 전혀 안 그렇다니까?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가 대체로 오합지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녀석들이 굴렸던 장비는 1936년 기준으로 결코 2선급이라 할 수 없었다.
소련에서 지원한 T-26, BT-5 경전차는 국민파가 사용한 독일제 1호 전차나 이탈리아제 L3 탱켓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탓에 국민파 전차들은 소련제 전차가 나타나면 무력하게 격파당하기 일쑤였다.
1호 전차에 탑재된 기관총으론 도저히 적 전차를 격파할 수가 없어서 급한 대로 이탈리아제 브레다 20mm 기관포를 올리는 개조를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제대로 된 전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죽했으면 국민파가 소련제 전차를 노획하는 병사에겐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며 적 전차를 노획할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을 정도다.
“1호 전차는 무장이 너무 빈약해서 안 되오. 기관총으로 적 진지나 전차를 격파할 수 있을 것 같소? 2호 전차를 보내야 한다니까!”
그랬기에 나는 콘도르 군단 소속 전차병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1호 전차보다 강력한 2호 전차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츠와 구데리안도 1호 전차보다 2호 전차를 보내야 한다며 내 주장을 뒷받침했고 결국 1호 전차와 2호 전차를 둘 다 보내되 1호 전차는 소량만 보내기로 타협을 봤다.
그래, 이번엔 넘어가 주지. 어차피 곧 내 말이 맞다는 것이 입증될 테니까.
스페인 내전에 이은 올해의 또 다른 빅 이벤트는 바로 베를린 올림픽이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열린, 최초이자 최후의 올림픽.
실제 히틀러도 그렇고 나도 올림픽 개최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본래 내가 스포츠 경기에 관심이 그다지 없어서 그러는 건 결코 아니다.
올림픽 개최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렇지.
나는 올림픽을 열 돈으로 무기나 더 만들자는 입장이었지만, 의외로 주변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괴링과 괴벨스, 심지어 이런 분야에는 관심이 전혀 없을 줄 알았던 힘러조차 내 의견에 결사반대했다.
“총통 각하, 이미 1930년에 우리가 유치하기로 한 것을 비용 문제로 포기한다면 전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올림픽은 아리아인의 위대함을 세계에 선전할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개최해야 합니다.”
끄응.
결국, 올림픽은 역사대로 1936년 8월 1일에 개최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선수단,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괴벨스가 작성해준 올림픽 개회사를 읊었다.
“정정당당한 시합은 사람의 육체에 잠들어있는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스포츠 정신 안에서 선수들을 서로 단합시킵니다.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간의 결속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괴벨스 이 인간, 글솜씨도 기가 막힌단 말이야.
개회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마음 같아선 푹신한 침대에 누워 낮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지만, 올림픽 개최국의 국가수반이라는 점 때문에 함부로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멀뚱멀뚱한 눈으로 경기장을 바라보는 나와 달리, 주변 간부들은 어린아이처럼 신난 얼굴이었다.
하긴, 인터넷이며 TV, 만화처럼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무궁무진한 21세기와 달리 오락거리가 별로 발달하지 못했던 20세기에는 올림픽이 커다란 구경거리였겠지.
집집마다 컴퓨터는커녕 텔레비전도 잘 없던 시절이니까.
가만, 모처럼 열린 올림픽이니 어쩌면 ‘그 사람’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독일인들이 하켄크로이츠라 부르는 갈고리 십자가 깃발들이었다.
고향 사람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독일은 불교를 믿는 국가냐고 물었으리라. 서양 코쟁이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아느냐며 놀라워했을 테고.
24살의 식민지 청년 손기정은 씁쓸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는 절친 남승룡도 얼굴에서 비통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올림픽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 지금의 이 순간이 오리란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기정이, 나는 그래도 자네가 정말 부럽네.”
“그건 또 뭔 소리야?”
“자네는 묘목으로 가슴이라도 가릴 수 있었지, 나는 아무것도 없었는걸.”
금메달을 딴 손기정에겐 묘목이 주어졌는데, 손기정은 이것으로 가슴팍에 달린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다. 그러나 동메달을 딴 남승룡은 그렇지 못했다.
“독일 사람들도 참 인색하지. 기왕이면 1, 2, 3위 모두에게 묘목을 주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비싸지도 않을 텐데. 안 그런가?”
“그러게나 말일세.”
물론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만 묘목을 주는 이유가 묘목 값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란 것쯤은 그들도 잘 알았다. 그래도 영 아쉬움이 남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자신들의 경기를 끝낸 선수들은 어깨를 짓누르던 중압감에서 해방된 얼굴로 베를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올림픽의 또 다른 묘미인 관광을 즐기기 바빴다.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손기정과 남승룡에게도 베를린 시내를 둘러볼 자격이 충분했지만 이들은 그럴 생각이 딱히 없었다.
만약 유니폼에 달린 깃발이 일장기가 아니었더라면 이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독일 수도를 둘러봤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을 한낱 식민지 청년들에 불과했다. 적어도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일본 대사관에서 올림픽 우승 기념으로 축하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권했지만 둘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왜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 왔느냐고 빈정거릴 땐 언제고 우승을 하니 저리 태도가 바뀌다니.
대신 이들은 베를린에 위치한 작은 두부공장으로 향했다.
두부공장의 주인은 안중근의 사촌, 안봉근으로 독일로 유학을 왔다가 독일 여자와 결혼해 베를린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두부공장의 노동자들도 모두 같은 조선인들이었다.
축하연에는 막걸리와 두부, 김치가 차려졌다.
화려한 만찬과 거리가 멀었지만 아쉽거나 허탈하진 않았다. 비록 몸은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독일에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고향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에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누가······ 말입니까?”
“히틀러 총통이 자네들을 보고 싶어 하네.”
손기정과 남승룡은 물론, 일본인 통역관 타무라 마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좀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누가 우릴 만나고 싶어한다고? 독일 총통이? 정말로?
“그, 그게 사실입니까?”
남승룡은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타무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것도 최대한 빨리 보고 싶어 한다는군. 지금 숙소 밖에 총통이 보낸 차가 있네.”
타무라는 이어 총통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만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독일의 총통이 우리를?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이야 그렇다고 쳐도 동메달리스트인 남승룡까지? 둘은 아직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싶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서두르게. 얼른 옷 갈아입고!”
챙겨온 옷들 중에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타무라를 따라 숙소 밖으로 나갔다.
정말로 히틀러 총통이 보낸 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무척 보기 힘든 고급 승용차였다.
조선 총독이나 황족은 되어야 타고 다닐 수 있는 차를 타게 되다니. 손기정은 아직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허나 손바닥에 만져지는 시트의 푹신한 감촉은 진짜였다. 이 정도로 생생한 꿈이 있을까?
운전대를 잡은 SS 운전병은 손님들이 모두 차에 타자 즉시 총통관저를 향해 출발했다.
***
“왔구만. 아시아의 영웅들이.”
살다살다 손기정과 남승룡을 다 만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미 레마르크부터 구데리안까지, 역사책에서나 나오던 인물들을 죄다 만나봤으니 별로 새로울 게 없다지만, 히틀러에 빙의한 이후로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라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저들은 내가 사실은 미래에서 온 같은 나라 사람이란 사실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손기정 선생.”
나는 먼저 환한 얼굴로 다가가 손기정에게 손을 건넸다. 손기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바, 반갑습니다, 총통 각하.”
옆의 통역관이 내가 한 말을 일본어로 통역해 손기정에게 들려주고, 다시 손기정이 한 말을 독일어로 통역해서 내게 들려줬다.
굳이 통역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내버려 뒀다. 독일 총통이 한국어를 안다고 생각할 리가 없으니까.
“아, 당신이 남승룡이군요. 반갑소이다.”
“영광입니다, 총통 각하.”
남승룡도 반쯤 떨면서 내 손을 붙잡았다.
“어떻게 저희 이름을 알고 계신지······?”
손기정이 말했다. 독일 총통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메달을 받으러 갈 때 호명된 이름도 한국식 본명이 아니라 일본식 이름이었니 더더욱 의문일 터였다.
그야 내가 당신들과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라곤 말 못하고 그럴듯한 변명으로 얼버무려야 했다.
“독일 총통이 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여러분의 본명이 무엇인지,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는지 정도는 금방 알아낼 수 있소.”
즉석에서 지어낸 말인데, 이들은 내 말을 정말로 믿었는지 깜짝 놀랐다. 통역관도 놀랐는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실 뻥인데.
아무리 그래도 먼 동방의 청년들 본명과 가정사까지 하루아침에 아는 것은 무리지.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고.
“시시콜콜한 것은 넘어갑시다. 아무튼 손기정 선생, 올림픽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바요. 남승룡 선생도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정말 큰일을 해내셨소. 스포츠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나조차, 마라톤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란 사실을 아는데. 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거요.”
“과찬이십니다, 총통처럼 강력한 의지를 가지신 분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실 겁니다.”
손기정이 말했다.
남승룡은 아직도 지금 이 순간이 믿겨지지 않는지 멍한 얼굴이었다. 통역관도 무척 놀란 눈치지만 통역하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직업정신 하나는 투철한 양반이구만.
“한국에 돌아가면 이제 어쩌실 계획이오?”
“아마 같은 일을 계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군. 하긴,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을 계속해야지. 안 그렇소, 남 선생?”
“그렇지요.”
“참. 두 분 다 식사는 하셨소?”
“예? 아직입니다만.”
“극동에서 귀중한 손님들이 왔는데 빈속으로 보낼 수 없지. 식사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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