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는 파스타답게 (2)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다시 세계정세가 요동쳤다.
에티오피아는 국제연맹에 이탈리아를 고발했지만 사실상 속 빈 강정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던 국제연맹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저 형식적인 경고와 규탄성명만 낼 뿐.
영국과 프랑스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규탄하며 이탈리아에 경제제재를 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 역시 말뿐이었다.
이제 막 뉴딜 정책으로 불경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미국도 에티오피아 일에는 무관심했다. 소련도, 일본도 마찬가지였고,
“이탈리아의 침략행위는 명백한 범죄 행위입니다. 독일은 이러한 이탈리아의 야만적인 침략에 강력히 항의하며 동시에 이탈리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나도 대세에 편승하여 이탈리아에 대한 규탄 성명문을 발표했다.
지금 당장은 이탈리아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할 생각은 없으니 일단은 형식적인 항의로 그칠 생각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다는 것이지.
“에티오피아 친구들이 잘 싸워줘야 할 텐데.”
“총통 각하께서 무기와 교관들까지 지원하셨으니, 열심히 싸우지 않겠습니까?”
괴벨스의 말. 정작 괴벨스는 에티오피아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총통 각하. 군부에서 필요 이상으로 에티오피아에게 퍼준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힘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놈들은 늘 그래. 내가 뭘 하든 간에 불평불만밖에 없지. 전에 라인란트 때도 그놈들은 투정만 하지 않았나.”
군부는 에티오피아에 무기를 지원하자는 내 의견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물자를 너무 많이 퍼준 것 아니냐는 불만을 제기했다.
조금 많이 퍼주긴 했어도 말이 나올 만큼 과도한 양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특히 베크는 흑인 깜둥이들에게 무기를 줘봤자 변기에 돈을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내 뒷담을 대놓고 했단다.
이 노친네는 하여간 사람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어.
마음껏 떠들라지. 언젠가 네놈들 입에서 살려달라는 비명이 튀어나오게 해줄 테니.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참아야 한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콜라로 속을 달래고 향후 계획 수립에 집중했다.
이제 한동안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문제 외의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다.
놈들이 에티오피아에 정신이 팔린 동안,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지.
***
“적들이 온다!”
이탈리아군이 온다는 말에 제각기 흩어져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에티오피아군 병사들은 황급히 참호로 들어갔다.
“전원 전투 준비!”
에티오피아 병사들이 사용하는 소총은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하던 Gew98로, 예비용으로 창고에 보관 중이다가 히틀러의 명령으로 에티오피아로 보내진 것들이었다.
“내가 신호하면 쏜다! 그전까지 쏘는 놈들은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다!”
독일 국방군 소속 요제프 강글 상사가 소리치자 그의 통역병이 에티오피아어로 통역해서 소리쳤다.
에티오피아군을 돕기 위해 파견된 독일군 고문단 중 한 명인 강글은 이탈리아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독일 국방군의 군복 대신 에티오피아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또한 포로로 잡힐 경우 에티오피아 정부에 고용된 오스트리아인 용병이라고 진술하라고 상부로부터 지시받은 상태였다.
강글은 에티오피아로 떠나기 전, 총통과 만나 악수했다.
총통은 에티오피아로 떠나는 고문 한 명 한 명과 악수하며 그들의 무운을 빌었다.
‘내 손으로 사지로 보내놓고 죽지 말라고 말하니 민망하구만. 지도자로서 할 말이 없네. 그래도 다들 열심히 싸워주길 바라네.’
‘명심하겠습니다, 총통 각하!’
강글은 MP28 기관단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어느새 이탈리아군은 사정거리 코앞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사격 개시!”
강글의 신호가 떨어지자, 60개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꽃이 튀었다.
산책을 하듯 느긋하게 걸어오던 이탈리아 병사들은 에티오피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혼비백산했다.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명령을 내려야 하는 장교들조차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저 한심한 놈들. 저러고도 로마의 후예라고.
“차라리 원시인들이 더 잘 싸우겠다, 무능한 놈들아!”
강글은 한 손으로 능숙하게 탄창을 교환했다. 각 중대당 한 대씩 배치된 귀중한 MG08 기관총도 열심히 불을 뿜어 이탈리아군을 고꾸라뜨렸다.
20년 전 벨기에의 진흙탕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상대로 불을 뿜던 무기가 지금은 아프리카 들판에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불을 뿜고 있었다.
“전차다! 전차다!”
이탈리아군의 L3 탱켓이 나타나자 에티오피아군이 일제히 전차를 외쳐댔다.
분류상 전차에 속하긴 하나, 성능만 따지자면 전차라 불러주기에 민망한 수준인 탱켓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기갑차량이 없었던 이탈리아군은 이를 대량으로 굴리고 있었다.
L3에 장착된 브레다 M30 기관총이 불을 뿜기 전에 에티오피아군의 탕크게베어가 먼저 불을 뿜었다. 이 또한 독일이 에티오피아군에게 지원한 것이었다.
가장 두꺼운 부분조차 12mm밖에 되지 않는 L3의 장갑은 종잇장처럼 뚫렸다.
탕크게베어의 13.2mm 총탄을 연거푸 얻어맞은 L3는 기동을 멈췄다.
차량에 탑승한 전차병들은 팔다리가 분리된 처참한 시체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잘했어! 계속 쏴!”
강글의 말은 전장의 소음에 묻혔지만,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또 한 대의 L3가 전면을 관통당해 전투 불능이 되었다.
다른 유럽인들처럼 강글 역시 열등한 흑인들을 지휘해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영 못마땅했다.
총통의 명령 때문에 에티오피아에 오긴 했지만 이들이 훈련을 얼마나 따라올지에 대해선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부족한 훈련 일수를 생각하면 에티오피아군은 예상보다 훨씬 잘 싸워주고 있었다.
에티오피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군은 본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잠시 후 이탈리아군은 황급히 전사자들과 격파된 차량의 잔해를 두고 물러섰다.
승리를 확신한 에티오피아군은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만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탈리아군의 포탄이 떨어졌다.
이탈리아군이 투하한 포탄은 기존의 포탄들과 달랐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고, 대신 누런 가스가 나왔다.
“젠장, 독가스다!”
포탄의 정체를 눈치챈 강글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황급히 방독면을 꺼냈다.
“전원 방독면 착용!”
독일제 방독면이 에티오피아군의 목숨을 구했다. 방독면이 없었더라면 이들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강글은 소름이 다 돋았다.
20분 뒤, 이탈리아군은 재차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에티오피아군의 시체가 아닌 에티오피아군의 총알이었다.
“뭐야? 저놈들 아직 안 죽었잖아!?”
“씨발, 저 새끼들도 방독면을 쓰고 있어! 보라고!”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탄 아래 이탈리아 병사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
“믿을 수 없군. 어떻게 이런 일이······.”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총독이자 에티오피아 남동부 방면 이탈리아군 총사령관인 로돌포 그라치아니 원수는 전황 보고를 받곤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미개한 흑인들 따위가 로마의 후예인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번번이 격퇴시키다니.
독가스 공격을 퍼부어도 에티오피아군도 방독면을 보유하고 있었던 탓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울화가 치민 그라치아니는 탁자를 내리쳤다.
“저 깜둥이 새끼들이 어떻게 방독면까지 가지고 있는 건가?!”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아 풀렸다. 에티오피아군 전사자들을 수색하던 이탈리아군이 에티오피아군이 사용한 방독면을 노획해 그의 앞에 대령했기 때문이다.
“이건 영국제도, 프랑스제도 아닙니다.”
노획한 방독면을 살펴본 화학전 장교가 말했다.
“그럼 뭔가?”
“독일제 같습니다, 각하.”
“독일제라고? 독일제 방독면을 왜 저놈들이 쓰고 있는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애초에 원수도 모르는 것을 일개 장교가 알 리가 있나.
수상한 점은 또 있었다. 에티오피아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 중에 유독 독일제 무기들의 비중이 많았던 것이다.
독일제 소총부터 수류탄, 기관총, 방독면까지. 이 모든 증거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독일 놈들의 수작질이 분명하군.”
“그렇습니다, 각하. 놈들의 짓이 분명합니다.”
“서둘러 본국에 알리겠습니다.”
그라치아니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독일이 이탈리아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지만, 우릴 엿먹이기 위해 깜둥이들을 지원하다니. 그놈들은 백인도 아니라는 말인가?
에리트레아 방면군 총사령관 에밀리오 데 보노 장군도 본국에 같은 보고를 올렸다.
에티오피아군이 독일제 무기와 방독면을 사용하고 있다고.
***
“총통 각하, 이탈리아로부터 항의 서한이 도착했습니다만······.”
“보나마나 우리가 에티오피아에 무기를 지원한 것 때문이겠지. 적당히 둘러대게.”
역시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군이 독일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항의해왔다. 이에 대한 우리의 전략은 ‘오리발 내밀기’였다.
에티오피아군이 사용 중인 장비가 독일제인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에티오피아가 먼저 구매의사를 밝혀 제값을 받고 팔았을 뿐이니 독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이탈리아인들이 믿을까요?”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우리가 대놓고 무기를 팔아도 놈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일세. 그냥 내버려 둬.”
“하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총통 각하.”
괴벨스는 내 대답을 듣고 한시름 놨다는 듯 안도했다.
“파스타 놈들이 에티오피아에서 뭘 하든 간에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되네. 돌푸스에게서 답장은 왔나?”
“예. 총통 각하의 제안을 기쁘게 생각하며 본인도 최대한 빨리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좋아, 아주 좋아.”
오스트리아의 총리이자 독재자 지망생인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역사대로라면 1934년 7월 25일에 암살당했어야 했다.
돌푸스를 암살한 이들은 다름 아닌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에 부정적이고 나치당 활동을 불법화한 돌푸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그를 암살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역사에서 그는 아직까지 살아있다. 총통이 된 내가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게 오스트리아 정부의 명령에 전적으로 협조하라고 지시했고 이들은 내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돌푸스는 암살당하지 않았고 그와 나치당과의 관계도 원만한 상태였다.
나는 그에게 독일-오스트리아간의 협력 관계 논의를 위해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돌푸스도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이번 회담에서 우리는 아주 솔직하게 건실한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일이 계획대로 착착 풀리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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