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바게트는 바게트답게 (19/150)

바게트는 바게트답게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말 그대로요. 나는 곧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킬 계획이오.”

1935년 6월의 끝자락, 나는 군부 인사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라인란트 재점령 의사를 밝혔다.

미리 언질을 받았던 블롬베르크와 친나치 장성들은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나머지는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일제히 경악했다. 곧바로 어마어마한 반대가 터져 나왔다.

“무리입니다, 총통 각하! 그랬다간 프랑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국방군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전쟁이 터지면 저흰 곧바로 베를린으로 밀려날 겁니다!”

국방군 장성들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이는 육군 총참모장 루트비히 베크였다.

“총통 각하, 너무 위험한 생각이십니다.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육군 내 최고참 군인들 중 한 명인데다가 1차대전 때부터 참모로 활약했던 이력 탓에 그가 육군에서 가지는 위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나 또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원 역사에선 독일 내 반나치 인사들의 모임인 ‘검은 오케스트라’의 수장 격인 인물로 히틀러 암살계획인 발키리 작전을 감행했다가 실패하고 자살했던 인물.

그리고 지난 회귀에선 쿠데타를 일으켜 나를 감금하고 끝에는 총살했던 개새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베크의 눈을 응시했다. 내 시선을 받자 베크는 몸을 움츠렸지만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베크 장군, 나 또한 장군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소. 그래, 우리가 라인란트에 발을 딛자마자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는 게 우려스러운 것이지.”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이제 갓 재무장에 들어간 국방군이 유럽 최강 군대인 프랑스군과 맞붙으면 승산이 전혀 없을 테고.”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예?”

“우리보다 더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게 바로 프랑스인들이오. 내 하나 물어보지. 대전쟁에서 프랑스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아시오?”

“갑자기 그건 왜···.”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알려주지. 대전쟁으로 프랑스는 500만이나 되는 사상자가 나왔소. 그중 138만 5천 명이 전사, 실종으로 처리되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사상자들은 모두 프랑스의 청년들이었소. 프랑스는 전쟁 한 번으로 자국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인재들의 3분의 1이 날아가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소.

지금도 프랑스는 그 피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지.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전쟁을 그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있소. 또 한 번 전쟁이 일어났다가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프랑스는 정말로 끝장이니까.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가 지도에서 사라진단 말이오.”

1차대전 서부전선이 벨기에와 프랑스 영토 내에서 형성되었던 탓에 프랑스는 국토가 폐허가 되는 것은 물론 수많은 자국 청년들을 잃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던 프랑스에게 자국 청년층의 궤멸은 도무지 복구할 수 있는 피해가 아니었다.

2차대전 때는 독일에게 점령당해 괴뢰국으로 전락하는 굴욕을 겪긴 했어도 프랑스 내에서의 전투 자체가 단기간에 끝나 자국 청년들의 피해가 다소 적었던 반면, 1차대전은 4년 내내 참호전을 반복하다 보니 자국 청년들이 문자 그대로 매일같이 갈려 나가야만 했다.

이 때문에 21세기에도 프랑스는 2차대전보다 1차대전을 더 끔찍한 과거로 여긴다.

그 지옥 같은 전쟁이 끝난 지 겨우 17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 전쟁을 벌이자고 한다면 찬성할 프랑스인들이 몇 명이나 될까?

“프랑스는 겁쟁이요. 말로는 큰소리 떵떵 치면서 뒤로는 누구보다 전쟁을 두려워하는 허세 가득한 나라란 말이오. 사실 그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독일 국민들이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프랑스인들이 전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크오. 그리고 나는 프랑스인들의 감정을 이용하려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 국방군도 강력해지겠지만 동시에 프랑스인들의 두려움 또한 희석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우리가 모든 준비를 끝냈을 즈음엔 프랑스인들도 우리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겠지. 그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단 말이오.”

“······!”

“물론 여러분의 걱정 또한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오. 만에 하나 프랑스군과 교전이 벌어지면 곧바로 대규모 분쟁으로 이어질 텐데, 무기도 탄약도 병사도 부족한 우리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될 수 없겠지. 따라서 나는 프랑스군이 움직이는 기색을 보인다면 곧바로 군대를 도로 철수시키겠소. 어떻소?”

“······정말이십니까?”

드디어 넘어왔군. 강단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베크는 사실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인간.

이렇게 살살 달래면서 타협을 제시하면 곧바로 덥썩 무는 게 베크 같은 인간들의 특징이다.

“독일 총통의 이름으로 보증하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1단계는 해결. 이제 2단계로 넘어가야지.

***

독일군이 라인강 일대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은 곧 프랑스군 수뇌부에게도 전해졌다.

“이놈들은 지금 대체 무슨 꿍꿍이지?”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은 답답하다 못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 원흉은 당연히 독일, 그리고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다.

상병 시절 전투에서 전차 2대를 단신으로 격파하고 영국군 수십 명을 사살하는 공훈을 세워 당대 전쟁영웅이었던 힌덴부르크에게 훈장을 수여받은 인간병기, 자서전을 통해 세계 대공황과 일본의 중국 침략까지 예언한 괴물 중의 괴물.

총리가 된 후에는 반대파를 가차 없이 날려버리면서도 특유의 카리스마와 연설로 국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적국이었던 폴란드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불가침조약까지 체결, 경제 문제까지 해결했다.

이토록 범상치 않은 인물이 있을까? 저 머나먼 소련의 레닌 정도는 되어야 히틀러에 견줄만할 것이다.

현재까지 알아낸 모든 정보를 취합해볼 때, 히틀러의 의도는 하나뿐이었다.

라인란트 재점령.

프랑스, 벨기에-독일 국경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구역인 라인란트에는 원칙상 독일의 영토이긴 하나 독일 군대의 주둔이 불허된 비무장지대였다.

라인란트를 비무장지대로 설정한 덕분에 프랑스와 벨기에인들은 당장 전쟁이 터져도 독일이 국경을 넘으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라인란트가 사라진다면?

프랑스는 다시 독일군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할 수밖에 없어진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프랑스 영토 내로 독일군의 포탄이 비 오듯이 낙하할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절대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

발등이 불이 떨어진 가믈랭은 즉시 프랑스군 수뇌부를 소집해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회의의 결론은 실망을 넘어 충격스러웠다.

“각하도 아시다시피, 대공황으로 국방예산이 대거 삭감되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때문에 우리 군은 크게 약화되었지요. 훈련을 하려면 연료와 탄약을 살 돈이 필요한데, 당장 병사들 봉급 주는 일도 겨우 하는 마당에 훈련을 자주 할 수 있겠습니까.”

“전방에 배치된 사단들 중에 훈련을 해본 사단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병사들의 사기도 낮고요.”

“알고 있네.”

“그런데 독일 놈들은 숫자는 물론 질적으로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상태입니다.”

“히틀러가 국방력 강화에는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거든요. 지금도 그렇고.”

“우리 프랑스 육군이 유럽 최강인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독일군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병력의 사기와 숙련도 측면에선 우리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게다가 정보부의 보고에 따르면 라인란트에 투입 예정인 독일군의 규모는 30만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전쟁이 터진다면, 막대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여론도 무력 충돌은 최대한 피하자는 의견이고요.”

한마디로 말해, 독일과 단독으로 싸우기엔 무리라는 뜻이었다.

가믈랭은 회의 결과를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과 피에르 라발 총리에게 알렸다.

“군의 보고가 이리 절망적일 줄이야······.”

르브룅의 입에서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프랑스 육군은 유럽 최강이라는 군부 인사들의 말만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 막상 독일과 전쟁을 벌인다면 밀릴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군부가 거짓으로 보고를 올렸을 리가 없다.

콧대 하나는 더럽게 높고 말도 제대로 안 들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그 분야에선 전문가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그 자존심 강한 프랑스 군부가 스스로 자존심에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믿어도 좋으리라.

“아무래도 우리 프랑스만으론 독일과 대적하는 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발이 말했다.

“이를 어쩌면 좋겠나?”

“일단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청해보죠.”

***

영국은 프랑스의 도움 요청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같은 해 1월, 독일과 영독 해군조약을 체결한 바 있던 영국은 굳이 독일과 적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라인란트는 독일 땅이니 독일군의 주둔 정도는 허용해주자는 게 영국의 입장이었다.

영국의 도움이 좌절되자 프랑스는 이탈리아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반응도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독일을 공격하기 위해선 오스트리아를 지나야 하는데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으로 이탈리아군의 통과를 허용해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공을 준비 중이었다.

이미 이탈리아 정예사단들이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에 집결한 상태인데, 프랑스를 지원하려면 다시 이 사단들을 유럽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당연히 에티오피아 침공은 나가리되는 것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무솔리니는 프랑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솔리니도 우리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허어, 이러면 안 되는데······.”

가장 믿었던 핵심 동맹국들에게 배신당한 프랑스는 당황했다.

영국이야 영독 해군조약 건으로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만큼은 예외일 줄 알았는데 막상 거절당하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릅니다. 영국과 이탈리아 외에도 다른 동맹국들이 있으니까요.”

비록 두 국가에게 연속으로 거절당했지만, 다른 동맹국들은 많이 있었다.

벨기에는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입을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체코슬로바키아도 프랑스가 군사행동에 나설 시 후방에서 이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은 너무 작았다.

프랑스군 수뇌부도 전쟁이 터지면 이들 나라들의 군대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 회의적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포, 폴란드가 있었지. 폴란드라면 분명 다를 거야.”

동유럽의 강국인 폴란드라면 프랑스의 입장을 이해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를 비웃듯 폴란드도 영국과 이탈리아처럼 애매한 답변만 내놓았다.

“프랑스가 독일의 침략을 받는다면 1921년에 체결한 프랑스-폴란드 군사동맹에 의거하여 참전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프랑스가 침략을 당했을 시에만 발효가 가능합니다.”

쉽게 말해 프랑스가 침략당하지 않는 이상 참전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이들 국가들도 이탈리아처럼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은데다, 독일과도 별다른 접점이 없었기에 굳이 전쟁이라는 위험한 도박에 함께 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니, 어떻게 동맹국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도움이 안 되나?”

르브룅은 어이가 없었다.

그 많던 동맹국들 중에 겨우 두 나라만 프랑스와 함께 하겠다니. 그나마 두 나라도 전쟁이 터지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소국들이었고.

“아무래도 이번에는 우리가 물러서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각하.”

라발이 말했다.

“알겠네. 잘 알겠어······. 우리가 물러서는 수밖에.”

***

1935년 8월 7일, 국방군은 라인란트에 진주했다.

도박은 대성공이었다.

“어떻소? 내 말이 맞지 않소이까?”

“역시 총통 각하의 혜안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습니다!”

라인란트 재점령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자 독일 전역은 축제 분위기였다.

신문과 방송들은 연일 나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고, 사람들은 지크 하일을 외치며 집집마다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내걸었다.

“총통 각하의 천재성은 도무지 범접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많이 배웠습니다, 총통 각하.”

내게 반대하던 군부 인사들조차 열심히 딸랑거렸다. 심지어 그 베크조차 말이다.

지금이라도 이미지 세탁에 들어가려는 모양인데, 이미 늦었어 이것들아.

나는 마지막까지 내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장성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대화를 나눴다.

“이제 파스타 차례군.”

“그건 무슨 의미십니까?”

리벤트로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파스타가 드시고 싶으신 겁니까? 주방장에게 말해놓을까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닐세.”

얼음을 둥둥 띄운 코카콜라를 한 모금 음미한 뒤, 리벤트로프에게 귓속말을 했다.

“리벤트로프, 자네에게 맡길 일이 있네.”

“말씀만 하십시오, 총통 각하.”

리벤트로프는 내가 자기에게만 따로 맡길 일이 있다고 말하자 흥분한 기색이었다.

명령만 내리면, 당장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라도 할 기세다. 아, 물론 여긴 2층이지만.

“아프리카에 갔다 와야겠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아프리카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말이 의외였는지 리벤트로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아프리카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겠지.

“아프리카 중 어떤 곳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집트? 모로코? 아니면 남아프리카 공화국?”

“다 틀렸어. 에티오피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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