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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차차차 (2) (18/150)

다함께 차차차 (2)

1934년 8월 2일

탄넨베르크 전투의 영웅이자 독일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했다.

그가 하늘의 부름을 받기 전날, 나는 측근들을 거느리고 힌덴부르크의 집으로 향했다.

일설로는 병상에 누운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보고 빌헬름 2세로 착각해서 ‘황제 폐하’라고 했다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저 왔습니다, 대통령 각하.”

“왔구만.”

힌덴부르크는 이제 말하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듯했다. 그는 나와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보다시피 내가 몸이 많이 안 좋네. 아무래도, 갈 때가 된 모양이야.”

“그런 말씀 하지 마십쇼. 각하께선 분명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실 겁니다.”

“아니. 내 몸은 내가 더 잘 아네. 이번이 마지막이야. 어차피 살 만큼 살았으니, 죽음이 두렵지는 않네.

다만······ 아쉬움이 크게 남을 뿐이지. 독일이 다시 세계에 군림하는 광경을 보고 가고 싶었는데······.”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힌덴부르크는 쓰러졌고, 그의 주치의가 황급히 뛰어와 대통령의 상태를 살폈다.

나는 작별인사를 건넨 뒤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힌덴부르크는 세상을 떠났다.

노원수의 마지막 유언은 ‘나의 황제 폐하, 나의 독일’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내게 한 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편지에는 그동안 내가 자신 밑에서 충실하게 일하며 여러 업적을 남긴 것에 대한 칭찬과 함께 네덜란드에 망명 중인 전 카이저 빌헬름 2세를 다시 복위시켜 달라는 부탁이 담겨 있었다.

두말하면 잔소리로 내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혀.

당장 이전 회귀 때도 그놈의 융커들 때문에 죽었는데 누구 좋으라고.

무엇보다 카이저는 더 이상 독일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다. 21세기였다면 관광객들 유치하고 기념품 팔아먹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1934년의 독일에는 글쎄올시다.

업적이라곤 나라 씹창내고 중립국으로 도망친 게 전부인 자를 내가 왜 복위시켜야 한단 말인가? 내가 이 자리에 오를 때 동안 카이저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 나라에 다시 카이저가 권좌에 오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지금 독일에 필요한 것은 카이저가 아니라 나다. 바로 나, 아돌프 히틀러란 말이다.

힌덴부르크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장례가 끝난 후 나는 총리와 대통령을 겸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는 총통이 되었다.

***

총통이 된 나는 우선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금지되었던 군대 제한 및 신무기의 보유가 가능해졌고 신체 건강한 독일 남자라면 누구나 징병검사를 받고 입대해야 했다.

독일의 재군비 선언은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

비난 성명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정상들이 이탈리아 스트레사에 모여 대독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 일명 ‘스트레사 체제’를 탄생시킴으로써 독일에 대한 견제를 드러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말만 번지르르할 뿐, 이들에겐 전쟁을 할 생각이 아예 없었으니까.

이를 입증해준 사건이 1935년 1월에 영국과 체결한 영국-독일 해군조약이었다.

스트레사 체제를 구축하긴 했지만, 가능한 한 독일과의 무력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영국은 독일과 개별적으로 접촉을 시도, 본격적인 ‘독일 달래기’에 돌입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영독 해군조약으로 주력함의 배수량을 최대 35,000톤으로 제한하되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 주력함 총톤수의 35%까지 군함을 건조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독일은 그동안의 제한에서 벗어나 합법적으로 수상함대 재건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영독 해군조약이라는 선물을 들고 돌아오자 그간 뻣뻣한 태도로 내 의견에 태클을 걸던 레더도 조금은 고분고분해졌다.

그놈의 전함 사랑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레더와는 최대한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는 게 내 본심이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지난 회귀 때 그는 왕당파임에도 불구하고 아프베어 지하실에 감금된 나를 구출하여 유보트로 도피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융커들이 먼저 눈치를 챈 탓에 그의 시도는 실패했고,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레더와 마찬가지로 왕당파지만 내게 충성했던 되니츠도 같은 결말을 맞이했고.

짐승조차 은혜를 아는 법인데, 사람이 잊으면 쓰나.

“어떻소이까, 맛이?”

“요 근래에 마셨던 술 중에서 단연 최고군요.”

나는 진솔한 대화를 위해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레더가 방금 마신 와인은 특별히 프랑스에서 공수한 최고급 샤토 라피트 로쉴드다.

와인에 대해 문외한이라 비싼 놈으로 가져오라고 했는데 과연 비싼 놈은 향부터 달랐다.

괜히 최고급이 아니군.

미디움으로 잘 구워진 송아지 스테이크-괴링이 적극 추천한 메뉴다-를 썰면서 나는 운을 뗐다.

“제독도 알겠지만, 지금 우리 독일은 돈이 부족해요, 돈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산더미 같은데, 예산이 한정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렇지요.”

경제장관인 얄마르 샤흐트가 열심히 경제를 되살리고 있지만, 여전히 나라에는 돈이 부족하다.

돈이 부족하니 최대한 알뜰하게 쓸 수밖에 없는데 천문학적인 비용을 필요로 하는 전함을 마구 건조할 수는 없는 법.

사실 레더가 원하는 대함대를 만들어내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려면 육군과 공군을 포기해야 해서 그렇지.

“전함뿐만이 아니라 유보트도 만들어야 하고, 구축함도 만들어야 하고, 병사들 식판에 소시지도 담아줘야 하고. 돈 들어갈 곳이 많아요. 나라고 왜 전함이 싫겠소? 가질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전함을 다 가지고 싶은데.”

“허허허······.”

송아지라고 해도 그래봤자 소인 건 변함이 없으니 맛이 다를까 싶었는데, 정말로 맛이 달랐다. 일반적인 소고기보다 훨씬 부드럽고 달큰한 맛이었다. 죽이는구만.

“이렇게 합시다.”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판단되자, 나는 해군력 증강 계획, 통칭 ‘Z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본래 Z 계획은 전함 10척과 순양전함 3척, 항공모함 4척, 포켓전함 12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35척, 구축함 68척, 유보트 249척, 어뢰정 90정을 건조하는 것이었지만, 당연히 이는 무리다.

나는 이 정신 나간 계획을 열심히 뜯어고쳤고, 그 결과 Z 계획은 역사보다 대폭 축소되었다.

“전함은 4척, 중순양함은 8척, 경순양함은 16척, 항공모함과 어뢰정은 그대로, 구축함은 40척, 유보트는 300척으로. 어떻소이까?”

“······유보트가 제 예상보다 많이 는 것 같습니다만.”

“제독, 지난 전쟁에서 유보트가 얼마나 활약했는지 제독도 잘 아시지 않소. 원래는 500척을 만들 계획이었는데 이조차 수정한 것이오. 마음 같아선-”

“자, 잘 알겠습니다.”

레더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결국 내 구상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적어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이조차도 제때 건조할 수 있을지 의문이오. 당장 우리 기술자들부터가 전함을 만들어본 지가 오래된데다가, 육군과 공군에서도 해군에 예산이 너무 많이 할당된다며 불만을 토하고 있기 때문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총통 각하께서 이토록 해군을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해해주시니 다행이오.”

***

이건 조금 나중의 일이지만 전차 개발에 대한 얘기를 미리 해두자면, 육군의 격렬한 반대로 끝내 개발이 결정된 2호 전차는 무사히 시제품이 나왔다.

시제품의 실험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자연스레 양산이 결정되었다.

그나마 내가 오랫동안 군부를 설득시킨 끝에 일단 500여 대만 양산하기로, 2호 전차의 양산이 시작되는 1935년 12월부턴 1호 전차의 양산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육군이 가장 큰 기대를 하던 3호 전차는 2호와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1935년 12월에 시제품이 나오긴 했는데, 3호 전차에 적용된 코일스프링 현가장치가 문제가 되어 주행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황한 병기국은 코일스프링 현가장치를 리프스프링 현가장치로 교체하고, 정식 명칭도 3호 전차 A형에서 B형으로 바꿔 두 번째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이놈도 주행을 시작하자마자 얼마 못 가 퍼져버리고 말았다.

“또 실패요?”

“죄송합니다, 총통 각하.”

“이제 문제점을 거의 다 파악했으니 다음번에는 잘될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술자들은 B형에서 각종 문제점을 수정한 C형을 만들었지만, 이 C형조차 문제가 많았다. 잔고장이 잦은 것은 물론, 출력을 올리자 엔진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그것도 공장에서 갓 출고된 따끈따끈한 신품이.

“이런 쓰레기에 병사들을 태워 전선으로 내보낼 생각이었소?”

“초, 총통 각하. 그게 아니오라······.”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시간과 예산을 주시면-”

“그 말이 벌써 세 번째인 건 아시오? 대체 기회를 몇 번이나 줘야 하오? 다음에도 같은 결과가 나오면, 그땐 어떡할 거요? 그동안 낭비한 예산이라도 다 토해낼 거요?”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기국을 몰아붙였고, 결국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3호 전차는 개발이 중단되었다. 이로써 3호 전차와 3호 돌격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일은 없어졌다.

3호가 나가리되었으니, 남은 4호뿐이었다. 4호 전차는 후대의 무장 강화를 고려하여 처음부터 내 지시로 중장갑으로 기획되었다.

“차체 전면부 장갑 수치는 80mm, 포탑 전면장갑은 50mm, 차체와 포탑 측후면은 30mm, 최고속력은 40km/h로 하고 전체적인 중량은 26t을 넘지 않게 하시오. 가능하겠소?”

“가능은 합니다만, 이 경우 기존 계획상의 수치와 달라져서 개발에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소. 빠른 시일 내에 결과물이 나온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시간이 다소 걸려도 좋으니 완벽한 물건을 만들어 내시오. 알겠소?”

“알겠습니다.”

나는 이참에 4호 전차뿐만 아니라 4호 전차의 차체를 활용한 파생형까지 기획했다.

일단은 자주포와 구난전차, 교량전차, 돌격전차, 대공전차까지 딱 5개만.

4호 전차의 파생형은 손으로 다 못 셀만큼 있었지만, 그 역할과 성능이 서로 중첩되는 경우가 많았다. 4호 돌격포라든지 4호 구축전차라든지 등등.

뷔페도 아니고 전시에 비슷한 성능의 무기체계가 많은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군수체계가 쓸데없이 복잡해질뿐더러, 생산성에도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전에 이를 차단해둘 필요가 있었다.

원래 역사의 독일이 다품종 소량 생산이었다면, 나는 소품종 대량 생산으로 바꿔놓을 생각이다.

3호 전차 개발로 내게 불호령을 들었던 터라 병기국 기술자들은 이번만큼은 최선을 다해 작업에 들어갔다.

게다가 본래라면 3호 전차 개발에 투입되었을 자본과 인력까지 모두 4호 전차 개발에 투입된 덕에, 개발 속도는 의외로 무척 빨랐다.

1937년 5월에 최초의 4호 전차 시제품이 나왔다. 시제품을 본 나는 만족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거야! 난 이걸 원했어!”

1941년에야 등장할 4호 전차 F1형이 내 눈앞에 있었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병기국 장성들과 기술자들은 내가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안도했다.

누가 보면 죽다 살아난 줄 알겠네. 안 죽여, 이것들아.

“그동안 고생 많으셨소. 보아하니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군. 정말 큰일했소.”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손수건을 꺼내는 기술자들에게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다가갔다.

“이제 여기에 주포만 더 크고 강한 놈으로 바꾸면 딱이겠군.”

“자, 잘 못 들었습니다······?”

기술자들의 얼굴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핏기가 가셨다.

왜 그렇게 놀라? 난 당연한 소리를 한 것뿐인데.

공돌이는 굴려야 제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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