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검의 밤 (1)
“······따라서 법안이 통과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총리 임명 직후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전에 포섭된 중앙당과 국가인민당의 적극적인 협조로 수권법은 큰 차질 없이 통과되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위법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법안이 가결된 이상 그들의 항의는 부질없는 발악에 불과했다.
수권법이 통과된 후, 공산당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사민당도 해산되었다.
하지만 중앙당과 국가인민당, 이외에도 바이에른 인민당이라던가 국가당, 농민당 같은 군소정당들은 남겨놨다.
눈 가리고 아웅인 격이긴 하지만, 적어도 야당이라고 불릴만한 존재들을 남겨놓음으로써 우리가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 체제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외국에 보여줄 필요성이 있어서였다.
“역사대로라면 다 해산되었을 텐데, 이 정도로 그친 것을 감지덕지해야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각하?”
“아무것도 아닐세. 잠시 피곤해서 혼잣말이 나온 모양이야. 신경쓸 거 없어.”
내 정신 좀 봐라. 또 혼잣말이 새어 나왔군. 아직도 이전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다니, 나 원 참.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총리 각하의 건강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 의사의 진찰을 한 번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급조한 거짓말인데, 괴링, 괴벨스, 힘러 이놈들은 내가 진짜로 피곤한 줄 알고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부담스러워 죽겠군 정말. 무슨 말을 못하겠어. 이러다 코피라도 나면 아주 졸도하겠구만.
“됐네, 됐어.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챙길테니, 하던 얘기나 마져 하자고.”
우리는 지금 룀과 돌격대의 처분을 놓고 회의 중이었다.
룀이 집권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갈수록 기고만장해지는 룀의 태도와 커져도 너무 커져 버린 300만의 돌격대는 이제 나치당 최대의 골칫덩이로 자리 잡고 말았다.
“당장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각하께서 그들과 담판을 지으신 덕분에 군부가 우리에게 협조할 뜻을 밝혔지만, 룀이 훼방을 놓는 바람에 모두 어그러지게 생겼습니다.”
괴링은 생각만으로도 빡친다는 듯 연신 성을 내며 말했다.
괴링과 사이가 좋지 않은 괴벨스까지 그 말에 적극 공감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걸로 봐선, 룀을 싫어도 정말 싫어하는 듯했다.
딱히 사교성이 좋지도, 예의가 바른 것도, 겸손하지도 않았던 룀은 그 성격 때문에 많은 적을 만들어냈다.
군부는 물론이고, 당장 당 내부에서조차 룀과 친한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이니 말 다 했지.
그나마 사이가 괜찮은 이가 나치당 초창기 시절부터 안면이 있던 헤스 정도인데, 헤스 조차 최근 룀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는지 괴링의 비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힘러, 각하께 보고하게.”
괴링의 다음 차례는 힘러였다.
“이 자료들은 제가 군부와 돌격대 내부에 심어둔 스파이들을 통해 얻어낸 정보들입니다.”
힘러가 내놓은 서류 안에는 룀과 돌격대의 동향,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군부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룀의 행동이 갈수록 도를 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회의에선 각하에 대한 무례한 언사와 정책에 대한 비판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돌격대 간부들이 룀의 말에 동조했고요. 간부들 중에 오직 빅토르 루체만이 이 사실을 전해줬습니다.”
빅토르 루체. 실제 역사에서도 룀의 행동을 히틀러에게 전해 신임을 얻었고, 룀이 제거된 후에는 돌격대 참모장이 되었다.
이후 돌격대를 제대로 된 군사 조직으로 뜯어고치다가 1943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군부뿐만이 아니라 경찰 내부에서도 돌격대에 불만이 많다고 합니다. 심지어 경찰 업무를 대신하겠다며 다짜고짜 행정 권한을 넘기라고도 요구했다더군요.”
힘러의 발언이 끝난 뒤에는 하이드리히의 차례였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프라하의 도살자이자 금발의 짐승.
1942년 체코에서 암살당하기 전까지 수많은 작전을 지휘, 성공시킨 나치 독일의 브레인이라 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하이드리히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자신이 직접 정리한 파일을 꺼내 하나하나씩 설명했다.
“먼저, 룀이 그동안 받은 뇌물 목록입니다.”
“많이도 처먹었군. 돼지 같은 새끼.”
괴링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가 말하기엔 좀··· 지금은 돼지가 아니니까 상관없으려나?
하이드리히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룀이 받은 뇌물 목록부터 그에게 청탁을 한 자들, 룀의 끄나풀들과 그와 은밀하게 연락 중인 사회주의자 성향의 당원들까지.
생각 이상으로 방대한 규모에 나는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룀의 처형. 불온한 싹은 미리 잘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룀을 처형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되어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각하. 룀을 죽여야 합니다.”
“흠······.”
본래 역사에서도 히틀러는 룀을 숙청해야 한다곤 판단했지만, 지난 세월의 정 때문인지 그를 죽이는 것을 상당히 망설였다.
괴링과 힘러, 괴벨스가 줄기차게 룀의 처형을 주장하자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죽이지 않고 살려서 유폐하면 어떻겠냐고 말했을 정도로 룀의 처분을 주저했다.
지난 회귀에선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맥주홀 폭동 때 내 옆에서 행진하다가 총탄에 맞고 즉사했으니까. 룀이 죽고 난 뒤엔 헤스가 대신 돌격대를 맡았고.
미래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룀은 그때 죽었어야 했다. 적어도 자신이 믿던 동지들의 손에 죽었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들의 말대로 룀을 죽여서 후환을 미리 제거하는 게 옳다.
나 또한 이번 회귀를 성공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생각이다.
내겐 아주 쉬운 일이다.
여기서 ‘그래’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나머지는 밑에서 알아서 해줄 것이다.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십수 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지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망설여졌다.
심지어 나는 진짜 히틀러가 아닌, 21세기에 살던 평범한 한국인인데도 말이다. 이래서 정이 무섭다는 건가.
“각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괴링이 재촉하듯 말했다. 힘러도, 괴벨스도, 하이드리히와 헤스도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입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말 한마디가 나오길 바라면서.
“······룀은.”
“예.”
“참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낸 동지였지.”
“그, 그렇습니다······.”
내 대답이 생각 외의 답변이었는지 괴링은 당황했다. 보다 못한 힘러가 나섰다.
“각하. 각하께서 그자와 친분이 깊다는 사실은 압니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대의를 위해선 희생이 필요한 법입니다.”
“SS 제국지도자의 말이 맞습니다. 룀을 과거의 정 때문에 살려두신다면, 분명 후환이 될 것입니다.”
괴벨스도 나서서 힘러를 지원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그래야지······.”
“각하?”
“룀을 처단하게.”
이제야 원하던 대답을 받아낸 괴링의 얼굴이 밝아졌다. 괴벨스와 힘러, 하이드리히도 만족한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각하.”
“그렇습니다. 오늘의 결단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겁니다.”
“각하께서 독일을 구하신 겁니다.”
아 쫌.
***
나는 룀의 처단 계획을 힌덴부르크에게 먼저 알렸다.
역사에선 힌덴부르크가 먼저 히틀러에게 룀과 돌격대를 처단하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식으로 압박했고, 국방장관인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를 통해 룀을 처단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우선 나에 대한 힌덴부르크의 신임이 높은 데다가, 그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내가 알렸으니까.
예상대로, 힌덴부르크는 내 말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그래, 잘 생각했네. 그런 깡패새끼는 죽어야지, 암.”
힌덴부르크는 흡족한 듯 바움쿠헨(도넛과 비슷하게 생긴 독일의 전통 디저트)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여윽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뽑았어. 안 그래도 룀과 그놈의 패거리가 저지르는 짓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자네도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룀이 개자식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구만. 훌륭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 특히 그놈은 호모라며? 나이도 먹을 만큼 처먹은 놈이, 그것도 국가의 녹을 먹는 군인이었다는 놈이 호모라니! 비곗살을 축 늘어뜨린 역겨운 몸뚱아리로 같은 남자랑 살을 부대낄 것을 생각하면 밥맛이 뚝 떨어질 지경이야.”
저, 밥맛이 떨어지신 치곤 생각보다 잘 드시는 것 같습니다만.
힌덴부르크가 프레첼을 한 움큼 집어 우적우적 씹어먹는 동안, 나는 룀의 처단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듣는 내내 힌덴부르크는 만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네라면 다 알아서 처리하겠지. 내 자네만 믿고 있겠네.”
“감사합니다.”
힌덴부르크에 이어 블롬베르크에게도 룀의 숙청에 대해 설명했다. 역시나 블롬베르크도 적극 찬성했다.
“아주 옳으신 판단입니다, 총리 각하. 그렇잖아도 요즘 그자와 그자의 패거리들이 점점 도를 넘고 있어서 이를 각하께 알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먼저 결단을 내려주시니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괴링과 힘러, 괴벨스만큼은 아니지만 이 인간도 뼛속까지 히틀러 빠돌이였던 만큼 아부하는 실력도 남다르다. 벌써부터 피곤해지려고 하네.
아무튼 블롬베르크는 필요하다면 군 병력도 차출해서 내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룀,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만나는 사람마다 다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거냐.
***
군부는 물론, 심지어 자신과 오랫동안 뜻을 함께해 온 동지들마저 자신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룀은 오늘도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회의에 참석했다.
이미 돌격대 상층부는 룀의 지시만 따르는 최측근들로 채워진 지 오래.
말이 회의지 실상은 룀이 말하면 호응하기 바쁜 팬미팅 수준에 불과했다.
“히틀러에게 아주 실망이 커.”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회의장에 나타난 룀은 히틀러에 대한 비판의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나는 히틀러가 나와 진정으로 뜻이 맞는 동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야.”
룀은 히틀러에게 불만이 컸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면, 룀은 틀림없이 히틀러가 오랜 동지인 자신을 위해 어떤 요구든지 관철시키리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룀의 요구는 상상 이상으로 막 나가는 것이었다.
경찰의 업무와 권한을 돌격대에게 넘기고, 나아가 군을 해체하여 돌격대에 흡수시킨 뒤 돌격대를 인민군으로 재편하자는 그의 주장은 군부와 대립관계에 있는 나치당 간부들조차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오직 룀과 그의 측근들만이, 자신들의 요구가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겨우 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틀을 잡았는데, 녀석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어! 결국엔 히틀러도 자기 잇속만 채울 생각밖에 하지 않는 융커, 자본가 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거야.”
“맞습니다!”
“히틀러 총리는 혁명을 이끌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부하들의 열렬한 환호를 들을 때마다 룀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이미 그들은 위험수위를 넘어도 한참 넘어버린 발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었다.
“계속 히틀러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우리대로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네. 이미 우리에겐 300만 명이 넘는, 충성스러운 돌격대원들이 있네. 이들 모두에게 총 한 자루씩만 쥐여줘도,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군과 경찰 정도는 가뿐하게 해치울 수 있어!”
맥주홀 폭동 때, 수백 명 밖에 되지 않던 돌격대는 군의 진압이 시작되자마자 일방적으로 털리기 바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꾸준히 몸집을 불려온 돌격대는 어느새 300만이 넘는 대원들을 자랑하는 독일 최대의 무력 집단으로 탈바꿈했다.
훈련 수준과 무장은 까놓고 말해 그다지 눈여겨볼 만한 구석이 없지만, 300만이나 되는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기에 군부도 돌격대를 여태까지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각하, 그러면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룀은 오래전부터 부하들에게 각하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쩌기는. 히틀러와 담판을 지을 수밖에. 그래도 아직은 협상을 해볼 만한 여지가 조금은 남아있는 모양이더라고.
비록 타락하긴 했지만, 히틀러는 머리가 굳어서 뇌가 돌아가지 않는 융커들과 달리 최소한 생각은 하고 지내는 친구니까.”
“만약 그가 끝까지 각하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때는 돌격대를 동원해 히틀러를 압박할 생각이네. 나도 그런 일은 바라지 않아. 그래도 한때 뜻을 함께하고 감방까지 갔던 동료 아닌가. 히틀러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래야지.”
룀이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주변에서 그의 말을 경청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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