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거대한 바위 밑에 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손발을 움직여봤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입을 벌리자 흙이 입안으로 침투했다. 온몸을 덮친 흙 때문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버둥 쳤지만, 버둥거릴수록 몸에 가해지는 압력만 커졌다.
1분도 되지 않아 폐가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이거 틀렸네.
본능적으로 죽음을 직감하자, 몸에 힘이 쭈욱 빠지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끝이구나.
모든 것을 체념하고 눈을 감으려는 순간, 누군가의 거친 손길이 흙더미를 뚫고 들어와 내 뒷덜미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뒤로 잡아당겼다.
“프하악!!!”
눈을 뜨자,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험상궂은 외모의 거한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적··· 은 아니고, 그렇다고 저승사자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군복을 입고 있네?
“이봐, 형씨. 정신이 좀 드나? 하마터면 죽을뻔했다고.”
그는 산적 두목도, 저승사자도 아니었다.
아군이었다.
거한의 뒤로 아군 병사들이 대피호였던 곳에서 파묻힌 병사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진짜 죽다 살았네.
아직 운이 따라주는 것인지, 아니면 죽을 때가 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남았다. 일단은.
하지만 안심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다.
“비상! 비사앙!”
“토미들이 온다!”
포격이 끝나기 무섭게 영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모두 전투 준비!”
포격이 끝나자마자 영국군은 무인지대를 넘어 공격을 개시했다.
포탄 구덩이와 썩어 문드러진 시체, 들쥐, 구정물, 철조망과 말뚝으로 가득한 무인지대를 적이 통과하는 사이, 아군은 서둘러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빨리 안 뛰냐, 이 새끼들아!”
“다 뒈지고 싶어?!”
병사들은 포격이 남기고 간 후유증에서 회복하기도 전에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내지르는 고함과 욕설을 들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물론 나도.
“씨발! 씨발! 씨발!”
난데없이 히틀러에 빙의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제는 싸우기까지 해야 한다.
단순한 주먹다짐이 아닌, 총알이 날아다니고 죽을 수도 있는 싸움을.
닭고기만 욕심내지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빌어먹을. 후회가 막심했다.
실제 전장은 군대에서 자주 해봤던 모의전투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긴박감이 넘쳐흘렀다.
“기관총 준비!”
“내가 명령하기 전까지 쏘지 마라!”
영국군은 어느새 무인지대를 절반 이상 통과하여, 아군 참호까지 600m가량 남겨두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적들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미친듯이 뛰면서 식은땀이 났다.
1차대전의 참호전을 다룬 영화라면 많이 봤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파스샹달>, <영광의 길>, <인게이지먼트>, <워 호스>, <1917> 등등.
하지만 스크린을 통해서 본 것과 실제 전장에서 두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적어도 스크린으로 볼 때는 죽을 일이 없지만, 여기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사격 개시!”
“쏴라!”
사격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연이어 울리자 적의 선두가 무너지는 광경이 시야에 잡혔다.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MG08 중기관총이 미친 듯이 불을 뿜자, 영국군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적들은 비명을 거의 지르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군.
나도 남들처럼 열심히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게베어 1898 소총은 일일이 노리쇠를 움직여 탄피를 빼줘야 했기에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사실 이 시기의 모든 소총들이 다 그랬지만.
“죽겠네, 진짜.”
정신없이 쏘다 보니 어느새 장전된 총알을 다 써버렸다.
새 탄 클립을 주머니에서 꺼내는데, 총알 한 발이 쉭 소리를 내며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억!”
너무 놀라는 바람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겨우 몇 cm 차이로 삶과 죽음을 오갔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이봐, 자네! 총에 맞았나?”
어느 하사가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보며 소리쳤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얼른 일어서서 싸워! 지금 적들이-”
눈먼 총알이 날아와 관자놀이를 관통하자, 하사는 수명이 다한 기계처럼 뒤로 벌렁 넘어졌다.
굴곡진 바닥에는 어느새 피가 고여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젠장.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겨우 몇 분 지났다고 또 죽게 생겼네.
“아악! 아아아악!”
“위생병!”
“이런, 프란츠!”
“도와줘!”
총탄을 맞고 부상당한 병사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애타게 위생병을 찾는 절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더욱 끔찍한 소리는 따로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설마?”
“씨발! 전차다!”
“전차가 나타났다!”
기괴한 엔진음에 쇠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전차의 출현을 알리는 병사들의 새된 비명이 참호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젖 먹던 힘을 짜내 몸을 일으켜 세우자, 무인지대를 건너오는 거대한 괴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차.
지상전의 꽃이자 보병들의 저승사자.
내가 기억하는 Mk IV와 동일한 형태의 전차가 보병들을 잔뜩 거느린 채 이쪽으로 굴러오고 있었다.
전차가 처음 전장에 등장했을 때, 독일군은 전차를 격파할 줄 몰라 전전긍긍했다고 들었다.
허나, 전차가 등장한 지 2년이 지난 1918년에는 얘기가 달랐다.
처음 전차에 당황한 독일군은 이 전차라는 놈이 의외로 방어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상대할 무기들을 재빨리 개발해냈다.
“온다, 조준해!”
전차가 나타나자, 아군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언뜻 보기에도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일반적인 소총을 확대해놓은 듯한 모습의 탕크게베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오직 전차만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놈이라 그런지 더럽게 크다.
무식한 크기만큼 무게도 제법 나가는 놈이지만, 대신 성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발사!”
일반 소총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우렁찬 굉음을 일으키며 불을 뿜은 탕크게베어는 Mk IV의 전면을 명중시켰다.
“명중!”
“맞았다!”
탕크게베어의 큼직한 13.2mm 총탄을 연거푸 얻어맞은 전차는 곧 정지했다.
조종수가 당했거나, 엔진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굴러가지 않게 된 것이리라.
하지만 영국군의 전차는 한 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첫 번째 전차를 해치우기 무섭게 뒤에서 2대의 전차가 추가로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야, 지금 뭐하는 거야!”
두 번째 전차가 앞서 격파당한 전차를 앞지를 때까지 탕크게베어 사수가 총을 쏘지 않자, 당황한 장교가 소리쳐 물었다.
“전차가 오잖아! 왜 안 쏴?”
“총이 고장 났습니다! 탄피가 눌어붙어서 빠지지 않아요!”
돌겠네, 진짜.
믿었던 비장의 무기가 어이없이 리타이어하자 이제 남은 수단은 하나뿐이었다.
“자, 모두 하나씩 들게.”
“어, 저도 말입니까······?”
“그래. 저 괴물을 잡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전차들이 다가오자, 집속수류탄이 분배되었다.
얼떨결에 집속수류탄 중 하나를 떠맡게 된 나는 졸지에 전차를 상대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빌어먹을.
“모두 대기! 온다!”
“명심해라. 반드시, 반드시 한 번에 잡아야 한다.”
알겠으니까 그만 말 거쇼. 지금 심장 터지기 일보 직전이거든.
나처럼 재수 없이 걸린 병사 둘은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게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인지, 아니면 죽은 송장인지 의심스럽다.
어느새 참호 코앞까지 전차가 다가왔다. 군대에서 숱하게 들었던 무한궤도 소리가, 이렇게나 끔찍한 줄은 몰랐는데.
“지금이다, 던져!”
장교의 구령에 맞춰 우리 셋은 거의 동시에 집속수류탄을 던졌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던진 수류탄은 기가 막히게도 전차의 바로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폭발.
“잡았다!”
집속수류탄에 상부를 직격당한 전차는 불기둥을 내뿜으며 불타올랐다.
몸에 불이 붙은 전차병들이 괴성을 지르며 전차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던 아군 병사들이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다.
하지만,
“뭐야, 저놈 아직 살아있잖아?!”
다른 두 명이 던진 수류탄 중 한 발은 은 전차에서 떨어진 곳에서 터졌고, 다른 한 발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폭발하지 않았다.
덕분에 영국군에겐 아직 한 대의 전차가 남아있었다.
놈은 기관총을 발사해 수류탄을 던진 두 병사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강철 바퀴로 참호를 짓밟으려 했다.
이대로 가다간 끝장이었다. 저 괴물의 돌파를 허용하는 순간 놈은 우측에 달린 기관총으로 참호를 헤집을 것이고, 우린 꼼짝없이 벌집이 될 터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터지지 않은 집속수류탄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전차도 엔진에 이상이 생겼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놈을 잡으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서둘러 집속수류탄을 향해 뛰어갔다.
“이봐, 뭐 하는 거야?”
“위험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주워서 전차에 다가갔다.
수류탄이 터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핀도 뽑지 않고 그냥 던졌으니까. 이러니 안 터지지.
수류탄 핀을 뽑은 뒤, 전차 위로 던졌다.
그런 다음 서둘러 바닥에 머리를 감싸 안고 엎드렸다.
우렁찬 굉음이 울리고, 자잘한 파편과 부품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 환하게 불타고 있는 전차를 볼 수 있었다.
탄성을 지르려는 찰나, 우측에서 괴성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착검한 소총을 휘두르며 나를 향해 뛰어오는 영국군이 있었다.
빛을 반사해 번쩍거리는 대검의 날을 본 나는 다급히 소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엄지손가락만한 쇳조각이 총몸에 박혀 있었다.
“이런 씹···.”
그 사이, 내게 다가온 적병이 함성을 내지르며 총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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