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명가 길드 (1)
“안녕하십니까? 흑사자의 곽형석입니다.”
“곽형수입니다. 드디어 뵙네요. 뒤처리를 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곽형석과 곽형수가 나란히 강후에게 악수를 청하기 위해 왔다.
스캔한 성좌에 따른 정보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두 사람의 레벨 수준은 450 안팎으로 보인다.
강후가 그들의 수준을 ‘추측’할 수밖에 없는 것은 원작에서 그들의 비중이 거의 없어서였다.
스치듯 지나가는 서술로 나오게 된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상세한 정보까지 언급될 일이 없었다.
결국 강후 입장에서는 ‘무의식’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야 수치화된 것이다.
객관적인 수준으로 보면 이클립스의 리더인 강동현에 비해선 떨어지나, 그래도 상당한 실력자다.
‘원작은 항상 서울에 있는 정화 길드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는 했지. 그래서 서울 밖의 이야기가 조명받을 기회가 적었어.’
원작의 장시환과는 대척점에 있는 삶을 살았던 신강후.
그렇기에 강후의 주변 구성 요소들은 전부 서울 밖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즉, 앞으로 흑사자처럼 원작에서는 비중이 낮았으나, 지금의 강후에게는 체감 중요성이 높은 존재를 계속 마주하게 될 터였다.
그 과정에서 무의식이 만들어 준 영역이 구체화될 것이다.
그들의 능력이나 성좌, 그리고 숨겨진 비밀이나 비하인드 스토리와 같은 것들이 말이다.
“반갑습니다. 신강후입니다. 흑사자 분들이시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사자왕. 흑사왕.”
“하하하! 그 이름을 불러 주시니 참 기분이 좋네요.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수식어입니다만.”
강후가 슬쩍 두 사람을 띄워주자, 기분이 좋아진 곽형석과 곽형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길게 보면, 흑사자와는 결국 반목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강후는 생각했다.
일단 그들의 후견 세력이 강후와는 사이가 영 좋지 않은 러시아의 까쉬마르 길드인 데다가.
잠재적 우군으로 보고 있는 이예린을 위협할 세력이 흑사자라서다.
오히려 기회가 된다면, 미리 싹을 잘라둬야 할 세력이기도 하다.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는 셈.
하지만 그렇기에, 더 그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강후였다.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부드러운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후가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많은 의미가 담긴 깍듯한 예의였다.
놈들에게 무딘 면을 많이 보여 줄수록, 그리고 호의가 오갈수록 나중에 뒤통수를 치기도 수월해질 테니까.
지금은 전략적으로 협력한 관계지만, 동행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다.
단지 섞인 척할 뿐이다.
* * *
그 무렵.
장시환은 전투 중에 손목에 입은 상처를 치료할 겸, 잠시 서울로 돌아와 있었다.
어차피 전장의 지휘는 채관형이 맡고 있고, 채관형은 장시환이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부하였다.
“괜찮으십니까? 이렇게 집중 치료를 받으시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마석과 연동된 치료 장치에 손목을 올린 장시환의 모습에 한 남자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공유석이었다.
채관형은 싫어해도 장시환은 진심으로 존경하는 그는 장시환의 부상을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아, 이거 말이에요? 괜찮아요. 적호대 놈들이 좀 집요해야 말이죠. 제가 방심했어요.”
“적호대의 집요함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군요. 헌터 하나의 목숨을 내주면서까지 마스터를 노리려고 할 줄은.”
“이현석이 영리한 거죠. 그리고 심연의 헌터들은 대장을 위해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돼 있고요.”
“저에게도 지시만 내려주시면, 당장 동두천 전선으로 가서 마스터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아뇨. 무리할 필요 없어요. 장기전은 우리가 유리해요. 약품이나 약제 보급, 그리고 전력 충원의 모든 측면에서요.”
장시환이 앞에 놓인 잔에 담겨있던 커피를 들이켜며, 공유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보고할 것이 있어 그를 막 찾아온 차였기 때문이다. 잠시 본론 이탈이 있었던 셈이다.
장시환의 눈빛의 뜻을 읽은 공유석이 곧바로 가져온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영상 하나가 정지 상태로 있었는데, 장시환에게는 매우 흥미로울 영상이었다.
“뭐죠?”
“마스터께서 어젯밤부터 쭉 휴식을 취하셨던 탓에 보고가 늦었습니다. 청명 수용소에서 전투가 발생했습니다.”
“이클립스의 작업장 말이죠?”
장시환의 눈빛이 붉게 빛났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슈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진 못해도, 주요 정보는 전부 다 꿰뚫고 있는 그였다.
“예, 맞습니다.”
“결과는요?”
“청명 수용소장 조환성이 죽었고, 수용소와 마석 광산이 연합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연합 얘기는 처음 듣는데……. 보나마나 청안 용병단과 흑사자는 낄 것 같고. 여기에 전세혁까지 추가인가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 영상에 보이는 헌터는 연합 어디에도 속한 헌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신강후잖아요?”
혀끝으로 입술을 핥는 장시환의 모습에서 짙은 호기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후가 셋 중 어느 세력에 속했다고 보기에는 행보의 앞뒤가 안 맞는다.
장시환은 강후의 단독 행동을 확신했다. 그런데 왜 공유석은 강후의 영상을 가져온 걸까?
오히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한 쪽은 이클립스와 악연이 깊은 전세혁일 텐데.
“제가 영상을 가져온 이유는 바로 신강후가 홀로 수용소에 침투해서 소장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에?”
“그뿐만 아니라, 중간에 지원군의 합류까지 막으면서 제대로 허를 찌른 모양입니다.”
“홀로 침투를 했다? 수용소 밖에서 안으로, 그것도 내부자 도움 없이 했다는 얘기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허허. 좀…… 미쳤는데요?”
장시환이 미쳤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만큼 믿기 어렵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강후가 어떤 방식으로 침투했는지,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영상을 보시죠. 흥미를 가질 만한 스킬이 몇 개 보이실 겁니다.”
장시환이 영상을 틀자, 강후가 간수들을 상대로 일대 다수의 전투를 치르는 모습이 보였다.
촬영 각도나 주변 모습으로 봐서는 간수 중의 한 명이 촬영한 것이 분명했다.
비가 오는 중에 찍은 터라 화질이 좋지 않아, 디테일한 상황 파악까지는 어려웠지만.
장시환은 그중 유독 특이한 스킬 하나만큼은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무결의 벽……인가?’
일전에 히든 스킬 알람을 통해, 범용성의 히든 스킬인 무결의 벽의 존재를 인지한 장시환이었다.
그도 히든 스킬이 있기에, 히든 스킬 보유자에게만 전달되는 알림 메시지가 왔던 것이다.
장시환이 강후가 보인 방어 스킬의 구현 형태를 무결의 벽이라고 확신한 이유가 있었다.
암살자에게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방어 스킬인 것은 물론, 효율이 지나치게 좋아서다.
그렇잖은가?
수십 명의 거너들이 총구를 겨누고 조준 사격을 했음에도, 모든 마탄이 벽에 막혔다.
일반적인 암살자는 절대로 가질 수 없으며, 가진다고 해도 저 정도의 효율을 낼 수가 없었다.
영상 속에서 강후는 방어 스킬 하나로 거너의 마탄 공격을 전부 무력화했다.
그 대가로 거너들이 받은 것은, 강후의 공격에 쉴 새 없이 유린당하는 죽음이었다.
‘앞서 암살자용 히든 스킬을 획득했을 것이라는 의심도 받는 마당에 신강후가 무결의 벽까지 얻었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져.’
공유석에게 눈빛이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숙인, 장시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묘한 감정이 장시환의 내면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강후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그의 존재를 위협으로 느끼는 모종의 두려움이 뒤섞인 것이다.
쉽게 느끼기 힘든 감정이었다.
* * *
청명 수용소에서의 일을 마무리한 강후는 바로 유리 랜드로 돌아가는 방향을 잡았다.
바깥일은 일단 다 봤다.
부산에서 인페르누스를 손에 넣었고, 청명 수용소의 주인을 바꾸는 데도 성공했으니까.
돌아가 천살노수와 훈련에 다시 전념하다가 타카시를 만날 날짜에 일본으로 출국할 생각이었다.
돌아가기 전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박동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가 가까이 있거나 하면, 이왕 나온 김에 박동재도 만나고, 명가 길드와도 만나볼까 해서였다.
짧게 대화를 나누는 수준이면, 서너 시간으로도 차고 넘칠 테니 말이다.
강후가 전화를 걸기 무섭게, 박동재가 바로 연락을 받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 형!
“어, 동재야.”
- 청명 수용소 소식 들었어! 세혁이 형한테 들었는데, 진짜 믿기지가 않던데?
“소문 한번 빠르군.”
- 세혁이 형이 나한테까지도 보안 유지를 한 탓에 이제 알았어! 뭐, 현명한 거지만 좀 섭섭하지?
“그렇게 됐다.”
- 역시 강후 형…… 정말 멋져.
“동재야.”
- 응?
“조만간 해외로 나갈 일정이 있어서 말이야. 시간 난 김에 명가 길드 분들을 한번 뵙고 싶은데. 지금 만나자고 하면, 너무 갑작스러울까?”
- 와, 나 소름 돋았어.
“왜?”
- 지금 명가 길드 분들과 만나고 있거든. 심지어 청명 수용소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고.
“그래?”
- 어! 30분이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일걸? 형, 청명 수용소 쪽에서 막 나온 거 맞지?
“응, 맞아.”
- 바로 만나자, 형! 마스터가 두손 두발 들어 환영하신대! 어서 와달라는데?
“그럼 주소만 찍어줘. 내가 그쪽으로 택시를 타든 뭘 하든 해서 갈 테니.”
- 알았어. 바로 보낼게!
갑작스럽게 얘기가 진행되긴 했지만, 타이밍이 잘 맞아서 단번에 만남이 성사됐다.
명가 길드와는 앞으로 더 가까워진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득 될 요소가 많다.
해영 길드에 관련된 위험을 미리 고지한 덕분에, 앞으로 위기에 빠질 염려도 거의 사라졌다.
게다가 이 일로 명가 길드는 자신에 대해서 깊은 부채 의식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서 우열을 논하는 것이 유쾌하진 않지만.
어쨌든 힘의 논리에서는 강후가 명가 길드에게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도 맞았다.
명가 길드의 마스터인 장선영은 남에게는 빚지고 못 사는 성격.
군벌 심연의 대장인 이현석과도 결이 비슷한 과라, 강후가 여러모로 컨트롤하기 쉬운 성격에 속하기도 했다.
‘확실히 활동폭이 넓어지는 느낌이네. 아주 좋아. 정화 길드의 영향권 밖에서 내 영역이 확실하게 확보되는 거라면.’
처음부터 원했던 그림이다.
정화 길드와 우호 세력 그리고 이클립스를 제외한, 다른 핵심 세력과 연줄을 만들어 두는 것.
오래전부터 시간과 노력을 준비해 온 밑그림에 이제 막 선명하게 색이 입혀지는 중이었다.
그때.
“그나저나 타카시 일로 일본에 가면, 이참에 이 문제까지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강후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시선을 성좌창으로 돌렸다.
성좌 ‘전장의 천사’의 세 번째 특전과 삼자 택일의 보상에 대한 생각이 불현듯이 떠오른 탓이다.
신성력 증가.
신성 스킬 대여.
절대 광휘 획득.
어떤 것을 선택해도 이득일 수밖에 없는 보상을 마침 일본에 가는 김에 얻어볼까 싶었던 것이다.
무시하고 그냥 돌아오기에는 너무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