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해방 (3)
* * *
이내 수용소 상황은 정리 수순으로 들어갔다.
간수의 일부는 도망쳤고, 일부는 전투 중에 죽었으며, 나머지는 전부 항복했기 때문이다.
내부자 배신으로 인한 방어 시설 무력화, 그리고 소장 조환성의 조기 사망 이슈가 터졌을 때.
일찌감치 대다수의 간수가 미래를 예측했었다. 청명 수용소가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그래서 정문 방어선이 너무 쉽게 뚫린 것을 본 간수들은 미련 없이 손을 들고 항복했다.
그 과정에서 악감정이 잔뜩 쌓여 있던 흑사자의 헌터들이 항복한 간수를 죽이는, 웃지 못할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상황은 신속하게 정리가 됐고, 청명 수용소와 광산은 청안 용병단과 흑사자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그림이 됐다.
이를 위해서 사전 조율 과정이 있었고, 상설 관리 기구까지 발족한 만큼.
적어도 당분간은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전세혁 무리가 중간의 중재 역할을 담당하기로도 했고.
동시에 필수 경비 인력을 남기고, 방어 시설의 정상화를 확인한 다음.
청안 용병단과 흑사자는 주요 전력을 대전으로 철수시켰다.
이클립스가 역으로 대전의 본진을 노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클립스의 청주 해방구 접수도 막 끝난 차였다.
끝까지 싸우던 블랙의 잔당들은 결국 모조리 죽었다.
들린 소문에 따르면 중간에 항복한 블랙의 헌터도 있었지만, 강동현이 전부 죽이라 지시했단다.
아마도 연합에 허를 찔려, 손쓸 틈도 없이 청명 수용소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분풀이였겠지.
이클립스 입장에선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하필이면 또 경쟁자들에게 빼앗긴 셈이 아닌가.
화가 안 난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강동현은 적대 세력에게 딱히 자비를 베푸는 통 큰 사람은 아니었다.
통이 큰 척은 종종 하지만, 결국은 옹졸하게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복수하는 그런 케이스였다.
정리 과정에서 강후는 관련자들을 만나 차례대로 인사를 나눴다.
구면인 이예린이나 전세혁은 다시금 강후의 활약에 감사하며, 문서화한 계약 효력을 확인해 줬다.
다만 연합 일원인 흑사자의 간부들과는 인사를 나눌 수 없었는데, 자리에 없는 탓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도망치는 이클립스의 간수들을 추적 중이라고 했다.
이예린의 말에 따르면, 그들을 어떻게든 붙잡아 이클립스에게 몸값을 받아내겠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야기를 들은 강후도, 전한 이예린도 강동현의 몸값 지불에는 부정적이었다.
패잔병들에게 과연 돈을 쓸까?
보는 눈이 있으니 쓰려는 척은 하겠지만, 아마 형편없는 몸값을 흑사자에 제시할 것이다.
애초에 결렬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제시하고는, 끝까지 부하들을 구하려 했다고 하겠지.
그림이 너무 눈에 선해서, 강후와 이예린은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아는 만큼 보이는 모양이다.
인사를 마친 강후가 슬쩍 던전에 대해 운을 뗐다.
“어쨌든 저는 바람이나 쐴 겸, 던전 한 곳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괜찮으시죠?”
“물론이에요. 기록은 확실하게 남겨야 하니까, 여기에 들어갈 던전의 목록에 서명만 해 주시면.”
“그러죠.”
이예린이 내민 서류는 각 던전의 공식 명칭과 위치, 그리고 강후의 공략 기록이었다.
연합이 엮인 약속과 계약인 만큼, 더 주고 덜 줄 것도 없이 정석대로 하는 모습이었다.
강후도 차라리 그게 편했다.
괜히 이예린이 재량을 발휘한답시고, 한두 번 더 공략해도 된다고 했으면…….
그녀가 공과 사를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판단했을 것이다. 즉, 신뢰도가 하락했겠지.
스스슥.
강후가 서명을 하는 동안.
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전세혁이 말을 덧붙였다.
“강후 님 덕분에 이렇게 저희가 소장실 한가운데서 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됐네요.”
“저 역시 동의해요. 이클립스의 명치에 주먹 한 번 세게 꽂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소원 성취를 강후 씨를 통해서 했네요.”
이예린도 전세혁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속이 후련한 표정과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편-안’ 이랄까?
이내 서명을 마친 강후가 두 사람을 보면서 웃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진 것은 강후 역시 다른 의미로 후련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피로 얼룩졌던 과거를 다시 또 다른 피로 씻어낸 느낌!
표현은 다소 괴상할지 몰라도, 당사자로서 느낀 기분은 개운하고 시원했다.
탁!
이내 서명을 마친 강후가 소장실 창문 밖 너머의 어딘가를 지그시 가리키며 답했다.
“다음엔 더 큰 놈을 노려야죠.”
굳이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 분명 ‘더 큰 놈’은 아직 살아 있었다.
비틀린 악연을 끝맺으려면, 결국은 그놈이 죽어야 한다. 과정과 결론은 단순하다.
* * *
던전 공략의 시작.
일곱 개의 던전 중에서 가장 수준이 낮은 던전을 골라 들어왔기에 쉬운 공략의 연속이었다.
권장 레벨 기준이 100도 안 되는 곳이라서, 강후 입장에서는 몸풀기 수준밖에 안 됐던 것이다.
경험치 적인 측면에서는 도움이 될 것이 없을지 몰라도, ‘경험’ 측면에선 많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었다.
강후가 이 던전에서 제대로 실감한 것은 그간 착실히 올려온 항마, 맷집 스탯에 대한 결과였다.
이 던전의 주력 몬스터는 입에서 바늘처럼 만든 침을 뱉어대는 ‘바늘 다람쥐’.
그리고 독수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입에서 불을 내뿜을 줄 아는 ‘화염새’가 있었는데.
이놈들은 각각 물댐이라고 불리는 물리 공격, 마댐이라고 불리는 마법 공격에 특화된 몬스터였다.
한데 이들의 공격이 강후에게는 치명적인 한 방이 아닌, 솜방망이 같은 체감이 됐던 것이다.
바늘 다람쥐의 바늘은 몸을 직격해도 마치 고무공을 맞는 느낌에서 그쳤고.
화염새의 불은 강후의 몸에 그을음 정도와 약간의 온기를 느끼게 하는 선에서 끝났다.
정말 높게 쳐줘도 뜨거운 손난로를 피부에 비비고 있는 느낌 정도밖에 나지 않았다.
‘그래, 이게 스탯으로 압도하는 거지. 위를 바라볼수록, 앞으로 더 중요해질 숫자 놀음이고.’
상대적 강자로서의 우월함에 취해있기에는, 강후 역시 누군가에게는 상대적 약자일 수 있었다.
그래서 방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상대 평가다.
* * *
20분 후.
“크허…….”
거의 시작과 동시에 목숨을 잃은 미들 보스 몬스터, ‘붉은 가면’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니, 전투라고 할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푹, 윽, 털썩. 이게 전부였다. 말이 되나 싶지만, 말이 되어 버린 현장이 눈앞에 있다.
다만 붉은 가면에게 강탈한 스킬은 강후 입장에서는 이게 스킬일 수 있나 싶은 스킬이었다.
【Cross-dress】
【스킬 숙련도 : Lv. Max】
【마력을 활용해, 1분 동안 외형적으로 완벽하게 유지되는 여장을 전개합니다.
목소리는 변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얕은 접촉이나 비정상적인 마력의 흐름에도 여장 유지 상태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 참, 이런 스킬을…….”
강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스킬이 있으면 나중에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은 있다. 여차하면 얼마 전에 얻은 ‘창의’ 성좌를 활용한 스킬 합성도 된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사용처를 찾아서 써먹는 것이 효율이 좋을 것인데.
여장은 강후의 관심 밖이었다.
아니, 애초에 혐오했다.
그래서 예전에 허정태나 공태수 같은 놈들이 여장을 했을 때, 깊은 역겨움을 느꼈던 것이다.
“…….”
뭐라 평가하고 싶지도 않은 스킬. 일단 확실한 건, 성적인 용도로 쓸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
다만 전략적인 필요에 따라, 정말 부득이하게 여장이 필요하다면 써볼 수도 있을 듯했다.
아는 사람에게 들킨다면 흑역사가 만들어지겠지만, 누군가의 허를 찌르기에는 참 좋은 스킬이다.
이후 메인 보스 몬스터 공략도 신속하게 이뤄졌다.
애초에 강후의 수준에서 네다섯 단계는 낮은 던전이라, 막힘이랄 것이 없었다.
메인 보스 몬스터랍시고 등장한 ‘광염의 플로렌스’도 자신의 시그니처 스킬만 딱 한 번 쓰고는 강후에게 난자당해 죽었다.
이름도 제법 멋들어지게 지어져 있는 것 치고는 비참하고 형편 없는 최후였다.
【얕은 섬광】
【스킬 숙련도 : Lv. Max】
【짧게 반짝이는 섬광을 만들어내, 일시적인 실명 상태를 유발합니다.】
눈만 감고 있어도 전혀 먹히지 않는 스킬인 터라, 언제고 만능으로 쓸 수 있는 스킬은 아니었다.
다만 섬광탄처럼 갑작스럽게 변수를 만들어, 상대의 시각을 무력화하기에는 좋았다.
아주 유용한 스킬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활용 가치는 충분히 있는 스킬이었다.
‘아직도 이런 식으로 스킬을 추가할 수 있는 던전이 6개가 남았다는 거지? 총 12개군.’
어쨌든 스킬은 다다익선이다.
하찮은 스킬이라고 해도 확보해 둬서 나쁠 것은 없는 만큼, 강후는 그 기다림과 설렘이 좋았다.
여기가 가장 수준이 낮은 던전이었으니, 상위 던전에서는 좀 더 좋은 스킬을 강탈할 수 있겠지.
그때.
“음?”
강후가 죽은 플로렌스로부터 활성화된 아이템 보상을 확인하고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시간 지연이 있기는 했지만, 녀석에게서 꽤 괜찮은 아이템 하나가 보상으로 활성화된 것이다.
바로 신발 아이템이었다.
【스텔라 – 신발】
【등급 : 4등급】
【민첩 +100】
현재 강후가 착용하고 있는 신발 아이템은 민첩 스탯만 100 올려주는 단순한 녀석이었지만.
【질주 – 신발】
【등급 : 3등급】
【민첩 +150】
【근력 +50】
새로운 신발인 질주는 기존보다 민첩을 50 더 올려 주는 것은 물론 근력 보정까지 있었다.
중복 착용이 안 되는 신발 부위의 아이템인 만큼, 4등급인 것에 늘 아쉬움이 좀 남았었는데.
덕분에 아이템 등급도 한 단계 더 올린 셈이 됐다. 보조받는 스탯 구성도 좋다.
【신강후 Lv. 276】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 다재다능】
【근력 1447】【민첩 1494】
【체력 1115】【마력 31】
【항마 1060】【맷집 1000】
【* 암흑기 465】【* 신성력 125】
오랜만에 상태창을 본 강후가 마력을 제외하고는 고루 높은 스탯 구성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인 암살자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을 올라운더 형의 스탯 구성이다.
보통 항마나 맷집 구성에서 스탯이 크게 떨어지고, 체력과 근력도 둘 중에 하나는 낮으니까.
강후의 경우, 전략적으로 성장을 포기한 마력 스탯을 빼면 모든 스탯이 높았다.
같은 레벨대의 암살자를 데려오면, 최소한 세 분야의 스탯에서는 두 배에서 세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날 것이다.
흡족하게 스탯 확인을 마친 강후가 더 이상은 미련이 남지 않는 던전을 떠나 밖으로 나왔다.
앞서 이예린과 전세혁이 대화를 나누던 소장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혹시 두 사람이 여전히 자리에 있을까 싶었는데.
“음.”
예상대로 둘은 그대로 있는 가운데, 아까 없었던 두 사람이 새로이 합류해 있었다.
흑사자의 곽형수-곽형석 형제.
원작에서는 이클립스의 몰락 이후, 이예린과 피 터지게 싸우다가 몰락하는 세력의 주인들이었다.
정리하자면.
앞으로 이예린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그녀의 힘을 잔뜩 빼게 될 짐 덩어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