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해방 (2)
* * *
“형, 우리가 너무 신강후에 대해서 무심했던 것 같아.”
“사실 아무 기대도 안 했는데, 혼자서 이렇게 청명 수용소를 휘저어 놓을 줄은 몰랐네.”
남자 둘.
그들의 어깨에는 ‘우리가 이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슬로건이 적힌 견장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속에 덧대 입는 티셔츠에는 누가 봐도 흑사자인 것이 분명한 그림이 프린팅되어 있다.
두 사람의 정체는 바로 대전을 거점으로 둔 범죄 조직, ‘흑사자’의 대장과 부대장이었다.
대장의 이름은 곽형수, 부대장의 이름은 곽형석. 서로 형제이며 곽형수가 형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두 사람이라 서로 차별화를 하기 위해서 바꾼 게 바로 헤어스타일이었다.
형인 곽형수는 포마드펌에 말끔하게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스타일을 항상 고수했고.
동생 곽형석은 머리를 길게 길러서는 웨이브를 살짝 넣는 것으로 스타일링을 대신했다.
곽형수는 그런 동생의 헤어스타일을 ‘예수 머리’라고 부르며 놀렸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에 청안 용병단, 전세혁 무리와 힘을 합쳐 연합군을 구축한 흑사자.
청명 수용소 기습이 완벽하게 성공한 덕분에, 둘은 잔뜩 들뜬 상태였다.
마침 흑사자를 투자, 후원하는 러시아의 까쉬마르 길드에서 쓸만한 실적을 보이라는 압박이 있던 차였다.
한데 보란 듯이 성과를 낸 것이다. 흑사자는 마석 광산 순수익의 33%를 약속받았다.
분배 비율이 가장 높은 세력은 이번 일을 막후에서 조율하고 준비한, 이예린의 청안 용병단이었다. 47%를 약속받았다.
그리고 전세혁 무리가 총 16%였으며, 남은 4%는 온전히 강후 1인의 몫이었다.
홀로 수용소장 조환성을 암살하겠다는 강후의 말을 전세혁을 통해서 들었을 때만 해도, 코웃음을 쳤던 곽형수 형제였다.
일대일 전투는 둘째 치고, 청명 수용소 내부로 들키지 않고 침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비율에서 일부를 떼 내어 강후에게 4%를 보장하는 계약서를 쓸 때.
곽형석은 당연히 무산될 계약이라고 생각했다. 강후를 그저 꽃놀이패처럼 쓸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강후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청명 수용소 내부로 침투했고, 더 나아가 소장 조환성을 죽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지원군의 흐름까지 차단하면서 혼자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버렸다.
“흑사왕 체면이 말이 아니네.”
“그러게. 사자왕도 그렇고.”
“큭큭.”
“제길. 신강후 놈,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우리도 면밀히 검토해 봤지만, 숨겨진 침투 루트는 없었는데.”
흑사왕과 사자왕.
각각 곽형석과 곽형수를 일컫는 말이다.
3자가 들으면 낯뜨거운 수식어지만, 두 사람은 저 별명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흑사자의 모든 구성원은 두 사람을 반드시 각각의 별명으로 불러야 했다.
동생 곽형석이 말했다.
“신강후가 수용자 출신이잖아. 그러니까 내부 루트도 알고 있던 게 아닐까?”
“그게 말이 안 되지. 일개 수용자가 비밀 루트를 알면, 진즉에 거기로 탈출하지 않았겠냐?”
“하긴…… 그렇네.”
“우리도 얻기 힘든 고급 정보를 놈이 알고 있다는 거야.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거지.”
곽형수가 가늘게 눈을 떴다.
사실 강후에 대한 얘기는 까쉬마르 길드를 통해서도 제법 들은 바가 있었다.
들은 말에 따르면.
까쉬마르 길드가 뒤를 봐줄 테니, 강원도 쪽에 세력을 구축하라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거절 수준이 아니라, 협상에 나섰던 관리자 니키타 보로닌을 면전에서 면박을 줬다는 것이다.
강후는 니키타 보로닌에게 치욕을 선사하고도 목숨을 부지한, 몇 안 되는 케이스였다.
“신강후 덕분에 청명 수용소 공격이 잘 풀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이런 녀석을 욕심내볼 수는 없을까?”
곽형석이 슬쩍 운을 뗐다.
굳이 현장에서 어떻게 싸웠는지를 알아보려고 할 필요 자체가 없다. 이미 결과가 말하지 않는가?
“딱 봐도 이예린이랑 전세혁 쪽에 가까운 놈이야. 쉽게 포섭하기는 어려울 거다.”
“흠…….”
“일단은 이클립스부터 걷어내고 생각할 일이야. 대전을 우리가 싹 먹어야, 저런 놈에게 제대로 질러보기도 하는 거지.”
“하긴.”
“어쨌든 당분간 신강후를 예의주시하도록 해 봐. 이런 놈을 적으로 두면 골치 아파져. 지금 이클립스가 딱 그 꼴이잖아.”
곽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 곽형석의 말대로 강후와 같은 편이 될 수는 없을지언정, 적이 되는 일은 꼭 피해야 했다.
지금껏 많은 실력파 헌터를 보아 왔고, 그들의 성장과 결과를 지켜봐 온 그들이다.
경험과 직감이 동시에 말해 주고 있었다. 강후는 앞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그렇다면 잘 보이는 게 우선이다. 줄을 일단 닿아두면, 언제고 잡아 당겨볼 수는 있는 거니까.
* * *
“만세! 만세! 만세!”
“정말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드디어 해방이야! 해방이라고!”
강후가 18동 수용자들을 가두고 있던 몇 개의 철문들을 연달아 열자, 드디어 탈출이 시작됐다.
수용자들은 강후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고, 그중에는 만세 삼창을 부르는 수용자도 있었다.
강후에게 탈출과 안전까지 책임져달라는 말을 하는 몰지각한 수용자는 다행히 없었다.
수용자들은 정문 쪽으로 보이는 이클립스 외(外)의 세력을 향해서 본능적으로 뛰었다.
이클립스를 몰아낸 세력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맞는 선택이 됐다.
특히 이예린과 전세혁은 수용자들을 꼼꼼히 챙기며, 그들의 무사 탈출을 축하했다.
그러는 동안.
강후는 수용자가 떠나고 텅 비어 버린 수용동 내부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 버틸 수 있겠어?
- 신경 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 힘들면 힘들다 얘기라도 해.
- ······.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날 새벽.
거울에 비친 창백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동료와 나눴던 대화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봤던 거울이 지금도 눈앞에 있었다.
전에 비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 녹이 슬었고, 더 많은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다는 것.
거울이 깨진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거울에 묻은 핏자국은 거울 근처에서 죽은 수용자의 것일 터.
아마 간수의 서슬 퍼런 검에 인정사정없이 베이면서 흩뿌려진 약자의 최후였을 것이다.
저벅. 저벅.
강후의 발걸음이 천천히 수용동 밖에 바로 붙어 있는 간이 화장실로 향했다.
수용소 전체가 도망치고, 탈출하고, 진입하는 헌터로 뒤섞여 시끄럽기 짝이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조용히 걷고 있는 강후에게는 먼 나라 얘기였다. 강후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 1분이다. 그 이상이면 네 똥은 안 끊겨도, 목숨은 끊길 거다.
- 예.
간이 화장실 앞에서 간수와 나눴던 대화 역시 생생하다.
간수가 아무 생각 없이 부여한 1분의 시간이 강후에게는 탈출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이 됐다.
그 결과 차원 강탈자와의 계약이 이루어졌고, 강후는 간수들을 죽이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시간이 흘러서의 이야기가 바로 지금이다. 달라진 신강후가 이 자리에 다시 서 있다.
“이제…… 끝났다. 과거의 나는 더 이상 청명 수용소에 갇혀 있지 않아.”
강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 힘이 들어간 탓일까.
손톱이 닿은 일면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피는 지금 자신의 복잡하고도 무거운 감정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고도 하찮다.
“2막.”
강후가 되뇌이듯 말했다.
이제야말로 신강후로서의 인생 2막이 열린 기분이었다.
1막은 과거의 청명 수용소 탈출부터 오늘의 수용소 공격까지. 한 묶음으로 엮을 수 있을 듯했다.
소설가의 경험으로서 앞으로 펼쳐지게 될 2막의 미래를 두 글자로 축약해 예측해 본다면.
“전략.”
이런 결론이 나올 듯했다.
이제부터는 전략적인 행보가 중요하다.
감정적으로 행동했다가는 많은 것을 그르칠 수 있다. 상대할 적들의 격이 올라가고 있어서다.
열세 개의 별은 여전히 건재하고, 그들을 지금 모두 적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멍청한 짓이다.
그리고 멍청해지지 않는 확실한 방법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해서 전략을 세우는 것.
완벽한 아군이 아니라면, 그 외의 사람을 상대할 때는 항상 적이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윽고.
퐁!
핑그르르…….
강후가 죽은 간수에게서 빼앗은 오일 라이터를 앞서 18동과 간이 화장실 사이에 뿌려 둔 기름띠 사이로 던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불길이 솟아오르며, 가연성 물질로 가득한 구조물을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수년을 건재했던 건물이지만, 불장난 한 번에 허물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1막…… 완결.”
그리고 강후가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돌아섰다.
이제 여기서의 볼일은 끝났다.
다시 조환성의 소장실로 돌아가 녀석의 유품을 수습하고, 승전의 기쁨을 누릴 때다.
아울러 앞서 일격에 목숨을 잃은 간부로부터 강탈한 성좌 정보도 겸사겸사 확인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미련 없이 돌아서는 강후의 등 뒤로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건물을 빠르게 집어삼켰다.
훗날 시간이 흘러 지금 이 순간을 평가할 수 있게 된다면, 과연 미래의 자신은 어떤 평가를 할까.
그때까지 잘 살아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자신이 만들어 낸 2막은 어떤 그림으로 흘러가고 있을까?
너무 궁금하지만.
닿을 수 없는 미래.
그것은 지금의 자신이 착실하게 만들어 나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 * *
수습은 금방 끝났다.
일단 조환성의 시체는 전세혁이 수습해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클립스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서 간부급 인사의 죽음만큼 좋은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고인 능욕이니 뭐니 하는 것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고인일 때나 ‘능욕’이라는 단어가 성립하는 것일 뿐.
조환성과 같은 인간쓰레기에게 그런 말은 사치였다. 그저 업보를 치르는 것일 뿐이다.
조환성이 착용한 아이템 중에서 강후가 쓸 만한 아이템은 없었기에 전부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이 부분은 이예린이 맡아 주기로 했고, 아이템은 그녀가 전부 수습해갔다.
이예린의 사전 감정 가격으로 나온 판매 금액은 총 730억 원.
가성비 아이템 위주로 무장했던 것은 알았기에 예상은 했는데, 딱 가늠했던 금액이 나왔다.
정산은 이예린이 먼저 자기 재량으로 진행해 주겠다고 한 만큼, 편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조환성의 양날 도끼를 포함해서 그의 유품을 앞으로 어떻게 써먹을지는 이예린이 판단할 일.
강후는 이후 흐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 것이고, 그건 자기 소관이 아니다.
‘정산도 다 끝났고. 남은 건 내 몫으로 배정받은, 던전 1회 공략권 맛을 좀 볼 때인가?’
강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순수익 4% 배분과 던전 1회 공략권으로 이어졌다.
청명 수용소 안에 위치한 이클립스 소유의 던전 일곱 개.
그곳을 한 번씩 꼭 공략해 볼 수 있도록 약속받은 만큼, 바로 보상의 맛을 누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던전을 들어가든 미들 보스와 메인 보스는 있었다.
즉, 던전 하나를 공략하면 스킬 두 개를 추가하는 것은 확정적.
그런 던전이 무려 일곱 개인 것이다! 총 스킬 열네 개의 보물 창고가 자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