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해방 (1)
“푸하하!”
전세혁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강후가 수용소 안에서 제대로 깽판을 치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는 전력이 꽤 돼. 여기에 남(南) 수용소 간부 하나도 묶였고.
“무시하자니 신강후 씨가 놔주지를 않고. 달려들자니 너무 강한 거겠지.”
- 맞아. 극한의 거리 두기에 다들 어쩔 줄을 몰라 하네.
“내부 상황은 그쯤이면 확실하게 알 것 같다. 대용아, 곧 보자. 그때까지 잘 숨어 있고.”
- 알았어, 형. 이날을 기다리면서 버텼어. 이제 이클립스 찐따 새끼들 모습으로 위장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네.
“곧 보자.”
- 확인.
김대용과의 통화를 마친 전세혁이 태블릿 PC로 띄워 놓은 가상의 전투 화면을 보며 웃었다.
원래대로면 지금보다 30% 이상의 전력이 수용소 입구에 집중되어 있어야 맞다.
즉, 처음부터 연합군 쪽에선 정문에서의 공방전을 계산하고 있었다. 상수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강후가 중간에 효과적으로 수용소 전력들을 방해함으로써 변수가 생겼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엄청난 호재였다. 바꿔 말하면, 이클립스에게는 악재.
“청주에서 여기까지는……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했어도 늦어. 그리고 가능한 얘기도 아니지.”
“방금 보고가 들어왔어. 여전히 격전 중이래. 블랙의 남은 애들이 끝까지 저항하는 모양이야.”
“어차피 이클립스에 항복해 봤자 장기매매 엔딩이나 수용소 엔딩이 뻔하니까.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거겠지.”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세혁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묻어났다.
말해 입 아픈 얘기지만, 강후의 존재 덕분에 전략적인 이점을 취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중한 연합군의 전력을 덜 잃게 됐다.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전세혁은 강후 한 사람이 수십, 수백 명의 목숨값을 대신했다고 봤다.
비약이 아닌, 상황에 따른 논리적인 판단이었다.
정문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될 경우.
사전 전투 시뮬레이션에서 연합군 측은 최소 백 명 이상의 손실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최솟값이 그 정도였고, 최댓값은 세 배가 넘었다.
그리고 현재 손실 인원은 보고된 바에 따르면 20명 남짓이다.
“오빠, 우리도 속력을 내자.”
“그래야지. 강동현 새끼!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직접 그 면상을 눈으로 봐야 하는데. 아쉽네.”
“큭큭. 맞아.”
“청주 해방구? 그래, 실컷 가지라고 해. 마석 광산을 털리면 희대의 개뻘짓이지 뭐야? 클클!”
전세혁이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웃었다. 강동현을 향한 그의 반감은 유서가 깊었으니까.
강후가 밥상을 제대로 차려 줬으니, 이제 전투적으로 먹어줄 때가 됐다.
“지금의 속도 그대로 수용동까지 쭉 들어간다! 후퇴, 우회는 없으니 뒤돌아볼 생각하지 말고 돌진해!”
“예!”
전세혁의 지시 아래 대오를 갖춘 전력이 청명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수용소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한편.
강후는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간수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성좌가 없는 2급, 3급 간수이다 보니, 강후 입장에서는 상대하기가 너무 편했다.
당하는 입장에서야 ‘파리 목숨’이 된 형국이지만, 공격자 입장에서 알 바는 아니었다.
【그간 부지런히 키워 온 힘의 대가를 이렇게 보네! 역시 내가 선택한 계약자의 품격에 어울려!】
성좌 중에서 가장 먼저 강후의 활약에 목소리를 낸 것은 황야의 전략가였다.
언제나 강후의 활약을 믿고, 어떤 선택이든 그 이유를 의심하지 않는 성좌.
강후는 삭막하고 차가운 성좌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끌어올려 주는 황야의 전략가가 좋았다.
그녀 같은 성좌가 없었다면, 성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마치 건조한 품평회 같았을 것이다.
【압도적이야! 멋져!】
압도.
월등한 힘이나 능력으로 상대를 누른다는 뜻의 단어. 지금의 강후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기도 했다.
【네 비극이 시작된 곳을 영광으로 채워 넣었구나. 장하다. 내 계약자에게 직접 축복을 빌겠다.】
‘오호.’
평소의 차원 강탈자 같지 않은 반응에 강후가 두 눈을 씰룩였다.
그녀만큼 강후 역시 감회가 새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청명 수용소를 탈출할 때만 해도, 그때는 한 놈을 죽이기도 벅찼던 자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도 없는, 하찮은 전투를 몇 번 치른 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을 버틸 체력도 되지 않아 피를 토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땐 수용소의 간수들이 함부로 도모할 수 없는 태산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하찮은 목숨들이다.
그때.
철컹철컹. 쿵쿵쿵.
중무장을 한 청명 수용소의 특수 기동대가 헐레벌떡 현장에 도착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어느 정도 됐음에도 이제야 도착한 것을 보면, 여기도 술판을 벌인 모양.
수용소장부터 술에 찌들어 살았으니, 아랫것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흥.”
강후가 코웃음을 치고는 쭉 뒤로 빠졌다.
무리 지어 도착한 기동대와 정면 승부를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끌릴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저쪽이다.
굳이 기다림의 시간을 단축해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먼저 공격하는 것은 오히려 호구 짓이다.
“독한 새끼…….”
강후를 지켜보던 간수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림이 답답해 죽겠는데, 그렇다고 명쾌한 해결책도 없었다.
강후를 빠르게 제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법이지만, 그럴 실력을 가진 헌터가 없었다.
그나마 하나 있었던 헌터, 조환성은 이미 머리가 잘려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었고 말이다.
“에라이, X팔!”
결국 참다못한 간부가 강후를 향해 돌격했다.
이대로 시간이 끌리느니, 자신이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해 보겠다는…… 나름 멋진 의도에서였다.
“할 수 있습니다!”
“저 악랄한 암살자 새끼부터 죽여 버리고 가시죠! 저희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간수들이 응원했다.
그중에는 영혼 없는 응원도 꽤 있었지만, 어쨌든 간부의 승리를 기원하는 결은 같았다.
사실 그 틈을 타서 간수들은 정면으로 이동해도 됐다. 전력 지원은 한시가 급한 문제니까.
하지만 이미 그쪽 상황이 악화일로에 있다는 것을 안 간수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적당히 목숨을 부지하면서, 가장 가까운 적인 강후가 제거되길 기다리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강후가 제거되면?
이후에 상황을 파악한 간부가 적당히 빠질 그림을 보지 않을까 하는 대단히 비겁한 생각이었다.
밤하늘.
쏟아지는 빗줄기.
그리고 강후와 간부가 마주치게 될 현장에 직사(直射)로 들어오는 수용소 조명까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만큼 삭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푸슈우우웃!
두 사람의 실루엣이 뒤엉켰다가 한 사람에게서만 핏줄기가 튀는 것을 본 이후로는.
모든 간수에게 그 광경이 비극과 절망이 됐다. 간부가 강후에게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뭐, 뭐지, 이게……?”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저 새끼 도대체 뭐야. 신강후, 저 새끼 도대체 뭐냐고! 몇 달 전에 수용소를 탈출한 레벨 10 헌터였다면서! 이게 말이 돼?”
간수들이 얼어붙어 버렸다.
그건 현장 지원을 온 기동대도 마찬가지라서, 누구도 앞으로 먼저 나서지 못했다.
방금 죽은 간부도 조환성만큼은 아니지만, 레벨 200이 훌쩍 넘어가는 실력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후를 상대로 한 번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제대로 허를 찔려버린 것이다.
간부가 일격에 목숨을 잃는 현장을 지켜본 간수와 기동대 모두에게서 적막이 감돌았다.
이 많은 사람이 있는 전장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쉼 없이 쏟아지며 흙 지면을 때리는 빗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깊은 고요가 찾아왔다.
그리고.
스멀스멀 그들 사이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자리에서 덧없이 목숨을 잃은 간부의 모습은 뇌리에 깊게 박혔다.
그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아니, 이미 그렇게 주인공이 된 간수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죽어 있잖은가.
어쭙잖은 사명감이나 조직에 대한 의리로 버틸 상황이 아니었다. 결과는 개죽음으로 평등하니까.
바로 그때.
“으아아! X발, 모르겠다! 아아아!”
간수 하나가 입고 있던 간수복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는, 마석 광산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쪽의 샛길을 이용하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루트로 수용소 밖 탈출이 가능해서다.
“그래! 뒈지는 것보단 낫지!”
“튀어, 새끼야! 여기 있으면 신강후한테 죽는다고! 뭐해? 빨리 안 따라오고!”
순식간에 공포에 휘말린 간수들이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
강후는 위화감을 느꼈다.
여전히 자신은 한 명이고, 저쪽은 조금만 더 인원이 더해지면 백 명도 족히 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놈들은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
힘을 한꺼번에 합치면 몇 명이 죽고 극복해낼 수도 있을 상황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를 위해 희생되는 ‘소’가 되지 않고 싶다는 것이 놈들의 솔직한 심정이겠지.
더 이상 쫓아갈 가치도 없는 적들을 보며, 강후도 추격할 의사를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슬쩍 뒤를 돌아보는 녀석들이 있을 때마다, 한두 걸음 정도 앞으로 걷는 시늉을 하자.
“으아아아! 온다! 온다고!”
“그냥 앞만 보고 달려, 인마!”
지레 겁먹은 놈들이 불안을 창의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강후는 뒤를 집요하게 쫓아오는 추격자가 되어 있었다.
스르륵! 척!
이내 검집에 단검을 넣은 강후가 주변을 살폈다.
죽은 간부에게서 강탈한 성좌는 나중에 살펴볼 생각이고, 전황부터 먼저 보고 싶어서였다.
“음. 굳이 정문 쪽으로 갈 필요는 없겠네.”
이미 청안 용병단, 흑사자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니 정면도 뚫린 모양이다.
그렇다면 정리된 전장에서 굳이 소꿉놀이를 할 필요는 없고.
“수용동으로 갈까.”
수용자들이 여전히 탈출하지 못하고 갇혀 있을 수용동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들의 미래를 책임져줄 이유는 없지만, 자유를 선택할 기회 정도는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과거의 자신에게 선물하는 완벽한 해방과 같았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얼마 후.
가까운 수용동부터 도착한 강후가 현장에서 막 도망치려던 간수를 죽이고 열쇠를 탈취했다.
21세기지만 수용소는 여전히 구식 수단으로 수용동의 보안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용자들에게 자동화된 관리 시스템도 사치라는 강동현의 개똥철학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는 주체는 간수인데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열쇠를 얻은 강후가 선 곳은, 자신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수용동 앞이었다.
바로 18동 앞.
목숨을 건 탈출이 시작됐던 장소이자, 원작의 신강후가 수년을 고생했던 지옥의 문인 것이다.
차라리 죽고 싶었던 과거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지금!
처억.
그 경계선에 강후가 섰다.
“밖에 누구 있어요?”
“제발! 제발 구해 주세요!”
그리고 굳게 잠긴 철문 안쪽에서는 수많은, ‘과거의 자신’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수용자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