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침투 (1)
* * *
제법 긴 기다림 끝에 정유리와 함께하게 된 식사.
해영 길드가 이런저런 구설수에 휘말려 있기는 해도, 부산의 치안은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산 시내도 서울 시내만큼이나 어디를 가도 안정적이었고, 많은 사람이 붐볐다.
실제로 서울의 살인적인 물가에 혀를 내두른 일반인들이 부산으로도 꽤 내려왔다고 했다.
여기도 고물가인 것은 매한가지지만, 갈비탕 한 그릇에 15만 원 하는 서울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런 체감을 한 것은 강후도 예외가 아니어서, 부산이 ‘상대적으로’ 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각자 입맛에 맞게 파스타와 리조또를 시키고,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유리가 넌지시 물었다.
“오빠, 요즘도 많이 바쁘지?”
“너보단 덜 바쁜 거 같긴 해.”
“에이, 나는 그냥 던전에 처박혀 있어서 연락이 안 되는 거고. 오빠는 찾는 사람이 많잖아?”
정유리는 달라진 강후의 눈빛에서, 뭔가 그에게 새로운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뭐랄까, 중요한 일을 앞두면 강후에게서는 그 특유의 살기가 느껴졌다.
말로 설명하긴 너무 어렵고, 정유리가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기운이 있다.
“어떻게 지냈어?”
강후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실수로라도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그녀에게 괜히 청명 수용소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아서다.
생각이 거기에 꽤 집중되어 있는 것은 맞지만, 지금 그녀와 함께하는 이 자리도 중요했다.
그래서 확실히 구분해 두고 싶었다. 지금은 그녀의 근황을 물어보고, 또 자기 얘기를 들려줄 때다.
“얘기했다시피 던전을 엄청 돌고 있고. 최근에 명가 길드와 그루 길드 쪽에도 인맥을 텄어.”
“그래?”
“응. 마침 기회가 와서 말이야. 그쪽에서도 정말 좋게 봐주셨어.”
“좋은 소식이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길드 모두 깐깐하게 헌터를 보는 곳이다. 단순한 친분 목적으로만 인맥을 만들진 않는다.
보통 그들과 함께하는 헌터들은 어떤 형태로든 실력 검증이 된 헌터들이었다.
정유리의 실력은 강후가 보증하고, 원작에서의 성장과 행보가 보증하는 만큼.
강후는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있었던 정유리에 대한 걱정을 말끔히 털어냈다. 잘할 것이다.
“개별적으로는 정보 수집 활동 중이야. 정화 길드의 패악에 대해서 고발하는 활동을 조만간 제대로 할 예정이고.”
“패악.”
“응, 패악(悖惡). 요즘 심연 편에 서는 인플루언서들이 꽤 늘었잖아? 덕분에 제보할 창구도 많이 생겼고, 때가 된 것 같아.”
“많이 늘었지.”
“응! 실제 영상들도 많이 올라오고 있고. 헌터 인신매매 건도 썰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으로 판명이 났잖아? 물론 정화 길드 쪽에서 어떻게든 묻고, 물타기 하려고 애쓰고 있긴 하지만.”
“지금보다 더 많은 가짜 뉴스가 양산되겠지 싶어. 벌써 조작된 심연의 범죄 영상이 꽤 보이더군.”
“응. 그런 가짜 뉴스도 팩트체크를 할 수 있는 정보까지 더 수집해 볼까 해. 이쪽으로도 꽤 네트워크가 있더라고.”
“그렇겠지. 정화 길드에 대해서 반감이 없는 사람들만 살고 있는 건 아니니까.”
“오빠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정화 길드를 싫어하는지.”
“물론.”
“그래서 꼭 놈들의 발목을 붙잡고 싶어. 그리고 이제 괜찮은 시기가 온 것 같아.”
힘주어 말하는 정유리에게서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강후도 몸을 흠칫할 만큼,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밀려 올라오는 살기였다.
특히 채관형에 대한 그녀의 증오와 분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강후는 그런 그녀의 감정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 여자의 인생이, 그리고 순수한 감정이 변질되고, 더럽혀지고, 영원히 묻힐 뻔했다.
그로 인한 충격으로, 세상에서 벗어나 은둔까지 해야 했던 정유리다.
그녀의 복수는 말려야 할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옆에서 제대로 키워줘야 할 감정이었다.
다만 딱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만 강후가 짚어 주었다.
“다 좋은데 무리만 하지 마. 맹수의 마음가짐으로 때를 노려. 무작정 달리기만 하지 말고.”
“응, 오빠. 조언 고마워.”
“유리, 네가 다가가는 만큼 상대도 널 인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잊지 말고.”
“그래야지. 그나저나…… 요즘 정말 실력 좋은 출혈 암살자를 구하기 힘드네. 가뭄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전멸인 것 같아.”
“쓸만한 암살자들은 다 소속이 있다고 하더군.”
“맞아!”
“다음에 한 번 불러. 마스터 K에게 신세도 많이 졌고…… 한 번 정도는 발 벗고 도와주지.”
“오빠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말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사양은…… 안 할게? 호호.”
“편하게 불러. 1회 이용권, 정도라고 비유해 두면 좋을 것 같네. 꼭 도와줄게.”
“응, 고마워! 오빠, 모쪼록 항상 건강 잘 챙기고! 특히 오빠 노리는 사람들 조심하고! 알았지?”
“유리 너도, 지금처럼 딱 안정적인 바운더리 안에서 계속 성장했으면 좋겠다.”
서로 덕담이 오갔다.
정유리를 볼 때마다 강후가 느끼는 감정은, 자신에게 사이 좋은 친동생이 있었다면 딱 이런 동생이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오빠를 누구보다 걱정해 주고 챙겨 주는 그런 여동생.
현실판의 여동생은 원수지간이라지만, 강후가 그리는 상상 속의 여동생은 그랬다.
그 이후.
강후는 그녀와 많은 일상 대화를 나누면서, 잠시나마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가졌다.
예전에도 느꼈었지만, 정유리를 만나는 시간은 강후에게는 일종의 ‘정화’의 시간이었다.
뭐랄까, 그녀를 보고 있으면 피와 어둠으로 물든 자신의 삶이 조금은 씻겨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검게 물든 천이라면, 정유리는 한없이 그 천의 색깔을 중화시켜 주는 하얀 잉크 같았다.
결국 천은 회색, 그 언저리 어딘가에서 색의 변화가 멈추고 말기는 하겠지만.
분명 처음의 검은색보다는 훨씬 밝아진, 회색 경계까지는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처절하게만 흘러가는 일상에 쉼표를 찍어 주고, 잠깐이나마 웃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녀.
강후는 진심으로 정유리의 행복을 빌었다. 그리고 늘 그녀가 이렇게 웃을 수 있길 바랐다.
* * *
그날 밤.
강후는 청명산이 보이는 곳까지 이동해 있었다.
순간 이동을 위한 지정 포인트는 부산역을 떠나기 전, 역사 인근에 만들어 뒀었다.
그럴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수용소장 조환성의 암살에 실패한다면…….
미련 없이 순간 이동을 전개해 부산역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확실히 안전을 담보할 방법! 강후의 든든한 보험이기도 하다.
구르르릉.
“음.”
비는 안 오지만, 하늘에는 벌써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비 오기 직전 그 특유의 물 냄새와 먹구름 사이의 굉음도 같이 들려온다.
완연한 밤.
달빛조차 사라진 오늘은 은밀한 침투를 시도하기에 가장 좋은 날이기도 했다.
“…….”
청명 수용소와 아직 거리가 있음에도, 벌써 수용소 특유의 냄새가 났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냄새.
당연히 좋은 냄새는 아니다.
묵은 듯한, 썩은 듯한, 혹은 피비린내 같은. 한 가지 단어로 통칭할 수 없는 역겨운 냄새다.
‘오늘도 어김없이 누군가가 죽은 거겠지.’
강후는 그 냄새 속에서, 소각동에서만 맡을 수 있던 특별한 냄새를 분별해냈다.
시체를 태울 때만 나는 냄새다. 정확히는 소각 끝자락에 뼈를 태울 때 나는 냄새.
단지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 청명 수용소에서의 많은 기억이 주마등같이 떠올랐다.
어제 옆에서 함께 마석을 채굴하던 수용소 동기가 내일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려지곤 했었다.
뼛가루들은 따로 유골함 따위에 보관되지도 않았고, 추모할 수 있도록 곱게 버릴 수도 없었다.
화장실의 퀴퀴한 냄새를 잡는답시고 여기저기 방향제처럼 뿌려지거나.
간수들이 수용자들로 하여금 뼛가루를 먹거나 씹도록 하게 만드는 등…….
정말 경악스러운 용도로 사용됐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수용자들은 철저히 능욕당했다.
까득.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아오르고, 그 감정이 고스란히 어금니에 실려 갈린 소리를 만들어 낸다.
다만 역설적으로, 그 분노가 머리를 차갑게 만든다. 요동치던 감정이 빠르게 진정된다. 그리고 본질이 보인다.
‘일단 주요 루트로 이동하는 것은 어떤 루트를 선택하든 안전할 수 없으니 기각.’
청명 수용소로 향하는 도로 위에는 수많은 감지 및 경보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사전에 보고하고 승인받은 차량만 출입할 수 있기에, 허가된 차량의 접근 시간 외의 감지 신호는 모조리 침입자로 간주됐다.
즉, 강후가 지금 아무것도 없는 저 도로 위로 이동을 시작한다면 바로 수용소에서 경보가 울린다.
처음에는 1차 경보가 울릴 것이다. 종종 야생 동물들이 도로 위를 지날 때가 있어서다.
그렇게 1차 경보가 울리면, 바로 마력을 감지하는 시설이 발동된다.
야생 동물이라면 마력이 감지되지 않을 테니, 1차 경보를 끝으로 추가 경보는 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마력이 감지되면?
그때는 2차 경보가 울리고, 수용소 전체에 2차 경보가 울린다.
특히 수용소 내 폭동이나 긴급 상황을 대비해 편성되어 있는 ‘기동대’가 움직인다.
이렇게 되면 수용소 전체가 비상 대기 상태에 돌입하므로, 침투는 그림의 떡이 된다.
설령 침투까진 성공한다 치더라도, 수용소장을 도모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이미 준비가 다 끝났을 테니 말이다.
스스스슷.
강후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주요 도로는 당연히 버려두고, 청명 수용소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방향을 잡았다.
야시 능력 덕에, 사방이 캄캄한 와중에도 주변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이동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은신과 무영 스킬을 기본적으로 깔아둔 상태에서 강후가 부지런히 이동하고, 또 이동했다.
만약을 위해 타락수를 미리 보내뒀다.
조용히 기동하면서 다른 헌터를 발견하면 빠르게 복귀하여 보고하도록 세팅해 뒀다.
‘18번 갱도로 들어가는 게 가장 빠르면서도 귀찮은 과정이 적어.’
강후가 생각한 루트는 청명산의 동굴과 연결된, 수용소 내부의 광산 갱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18번 갱도.
2년 전에 폐쇄된 갱도로 채굴할 마석이 거의 없고, 남은 마석은 품질이 낮아 버려진 곳이다.
폐쇄된 후로는 수용자의 시체를 버리거나, 수용소에 오자마자 죽은 헌터를 매장하는 곳이 됐다.
강후가 18번 갱도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원작에서 신강후를 조기에 탈출시킬 방법으로 고안했던 루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잡아 두었던 신강후의 설정상, 탈출이 성공하면 파워 밸런스가 무너질 것이 염려됐다.
즉, 주인공 장시환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신강후가 급성장할 것이 예상되어 집필 계획을 접었다.
그래서 원작 내용에는 녹일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은 것이다.
‘원작에서 탈출 루트로 쓰려고 했던 선택지를 침입 루트로 쓰게 될 줄이야. 인생은 역시…….’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강후가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오늘도 겉으로는 평온하게 흘러갔을 청명 수용소의 하루.
하지만.
이 수용소에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