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인페르누스 (4)
* * *
일단 스탯 분배는 지금 급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확인을 마친 강후가 유족을 찾았다.
그들에게 다시 감사 인사를 올리고는, 한 분씩 손을 맞잡으면서 결의를 다졌다.
“원래 주인분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이 부적을 극한까지 활용하겠습니다. 제게 부적과 마주할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원래 주인이었던 헌터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저희 아이가 그랬어요. 자신은 절대 감당할 수가 없는 부적이고, 너무 많은 비밀이 있다고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쉽게 가늠이 되지 않더군요.”
“지옥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지옥에서는 성좌도 영향을 받는다고 했어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게 공개적으로 말한 정보이지만요.”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하시지 않을 수도 있으셨을 텐데.”
“이것밖에 말씀드릴 수 없어 죄송할 따름이에요.”
많은 비밀을 가진 부적임은 틀림없다. 예전의 주인도 쉽게 언급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있는 모양.
앞으로 알아가야 할 것들이기도 하다. 지금은 백날 고민해 봤자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유족들은 떠났다.
그동안 헌터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받은 돈은 본국으로 돌아가 희귀병 연구 센터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원래 주인, 그러니까 아들이 희귀병으로 고생했던 전례가 있기에 의미 있게 쓰고 싶다고 했다.
사실 영리를 추구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강후지만, 어쨌든 좋은 뜻인 것은 틀림없기에 유족들의 결정을 응원하고 지지했다.
한편.
강후는 강복화와 정유리의 배려로 시크릿 룸에서 좀 더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왠지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넓은 소파에 누워 있으니 몸은 편했다.
아까 부적을 귀속시키는 과정은 그다지 길지 않았는데, 정신적으로 상당한 힘을 소모했던 모양.
잠깐 몸을 편하게 눕혔을 뿐인데, 깜빡 잠이 들었다. 그 정도로 피로감이 올라와 있었다.
10분 정도, 짧고 깊은 숙면 후.
강후는 스탯창을 열어놓고는 부적과 연동해서 올릴 스탯을 쭉 살폈다. 분배의 시간이다.
‘일단 맷집에 66을 딱 맞춰 주면…… 맷집이 1,000이 되지.’
맷집 999와 1,000은 시스템에서의 판정이 확연히 다르다고 해도 될 만큼 차이가 생긴다.
아이템으로 따지면 등급이 바뀌는 것과 같아서, 맷집을 딱 1,000에 맞추려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1,010이나 1,020까지 올리면 더 달라지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소폭 오른 선에서 관련 계수들이 조정될 뿐이다.
그래서 가장 효율을 크게 볼 수 있는 맷집 수치에 맞추기로 했다.
‘이러면 남는 분배 스탯이 434. 일단 항마에 최대한으로 넣자. 그럼 300인가?’
한 분야에 300을 초과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으니, 항마의 상승 최대폭은 300이 된다.
그러면 남는 스탯은 134.
근력이 좋을 듯했다.
민첩 스탯은 레벨이 오를 때마다, 매번 1씩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봤고.
근력을 쭉 올려줘야 강후의 ‘한 방’ 스킬에 관련된 대미지가 오르는 만큼, 유용할 듯했다.
체력은 지금도 충분한 수치고, 마력은 단 1을 투자하는 것도 아까운 스탯이다.
그렇게 부적 내의 스탯 분배를 마친 뒤, 달라진 스탯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신강후 Lv. 276】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 다재다능】
【근력 1397】【민첩 1444】
【체력 1115】【마력 31】
【항마 1060】【맷집 1000】
【* 암흑기 455】【* 신성력 115】
“보기 좋네.”
천으로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맷집 수치를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이런 게 숫자 놀음일까?
한편으로는 이러고 나니, 이번에는 항마와 맷집을 가릴 것 없이 스탯 2,000 욕심이 났다.
항마와 맷집 계열은 천 단위로 신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후. 끝났다.”
강후가 다시 소파에 누워 부적을 어루만졌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부적에 엄청난 스탯은 물론, 알 수 없는 비밀까지 잔뜩 들어 있을 줄이야.
앞으로 이 부적의 비밀, 그리고 안에 자리 잡은 ‘눈’과 친해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듯하다.
물론 유족에게 다짐하듯이 했던 말처럼, 부적을 최대한 활용할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부적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질 듯했다.
* * *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시크릿 룸이 위치한 VVIP 전용 층계의 내부 구경이나 해 볼까 해서 문을 열고 나왔더니.
아까 한 번 얼굴만 마주치고 말았던 백선태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강복화가 경비를 맡기고 간 모양이었다.
여수 군벌 출신인 백선태를 이렇게 믿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강후가 처음 백선태를 봤을 때, 그가 여수를 떠났다고 해도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터.
강복화가 아무나 막 믿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혹시 강복화와 연관이 있는 사람인 걸까?
어쨌든 강후가 시선을 둔 채로 서 있자, 백선태가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뵙네요.”
“오랜만이네요.”
오늘 백선태를 보기 전까진 그에 대해 완벽히 잊고 지냈던 강후였다.
시종일관 관심을 가진 건 백선태 쪽이었지, 강후 쪽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초면은 아닌 만큼, 강후도 어색한 미소와 함께 반가움의 인사를 건넸다.
“그간 신강후 님에 관련된 소식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듣고 있었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보다 더 유명해지시고, 또 대단해지셨네요. 정말 멋지십니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백선태는 자신에게 저자세였다.
사실 백선태와 힘을 겨뤄 본 것도 아니고, 그저 백선태가 자신의 능력을 한 번 봤던 것이 전부.
그것만으로도 이미 자기보다 훨씬 위의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백선태는 마치 일반인이 연예인을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찬이세요.”
“아닙니다. 아까도 휴게실에서 신강후 님의 전투 영상을 보고 있었거든요. 제 롤모델이십니다.”
“그런가요.”
뭔가 막 기쁜 리액션을 해 줘야만 할 것 같은데 그게 잘되지 않는다. 덕분에 밋밋하게 그런가요, 하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사실 저도 더 성장하고 싶어서 정화 길드로 갔었거든요. 근데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습니다.”
“최종 심사까진 갔다는 거죠?”
“예. 하지만 아쉽게도 마지막에서 걸러진 것 같더라고요. 참 안 풀리네요.”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직전까지는 갔던 겁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아요.”
강후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격려했다.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다는 건, 일단 장시환의 검토 단계까지 갔다는 얘기다.
아마 장시환의 기준으로 마뜩잖은 약점이 보였기에, 최종적으로 가입 승인은 나지 않았을 터.
하지만 거기까지 올라간 것만으로 이미 유력 후보군들의 경쟁에서 앞섰다는 뜻은 됐다.
그래서 강후가 생각하는 것보다 백선태의 실력이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음?”
“제게 피드백을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암살자로서 암살자에게 평가를 받아 보고 싶습니다만.”
“저도 배우는 입장이라. 함부로 누구를 가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은 더더욱.”
강후가 솔직하게 말했다.
한때는 나 정도라면 누군가에게 조언 정도는 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천살노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건 오만이었다. 아직 자신은 갈 길이 먼, 다듬어지지 않은 암살자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지내 온 것도, 다듬어지지 않았던 모난 구석이 긍정적으로 작용해서다.
사과 훈련처럼 자신의 움직임을 꿰뚫어 볼 실력자를 만나면, 가차 없이 유린당할 것이라 확신했다.
“역시…… 겸손하시네요.”
“말씀은 감사히, 그리고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롤모델이라는 사실에는 자부심을 갖겠습니다.”
“무리한 말이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호응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음에 또 뵐 일이 생기면, 그때는 제가 소소한 팁 정도는 드릴 수 있을 실력이었으면 하네요.”
강후의 진심이었다.
그만큼 천살노수에게서 스펀지처럼 가르침을 쭉쭉 흡수하고, 성장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백선태도 하고 있을 것이다.
강후와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서, 움직임이나 판단, 전략과 같은 것을 배우고 싶은 거겠지.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백선태에게 말과 마음을 더 쓰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이 넓은 대한민국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우연히 다시 만난 구면이기도 했거니와.
실력 좋은 암살자가 귀한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와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에 볼 때는 좀 더 발전된 모습이면 했다.
동종 업계(?)에 대한 기대랄까. 묘한 감정이었다.
* * *
이후.
강후는 정유리와 마켓 빌딩 밖으로 나와 그녀가 안내한 맛집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 김에 식사하면서 얘기를 좀 더 나눌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간 그녀가 던전을 열심히 다녔다는 것 외에는 근황을 들은 것도 없어서다.
맛집 앞의 인산인해 대기열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정유리는 어디선가 계속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고, 강후는 전세혁에게 막 도착한 문자를 봤다.
[12시간 후로 결정했습니다. 시간으로 말씀드리면 04시, 오전 4시입니다.]
강후가 정유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인파가 없는 곳으로 이동해 전세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디데이가 앞당겨졌기에, 이렇게 되면 강후가 오늘 밤에는 움직여야 했다.
- 네, 전세혁입니다.
“문자는 확인했습니다. 내일 새벽이라고요.”
- 네. 생각보다 폭우 예보가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청주 쪽의 전황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요.
“블랙이 예상보다 더 일찍 무너지기 시작했나 보네요.”
- 이클립스에서 병력을 더 동원한 것 같습니다. 본부가 거의 텅텅 비었다는 얘기도 있고요.
“한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오전 4시 전에 조환성의 목을 제가 먼저 따면 어떻게 됩니까?”
-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 병력 집결은 이미 끝났습니다.
“아.”
이미 청명 수용소 근처까지 진출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클립스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이동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일 터.
얼마만큼 이클립스가 청주 해방구 접수에 진심인지, 그리고 연합군의 기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만약 수용소장 암살에 실패하더라도 무리하진 마십시오. 어차피 저희가 바로 움직이면 됩니다.
“제가 소장을 죽이고 연락을 하면, 언제든 출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네요.”
- 맞습니다.
“그럼…….”
강후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자, 수화기 너머에서 꿀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세혁은 강후의 잠입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약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조환성의 생사 여부는 전세혁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강후의 안전이었다.
괜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리하다가, 소중한 암살자 전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내, 강후가 끝맺지 않았던 말을 매듭지었다.
“조환성의 목을 따고 다시 연락하죠. 오늘 밤, 움직일 겁니다. 자정 전에.”
어두운 과거와 완벽하게 단절하기 위한 암살 계획. 그 주사위가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