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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293화 (293/304)

293화 인페르누스 (3)

애초에 귀속 과정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런 존재와 마주칠 것은 예상했었다.

그래서 당황스럽진 않았고, 뜻밖의 외형에 놀라지도 않았다. 딱 이런 모습을 생각했었기에.

‘눈’이 말했다.

- 내가 너와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해 봐. 너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존재지?

강후가 대답 대신에 지난 삶을 회상하듯 떠올렸다. 그 정도의 정신 공유는 될 테니까.

가식이나 연출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신강후로 살게 된 삶의 시작점부터 지금까지를 떠올렸다.

빙의자라는 것도 회상 속에서는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저 눈이 자신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안다고 한들, 세상에 알릴 방법도 없거니와.

설령 알려진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다. 일단 빙의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니 참 편했다.

세상에서 가장 솔직히 대한 게 바로 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헛웃음이 났다.

적막이 꽤 흘렀다.

눈은 계속 강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내면의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듯이 이글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적막도 살짝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즈음.

- 정말 흥미로운 삶을 살고 있네. 이게 정녕 네 삶이란 말이야?

눈이 호기심에 찬 반응을 보였다.

들리는 눈의 목소리는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청년의 톤과 말투에 고정되어 있었다.

‘맞아. 내 삶, 그 자체지.’

- 이걸 믿으라고?

‘그럼 뭘 믿고 싶은 거지?’

- …….

부적의 주인 행세를 하는 녀석이기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존재쯤은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정도 전지전능함은 없는 듯했다.

오히려 혈기 왕성한, 하지만 풋내기인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의 존재는 무엇일까? 성좌? 성좌라고 하기에는 아이템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렇다면 부적에 빙의되어 버린 다른 세계의 존재? 그럴듯하기는 하나, 물음표가 해소되진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해. 난 다가올 운명과 미래를 바꿀 거고. 너는 내 밑거름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

- 당돌한 놈! 난 마음만 먹으면 너를 지금 이 순간에 바로 백치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어!

‘그럴 장난이나 칠 존재였다면, 굳이 부적에 봉인될 필요도 없었겠지. 지금 스스로 격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 음.

눈의 말이 멈췄다.

그러더니 갑자기 강후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면서 바로 강후에게 드러난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배경이었다.

‘이건…….’

강후가 원작자의 삶을 살던 시절, 그때의 배경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름만 되면 습한 기운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눅눅하게 쌓여있던 그 작업실이었다.

* * *

한편, 정유리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계속 강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부적을 움켜쥔 순간부터 강후는 멈춘 상태 그대로 있었다.

마치 정지된 화면을 보는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대비해서 미리 편한 소파에 앉아 있었던 것은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강후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유족을 포함한 모두가 방 밖에 있었다.

정유리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기에 유족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었다.

“혹시 앞서 인페르누스에 손을 댔다가 백치가 된 헌터분들은 어떻게 되셨는지 아시나요?”

“정상적으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까지 일주일 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만.”

“다만?”

“헌터로서의 능력을 상당히 잃었더군요. 가장 중요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직접 경험한 분의 말에 따르면 성좌 계약이 해지되었다고 하더군요.”

헌터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성좌에 대한 의존도와 연계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정유리는 상상해 봤다.

만약 지금 자신과 계약한 성좌들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다면?

지금 갖고 있는 능력의 대부분이 반 토막, 혹은 그 이하의 수준으로 급락하게 된다.

‘오빠도 그렇게 되면…….’

정유리의 생각을 읽었는지, 옆에 있던 강복화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유리야. 보통 대부분의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보다는 훨씬 좋게 나오기 마련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렴.”

“할머니…….”

“저 모습에서 투지가 느껴지지 않니? 눈의 초점은 없지만, 온몸에서 살아 숨 쉬는 힘이.”

“그렇긴 해요.”

“천살노수 님의 안목을 믿고, 네 할아버지의 안목을 믿어 보자. 다들 인정했다잖니.”

“네! 잘될 거라고 믿을게요!”

말의 힘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정유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후에게서 반응이 나왔다.

갑자기 초점 없던 눈에 생기가 돌더니, 이내 매섭게 눈빛이 번뜩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쥐고 있던 인페르누스에서 붉은빛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며 강후를 감쌌다.

“오오…….”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유족이었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기 때문이리라.

“와, 진짜…… 오빠가 해낸 거예요? 저, 혹시, 앞서 저런 경우가 없었나요?”

정유리가 유족에게 물었다.

이미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방금까지 걱정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질 만큼, 강후가 신속하게 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아까 정유리와 대화했던 남자가 답했다.

“처음입니다. 저렇게 눈부신 광채를 부적에서 뿜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역시 강후 오빠…….”

그녀가 혀를 내둘렀다.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자신감 있게 도전하겠다던 강후의 패기의 이유를 알 듯했다.

이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 강후가 정유리를 보고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끝났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 * *

강후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원작자 시절의 모든 기억과 시간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간 잊고 있던, 어찌 보면 전생(前生)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예전의 기억들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었다면.

예전에는 전생을 떠올릴 때, 어제 있었던 일처럼, 그리고 내 일처럼 기억이 났다.

그러니까 신강후로서의 자각도 있었지만, 원작자로서의 자각 역시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마치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보는 관람객처럼, 3자의 입장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분명 전생의 내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데, 마치 남의 삶을 보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지만, 그 기억이 ‘내 기억’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반면에 신강후로서의 삶은 더욱 선명하게 각인됐다.

내 삶, 그 자체로 느껴졌고 이따금 3자의 관점에서 느껴지던 이질감도 완전히 사라졌다.

뭐랄까.

그간 꾸준히 진행되어온 신강후와의 동기화가 완전하게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예전의 자신이 99%의 신강후였다면, 지금은 단언컨대 100%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듯했다.

“후우…….”

절로 나오는 한숨.

안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말로 늘어놓기에는 정말 길고도 복잡한 일들.

하지만 정리하면 단순했다.

자신은 인페르누스의 주인이 되었고, ‘눈’은 자신의 삶과 과정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오히려 아주 깊은 흥미를 느꼈다. 강후를 호기심과 탐구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강후가 밖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유족과 정유리, 강복화에게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보였다.

앞서 얘기를 나눴던 부분이기도 한데, 5분 정도만 부적의 옵션을 살필 기회를 달라는 신호였다.

이미 협의된 내용인 만큼, 그들은 조용히 밖에서 기다렸다.

다만 제대로 주인을 찾은 부적을 보면서, 연신 신기해하는 모습이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헌터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서야 아들의 유언을 비로소 들어 주게 되었다는 미안함과 안도감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겠지.

강후가 부적을 꽉 움켜쥔 채로 조심스럽게 옵션을 확인했다.

과연 1등급 부적은 어떤 형태의 구성을 갖고 있을까?

까다롭게 주인을 고를 정도라면 숨겨진 다른 활용 가치나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인페르누스】

【등급 : 1등급】

【히든 스탯을 제외한 스탯 중에 최대 세 분야를 선택하여 합계치 500의 스탯을 올릴 수 있습니다.

설정 후에 분배가 끝나고 나면, 재설정을 위해서는 30일의 시간이 필요하며. 한 분야에 투자하는 스탯이 300을 초과할 순 없습니다.】

‘암흑기와 신성력을 제외한 나머지 중에서 셋이라는 말이지? 일단 근력, 항마, 맷집은 필수고 스탯 수치는 추가 옵션까지 다 보고 결정해 볼까.’

강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스탯 분배를 서두를 필요는 없기에, 인페르누스가 가진 다른 옵션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지옥문 – 신의 바람이 만들어 낸 신병(神兵)과 싸울 수 있으나, 죽을 경우에는 영혼이 구속된 신병이 됩니다.】

‘……전에 도무지 답을 얻을 수 없었던 신의 바람. 그것과 관련된 능력인가? 신병과 싸울 수 있다는 건 영체 훈련같이 특수한 장소로 갈 수 있다는 얘기고?’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심지어 옵션을 상징하는 이름이 지옥문이었다. 지옥을 다녀올 수라도 있게 된다는 걸까.

부적 아이템의 이름이 인페르누스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연관성이 없는 것은 분명 아니다.

강후가 신의 바람을 처음 인지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오사카에서 위험에 빠진 할머니와 손녀를 구하기 위해 토우시 길드원을 죽이게 됐고.

놈을 죽였을 때, 처음 이런 내용을 봤었다.

【‘신의 바람’과의 계약이 해지되었습니다. 구속이 없는 계약자와 유지될 수 없는 계약입니다.】

즉, 성좌가 강탈되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옅어져 가는 성좌창을 보고는 어떻게든 두 눈에 그 내용을 담았었다.

【신의 바람】

【자폭으로 생을 마감하는 계약자에게 신병(神兵)의 구성원이 될 영광스러운 기회를 부여합니다.】

마치 자폭을 신을 위한 죽음인 양 포장한 내용에서 경악스러움을 느꼈던 강후였다.

당시 ‘신의 바람’은 마왕에 관련된 이슈라고 일차적으로 추리를 했었고.

그렇기에 답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었다. 원작 엔딩은 마왕 강림 직전이었으니까.

마치 단어의 파편, 아주 작은 조각만 보여주는 식으로 신의 바람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기에.

강후로서도 아무리 상상해도 짐작하는 것이 어려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강후에게 썩 도움이 될 것 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흑막처럼 느껴지는 쪽에 가깝다.

일단 신의 바람에 대한 판단은 역시 보류. 이어서 강후가 다음 옵션을 확인했다.

【지옥의 눈 – 정신 제어를 시도하는 시전자에게 지옥의 눈을 볼 수 있게 만듭니다.

시전자의 항마 능력, 정신적 저항 능력에 따라서 백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게 핵심이네.’

일종의 정신 면역 부적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 제어를 시도하는 시전자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히려 카운터를 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구조였다.

아까 강후와 계속 대화를 나눴던 존재가 바로 ‘지옥의 눈’을 지칭하는 듯했다.

지옥문과 지옥의 눈.

스탯 선택 배분과 별개로 이 두 가지 옵션에 부적의 존재 가치와 이유가 담겨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 바람.

도대체 이 녀석은 어떤 존재이기에 가늠할 수 없는 영역 밖에서 나타나고 있는 걸까?

강후가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은 이런 녀석이 장시환에게 붙는 그림이었다.

그렇다면 신의 바람을 내 편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옵션에 표시된 ‘지옥문’을 직접 찾아가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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