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인페르누스 (2)
- 블랙 네트워크에서 유우지에 대한 관심이 엄청 뜨거운 상태야. 아무래도 정상적인 새끼가 아니잖아?
“그렇지.”
- 그러다 보니, 호기심 많은 놈들이 유우지의 뒤를 캐나 봐.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관심이 더 쏠린 거지.
“그래서 몸을 사리고 있다?”
- 응. 관심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것 같아. 형에 대한 감정은 둘째치고, 일단 지명 수배자니까 조심하는 거겠지.
“그럴 거면 일본에나 조용히 있지, 욱해서 입국해 놓고는 은둔이라니. 웃기는 놈이군.”
- 아마 관심이 좀 빠진다 싶으면 바로 움직일 거야. 형도 그러니까 너무 방심하진 말고.
“오늘로 백 번째다. 방심 안 하니까 걱정 마.”
- 형이 그 말을 다시 하게 만드는 게 내 목표야. 적어도 한 번은 상기하게 되잖아?
“이게 게임이었으면 넌 벌써 관계도 수치가 마이너스였을 거다.”
- 아무튼 형, 유우지는 내가 뭐라도 소식 나오면 바로 찔러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걱정 안 해. 그럼 또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일상 연락은 읽씹할 거니까 그리 알고.”
- 아니, 읽씹한다고 꼭 공언할 것까지는…….
“잘 지내고 있어.”
- 응, 형도 잘 지내고!
통화가 끝나고.
강후는 항상 긍정적인 힘이 넘치는 박동재를 보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은 정유리를 볼 때도 한다. 항상 하이 텐션을 유지하며 매사에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다.
‘뜨거운’ 삶은 어떤 걸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기쁜 감정은 어떤 기분일까. 누군가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감정은 또 어떨까?
마치 가 보지 않은 세계를 떠올리는 것처럼 막연했다. 감정의 파고와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누군가를 미치도록 죽이고 싶고, 짓밟고 내리치며, 차갑게 가라앉는 감정은 익숙하다.
이번에 개인 훈련의 시간을 가지면서 이런 성향이 더 강화된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도록 천살노수의 가르침을 받은 바도 있지만, 전부터 그런 경향은 강해지고 있었다.
“후우…….”
강후가 한숨을 토해내며, 푹신한 시트에 몸을 쭉 기댔다.
인페르누스에 관련된 나름의 시련을 겪어내려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딱히 잠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피곤해질 때를 대비해서 미리 잠을 짜낼 생각이었다.
* * *
문형서 덕에 강복화가 있는 부산의 마켓 빌딩 앞까지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문형서는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정유리와 짧은 인사를 하고는 바로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갔다.
K의 허락을 받았다곤 해도, 그리고 K 옆에 황보혜라는 다른 호위무사가 있다고는 해도.
외지에 오래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돌아가는 것이 마음이 편한 모양이었다.
바로 정유리와 단둘이 있게 된 강후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빌딩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그랬었던 것처럼, VVIP 전용 라운지로 곧장 이어지는 루트로 이동했다.
출입객에 적용되는 몇 가지 검증 절차도 정유리 덕분에 하이패스로 바로 통과했다.
“오빠!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지. 그새 엄청 탄 것 같네. 전에는 이렇게 구릿빛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맞아! 하필이면 들어간 던전마다, 죄다 낮에 구름 하나 없는 날씨가 배경이라 그런지…….”
“건강해 보이고 훨씬 좋네. 개인적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하긴 오빠 같은 뱀파이어 타입한테는 상상도 못 할 구릿빛이기는 하지? 흐흣.”
정유리가 긴팔 소매 끝으로 살짝 드러난 강후의 하얀 손목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마치 태닝을 한 것 같은 그녀의 구릿빛 손가락이 바로 앞에 있으니, 색이 더 대비된다.
강후가 지그시 정유리를 쳐다보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성좌 정보가 스캔 됐다.
‘그새 또 하나가 늘었군.’
정유리에게 새 성좌가 붙었다.
전에도 ‘화신’이라는 성좌가 하나 붙어서 강후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도 비슷했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계약자의 깨달음에 따라,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규모와 빈도가 늘어나게 됩니다.】
‘정유리 맞춤 성좌네.’
그녀에게 여러 가지 능력이 있지만, 그중에 활용도가 높은 것은 공간 연결 능력이다.
예전에 일본에서 상대한 적 있는 호사카 켄지나 장시환의 활용 능력과 유사하다.
그런 부분에 특화된 정유리에게 맞춤 성좌가 붙었다는 것은 더 능력이 발전될 것이라는 뜻.
그녀에게 꾸준히 우상향을 그리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해서, 참 보기 좋았다.
강후가 그녀를 따라 계속 걸으며,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부산에 있었던 모양이지?”
“응! 요즘 각 잡고 던전만 계속 돌고 있었어. 이쪽에 아무래도 할머니 인맥이 많으니까.”
“활동하기 편하겠군. 해영 길드와 활동 영역이 겹치지는 않고?”
강후가 해영 길드를 언급한 것은 결국 해영 길드가 정화 길드에 줄이 닿아 있어서다.
그녀는 정화 길드를 싫어하는, 아니 치를 떨 정도로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해영 길드에 대한 시선도 좋을 리 없고, 사실 해영 길드의 질 자체도 많이 떨어진다.
“응, 부산에서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도 활동할 곳은 많아. 할머니 입김이 어디까지 닿는지 알면, 오빠도 깜짝 놀랄걸?”
“그럼 다행이네.”
“오빠처럼 던전 홀릭, 성장 홀릭 할 거야. 오빠의 존재 자체가 엄청 많은 자극이 돼.”
“그런 롤모델이라면 언제든 환영하지.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말고. 오버 페이스 조심해.”
“아, 참! 오빠 이번에 천살노수 할아버지의 제자가 됐다면서? 정말 축하해! 깐깐한 할아버지가 오빠는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렇게 됐다.”
“해미도 만났지?”
“응.”
“해미가 말수는 적지만, 마음은 나보다 더 따뜻한 애야. 많이 챙겨줘. 아픔이 많은 아이라…….”
“그래, 알았다.”
강후의 눈에는 주해미보다 정유리가 더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유리가 타인을 더 신경 쓰는 것은 천성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을 배려하고, 남의 기분을 더 신경 쓰고.
이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누르고 희생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용당하기에 딱 좋고, 자기 잇속 챙기기가 가장 어려운 타입이다.
강후는 지양하려는 케이스지만, 동시에 부럽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게 쉽지는 않으니까.
“천살노수 할아버지도 진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야. 오빠한테는 안 그러지? 다 그거 일부러 아닌 척하는 거야.”
“겉과 속이 참 다른 할배 같다는 생각은 들더군.”
“푸훗! 맞아. 딱 어울려.”
역시 같은 사람을 보고 하는 생각은 ‘같은’ 모양이다.
강후가 정유리와 둘만의 비밀스러운 생각을 공유하는 사이.
어느새 둘은 VVIP 라운지에서 별도로 만들어져 있는 시크릿 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두 남녀가 앞을 지키고 있었고, 정유리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반면 강후에게는 이미 구면임에도 불구하고, 전처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진 않았다.
‘여전하네.’
왼쪽에 있는 남자는 전에도 성좌 정보를 유심히 살핀 적이 있는 헌터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의 성좌와 계약을 한 헌터. 참 흥미가 많이 가는 헌터다.
한편으로는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부류이기도 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정말 방법이 없다.
* * *
안으로 들어서자, 강복화가 환하게 웃으며 강후를 반겼다.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손은 강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칠고 투박했다.
한때는 손을 쓰는 일을 많이 했었나 싶을 정도로, 굳은살이 잔뜩 배겨있는 강복화였다.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요.”
“호호,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무탈하셨다니 다행이에요. 요즘 워낙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걱정이 많아요.”
강복화는 전에도 그랬듯 강후에게 존댓말을 썼다.
철칙이라고 말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손님 모두에게 예의를 깍듯하게 갖추는 것이.
“그래도 주변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몸을 건사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시끄러운 일에 아직까지 휘말리진 않았네요.”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K는 잘 지내던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강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강후가 K가 있는 곳에서 온 손님인 건 맞지만, 자기 남편의 안부를 손님에게 묻다니.
그런 강후의 속내를 읽었는지, 강복화가 호호 웃으며 이유를 덧붙였다.
“제가 자꾸 먼저 연락하고 그러면 그 양반이 확 기세등등해지거든요. 그 꼬라지를 보기가 영 싫어서 말이에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최근에 정화 길드에 관련해서 납품할 물품이 좀 많은 것 같더라고요.”
“하기야. 동두천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 때문이겠죠? 마석 수요도 확 늘었더라고요.”
동두천 전투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더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단기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투가 장기전의 양상을 띠니,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역시 장사꾼들이었다.
강복화도 그중에 하나.
이미 강후는 들어오는 길에 대량으로 입고되는 마석을 봤다. 무려 열 트럭 이상 분량이었다.
“어쨌든 별일 없으십니다.”
“참, 유족분들은 이제 곧 도착하실 거예요. 마침 시간에 딱 맞춰서 오셨네요. 타이밍이 좋아요.”
그때, 노크와 함께 강복화의 허락을 받은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유족에 관련해서 소식을 전하려고 온 사람인 듯한데, 왠지 낯이 익었다.
남자 역시 강후를 보고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면인 것은 둘째치고 여기서 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내 시선을 돌린 그는 강복화에게 보고를 했다.
“유족분들이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외부 노출을 원치 않으시기에 지하 8층 루트를 활용해서 내부 이동 중입니다.”
“고생했어요, 선태 씨.”
“3분 내로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그럼.”
남자가 바로 자리를 떴다.
중간에 강후에게 아는 척을 할 법도 했지만, 자리의 중함을 알기 때문인지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백선태였군. 이제 기억났다.’
전에 여수 군벌 ‘자강’을 찾아갔을 때, 자신을 따라와 던전 안에서 감시역을 했던 백선태.
그가 강복화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딱히 소식에 관심도 없었고, 알아볼 길도 없어서 잊고 지냈는데.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났다.
이후 과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강복화가 직접 유족에게 강후가 어떤 경력을 가진 헌터인지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고.
유족들은 앞서 부적 ‘인페르누스’와 접촉했던 헌터들이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 들려주었다.
하나 같이 전부 미쳤다는 것이다. 부적이 귀속될 ‘주인’을 못 찾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리고 다시 이 부적이 어떤 형태인지를 짚어 주었다.
일단 부적의 시험을 통과한 헌터는 부적이 그 헌터를 주인으로 인정하게 되며.
주인이 죽기 전까지는 절대 귀속이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예전의 부적 주인도, 죽기 전까지는 아무리 귀속을 해제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강후는 강복화의 입회 아래, 곧바로 유족에게 돈을 입금해 주었고 귀속 절차 밟기에 들어갔다.
주변의 걱정이나 기대에 휘말리지 않도록, 강후는 준비되자마자 곧바로 부적을 집었다.
기다린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어차피 준비는 사전에 다 끝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인페르누스의 기운에 몸과 모든 정신이 휘말려 들어가는 느낌에 빠지는 순간!
- 불청객이 왔군.
강후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흑암 배경 한가운데에서, 붉게 이글거리는 개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지옥의 불길에서나 볼법한, 아주 거대하고도 살아 움직이는 외눈이었다.
새로운 주인, 혹은 그럴듯한 희생양을 찾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불쾌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