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사과 (4)
* * *
돌아갔던 입이 자연스럽게 원래대로 돌아온 것은 강후가 별장으로 돌아와 식사를 시작한 후였다.
천살노수를 따라 돌아온 별장에는 따뜻한 밥과 고기반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딱히 뭔가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컵라면이나 하나 먹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내 딸이 열심히 준비한 거다. 맛있게 먹어라. 표정이 조금이라도 안 좋을 시에는…….”
천살노수가 강후를 식탁으로 툭 밀며, 찌릿한 눈빛을 날렸다. 무섭다기보다 익살스런 눈빛이다.
“드세요.”
주해미는 강후에게 방금 막 따라 둔 시원한 물컵까지 세팅해 주고는 자리를 떴다.
강후가 물었다.
“스승님은 드셨습니까? 제가 먹어도 되는 겁니까?”
“너 먹으라고 차린 거다, 이놈아. 네가 입 돌아갈 만큼 자는 동안 우리는 진즉에 먹었지.”
천살노수의 말에 개수대 방향을 보니, 세척이 끝난 그릇과 컵들이 보였다. 시간이 꽤 흐른 모양.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야지. 감사해야지.”
서슬 퍼런 천살노수의 눈빛을 뒤로한 채, 강후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흰쌀밥을 한 숟갈 떠먹었다.
‘맛있다.’
고된 훈련 후에 먹는 밥이라 그런지, 밥만 먹었는데도 입안에 침이 돌았다.
주해미가 구워 둔 고기 역시, 간이 딱 맞아서 너무 좋았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 보는 집밥인가 싶었다.
신강후의 몸으로 빙의한 후에는 집밥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원작자의 삶을 살았을 때도 강후의 주식은 인스턴트 음식이나 배달 음식이었다.
가끔 즉석 조리밥이나 돌려먹으면, 그게 유사 집밥인 셈. 그나마 자주 먹지도 않았다.
“스승님. 진짜 맛있습니다.”
“정말이냐?”
“예. 제가 빈말은 못 합니다.”
“허허. 그렇단 말이지.”
맛있다는 반응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천살노수가 아예 강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갑자기 천살노수가 매섭게 눈빛을 부라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으니,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가 편하게 먹으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이글거리는 눈빛을 앞에 두고 편히 먹을 수 있을 리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배가 고팠기에 강후가 다시 밥 한 숟가락을 크게 퍼서는 입에 넣었다.
지금은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너무 맛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천살노수는 한참 동안 강후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충분히 밥그릇을 비우고 난 후에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강후야.”
“네, 스승님.”
“네 독기는 학습된, 연출된 독기다. 그래선 안 돼. 내면에서 끌어 오르는 독기가 필요하다.”
“…….”
자신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천살노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학습된, 연출된 독기. 그의 눈에는 보였던 걸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신강후라는 인물의 삶에 빙의하면서 덧씌워지고, 동기화된 성격이기 때문이다.
태생으로 타고난 순도 100% 독기가 아니었다. 신강후라는 존재로 ‘연출’된 독기이기도 한 것.
물론 강후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너의 완벽한 본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98%의 모습은 신강후 그 자체일지라도, 2%의 모습에는 원작자의 삶이 녹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강후로 하여금 검은 경계가 아니라, 회색 경계에서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그래서 선악의 경계선이 모호한 그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네게 있어서 ‘암살(暗殺)’의 암보다, 살을 더욱 강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게 너를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거다.”
“예, 스승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감정에 충실하면 좋겠다. 원수, 복수, 분노, 증오 등등. 너를 쉽게 자극할 수 있는 감정은 많다. 단, 그 감정에 매몰되서는 안 되겠지.”
강후는 천살노수의 말을 일단은 이렇게 이해했다.
상대를 실험, 측정 대상으로 보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찢어 죽이려고 해야 한다고.
천살노수가 말을 덧붙였다.
“허공을 가르더라도 살기를 담고. 어설픈 실험 따위는 집어치워라.”
“예, 다시 새기겠습니다.”
“네 감정의 달라짐을 인지하기 전까지 추가 훈련은 없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그럼 쉬어라. 설거지는 해 놓고 올라가고. 우리는 각자 먹은 것은 각자가 치우는 주의라서 말이다.”
“스승님이 드신 것도 스승님이 설거지하십니까?”
“내 앞가림은 내가 하는 거지.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군. 한심한 놈.”
졸지에 한심한 놈이 된 강후를 뒤로 한 채, 천살노수가 혀를 끌끌 차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다시 조용해진 식탁.
강후가 어느새 비워 버린 밥공기를 보고는 처음으로, 해 본 적 없는 말을 꺼냈다.
“한 공기 더 먹어야겠다.”
주해미의 밥은 정말 최고였다.
* * *
늦은 밤.
자신의 방에서 푹 쉬고 있는 강후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문명과 제법 떨어진 곳이라 밤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런 탓에 진동이 꽤 크게 들렸다.
발신자는 전세혁이었다.
“네, 신강후입니다.”
- 청명 수용소 내부에 믿을 만한 사람을 포섭해 뒀습니다.
강후가 미사여구를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전세혁은 본론부터 말했다.
청명 수용소는 현재 강후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로 마침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 현재 이클립스가 청주 해방구 쪽에 온통 관심이 팔려있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아뇨, 모릅니다.”
어렴풋이 아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모르는 정보였다.
청주에 해방구가 있긴 하다. 규모도 김천 해방구만큼 큰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청주 해방구는 이미 범죄 조직 ‘블랙’이 꽉 잡고 있기에 분쟁 요소가 없었다.
기반을 공고히 다진 조직이 있는데, 그런 곳에 이클립스가 갑자기 들이받는다고?
- 꽤 오래전부터 이클립스에서 청주 해방구를 먹으려고 공을 들인 모양입니다.
저희처럼 내부에 믿을 만한 사람을 포섭한 거죠. 그리고 어제, 블랙의 대장이 죽었습니다.
“대장 말입니까?”
- 네, 대장 박민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클립스의 비호를 받는 세력들이 장악을 마쳤죠.
“그렇다면 이클립스 자체에서도 인원을 꽤 움직였을 듯한데요.”
- 맞습니다. 경기 남부권과 천안 쪽에 머물던 조직원들을 전부 뺀 모양입니다.
완전하게 장악된 것까지는 아니어서, 해방구 안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와중에 해방구 하나를 먹는다라…….”
- 평택 지부를 잃고 나서, 줄줄이 세력이 쪼그라드는 것이 느껴지니까 승부수를 던진 거겠죠.
“그런 것 같네요. 강동현 입장에서는 내부 불만을 해소시킬 이슈가 필요했을 거고요.”
- 네. 그런 이유로 지금 이클립스의 관심은 물론이고, 전력 집중도 청주 해방구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청명 수용소의 내부 인력도 제법 빠져나갔겠는데요.”
- 그래도 드러나지 않게 머릿수는 맞춰놨습니다만, 간수들의 질이 달라졌죠. 전력도 약화 됐고.
“음…….”
전세혁의 말대로라면 지금만큼 청명 수용소를 도모할 적기는 없었다.
이클립스가 다른 쪽으로 정신이 팔려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지금까지 청명 수용소는 한 번도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이 없다.
그만큼 이클립스의 세력이 강했고, 그들과 척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많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잠시 끊긴 강후의 말에서 그 의미를 깨달았는지, 전세혁이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 청안 용병단과 흑사자가 이미 움직일 준비를 마쳤습니다.
물론 제가 이 말을 강후 님에게 드리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저희와 같이 움직이자는 것이 아니라.
단독 행동을 해도 무방하니,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미리 인지하시라는 뜻에서입니다.
“배려를 해 주신 거군요.”
- 그렇게 해석해 주신다면야 감사하죠. 아주 만약의 일입니다만.
만약 강후 님께서 현재 수용소장인 조환성을 제거한다면…….
“제거한다면?”
- 수용소를 접수하고, 마석 광산에 대한 소유권을 저희 연합이 확보할 시, 순수익에 대한 8% 분배를 보장하지요.
“그럴듯한 제안이면서 외줄 타는 느낌도 드는 제안이네요.”
- 무리하시길 바라진 않습니다. 하하하.
청명 수용소장 조환성.
이클립스 내부 서열 7위다.
양날 도끼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실력자로 외형만 놓고 보면 전종두, 마진호 과에 속한다.
일전에 죽은 고경호가 서열 8위였으니, 그보다 훨씬 강한 헌터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조환성.
충분히 도모할 상대이긴 하다.
고경호를 상대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도 사실이고.
조환성과 같은 괴력형 캐릭터는 강후 나름대로 상대할 방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청명 수용소에서의 마석 채굴 순수익은 일 10억 원 정도.
30일을 한 달로 잡으면 300억 원이 되고, 그중 8%를 보장하면 월 24억 원이 된다.
결코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강후는 돈보다 더 큰 것을 욕심내고 싶었다.
사실 24억 원은 강후가 벌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몇 시간에 벌 수 있는 돈이기도 하다.
“역제안을 하고 싶은데요.”
- 들어볼까요?
“수익 보장은 4%로 줄이죠.”
- 음?
“대신 청명 수용소를 연합이 확실히 장악하면, 내부에 있는 모든 던전을 한 번은 꼭 공략하게 해주십시오.”
- 영구적인 라이센스 획득을 원하시는 겁니까?
“아뇨. 한 번씩만 다 공략해 볼 수 있으면 됩니다.”
청명 수용소 안에는 총 일곱 개의 던전이 있다.
난이도는 권장 레벨 100 이하의 쉬운 던전에서, 레벨 500 이상의 어려운 던전까지 다양하다.
강후가 노리는 것은 그 던전의 미들, 메인 보스 몬스터를 죽이고 강탈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한 곳에 두 녀석만 잡아도, 총 열네 개의 스킬을 강탈할 수 있다. 확정적으로 말이다.
- 그게 전부이신 겁니까?
“네. 당연히 구두 약속이 아닌, 성문화가 필요하겠지만요. 보장된다면 수익은 반도 상관없습니다.”
- 다만 전제…….
“아, 알고 있습니다. 조환성을 제가 직접 죽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조환성과 싸움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사실 만나 봐야 알게 될 문제다. 미리 승패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강후가 자신 있게 조환성과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있었다.
강후만큼 청명 수용소 내부 구조에 정통한 사람이 없어서다.
원작의 ‘빌런’이었던 신강후에게 청명 수용소는 악의 요람이자 모태였다.
그만큼 원작자로서 공들여 만든 무대이기에, 내부에 있는 모든 비밀 공간과 통로를 알고 있었다.
탈출해야 하는 위치에서는 이용할 수 있는 루트가 한정적일 수도 있지만.
공격자 즉, 침투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루트가 정말 많았다.
아마 청명 수용소 내의 간부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공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수용소 전체가 손바닥 위에 있는 상황. 침투 정도는 당연히 자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