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사과 (3)
천살노수는 묵묵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강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더 이어 나갔다.
그는 강후의 표정에서 이미 읽고 있었다.
강후가 아무 말도 않고 얘기를 듣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을.
“암살자에게 중간은 없다. 손해를 최소화해야 할 때도 있지만, 필요할 때는 말도 안 되는 손해를 볼 것 같은! 그런 한 방을 꺼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예, 스승님.”
“내 말 안 끝났다. 넌 그런 선택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의 너는, 내 거는 주기 싫고, 남의 것은 갖고 싶어 하는. 딱 그런 어린아이 같았다. 알겠느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 반박할 수 있는 내용도 없었다.
그간 자신에게 이런 조언을 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부 칭찬하기 바빴다.
그럴 만한 실력이 있어서겠지만, 칭찬 일색의 반응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을 느슨해지게 했다.
천살노수가 자신의 몸을 에워싸고 있던 알을 깨주니, 그 밖의 세상이 확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더 내려놔야 하는 것 같다.’
혼자 다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 그리고 내가 위험해선 안 된다는 생각.
강후는 그런 생각이 자신을 위축되게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그간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정말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닌 거다. 묻혔을 뿐이다.
천살노수가 아직 강후에게 해 줄 피드백이 남았는지, 다시금 말을 덧붙였다.
“본질은 적을 무너뜨리는 거다. 너는 사과를 먹으려는 나만 봤다. 강후야. 암살자에게 다른 고려는 필요가 없다. 상대를 무너뜨리면, 다른 것은 알아서 무너지는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오늘 사과는 네게 독 사과였던 듯하다. 해독은 해미에게서 하거라. 난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예.”
“그리고 해미에게서 해독이 끝나면. 지쳐 잠들 때까지 훈련장에서 뛰거라. 지치지 않거나, 잠들지도 않았다면 날 찾아올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알겠느냐? 그럼 간다.”
천살노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장으로 향했다.
강후에게 남겨 준 과제는 간단했다.
주해미와의 추가 훈련이 끝나고 나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훈련장을 뛰고 또 뛰라는 것.
강후는 그것이 최대한 잡생각을 비우고, 몸의 힘듦에만 집중하라는 메시지임을 읽었다.
읽기는 했는데…… 고생길이 훤히 벌어질 미래를 미리 보고 있으니 죽을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천살노수의 가르침과 지시에 토를 단다거나, 의문을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시키면 할 뿐이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 * *
아까까지만 해도 주해미의 곁에 있는 K가 얼핏 보였었는데.
강후가 주해미에게 향할 무렵에는 이미 K는 떠나고 없었다. 잠깐 와서 둘러보다가 떠난 모양.
강후가 지친 몸으로 터덜터덜 걸어오자, 주해미가 갖고 있던 막대 사탕 하나를 강후에게 던졌다.
“다 먹으면 시작할게요.”
강후는 잠깐, 막대 사탕을 빨아 먹을까, 깨물어 먹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선택은 빨아먹는 것.
앞서 사과 훈련으로 지칠 대로 지친 만큼, 사탕을 먹는 동안에는 좀 쉬고 싶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구역감까지 있는 탓에, 사탕을 깨물어 씹고 삼켰다가는 정말 토할 것 같았다.
강후가 사탕을 빨아 먹는 동안.
“…….”
주해미는 별장으로 향하는 천살노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를 따라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사과에 모든 정신이 팔린 탓에 먹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에만 너무 골몰해 있었어.’
강후는 천살노수와의 훈련을 복기하며, 다시 그의 말을 하나하나 상황에 맞게 떠올렸다.
되짚어보면, 견제에 정신이 잔뜩 팔려 있던 것은 맞았다.
사실 그의 말대로 천살노수, 그 자체만 봤으면 됐다.
그를 무너뜨리면 사과를 먹기는커녕, 제대로 들고 있기조차 힘들어질 테니까.
하지만 사과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팔려서, 다른 노림수를 쉽게 가져가지 못했다.
아마 생각의 폭이 좁아진 데에는 ‘5분’이라는 형태로 주어진 시간제한도 한몫했겠지.
한편, 사탕의 단맛이 들어가니, 뇌도 빨리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사과에 너무 많은 생각을 뒀던 것이 맞았다. 그게 치명적인 패착이 됐다.
강후는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사실이 ‘본질’인지 파악하는 것을 확실히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이번 훈련처럼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날 테니까.
그렇게 강후가 아끼고 아껴먹은 사탕을 기어이 입에 다 털어 넣고 난 순간.
주해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강후의 앞에 서서는 자신의 오른팔에 줄 하나를 묶었다.
그리고 줄 끝에는 동물 중 하나인 ‘비버’를 캐릭터화해서 만든 핑크색 인형을 걸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주해미를 보니, 예상했던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이 인형을 가져가면 돼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네. 그게 아버지가 말씀한 첫 번째 ‘해독’이에요.”
“그렇다면!”
【납치】
강후가 바로 그녀를 향해 납치를 썼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다.
애초에 실패를 생각하고 쓴 스킬이었다. 그녀의 대응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해미에 대해선 그녀가 바람을 다루는 것을 아는 것만이 정보의 전부였다. 다른 정보가 없었다.
파팟!
납치를 피하면서 그녀가 백 텀블링을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뒤로 빠지는 동작으로 봤지만.
파아앙!
그 과정에서 다리를 차올릴 때마다 강후를 향해 강풍이 날아들었다.
살상력을 상당히 덜어낸 강풍인 듯하나, 문제는 그 강풍으로 강후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나 버렸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된 공격 의사가 있었다면 이 정도의 강풍에 몸을 할퀴는 공격까지 있었을 거란 얘기다.
그때.
“……?”
가속과 도약 스킬을 쓰며, 주해미를 쫓으려던 강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킬 시전이 막힌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디버프 상태창을 보니, 디버프가 하나도 아닌 세 개가 걸려 있었다.
【가속 불가】
【도약 불가】
【공간 이동 불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일종의 디버프 스킬이면서 동시에 공격과 견제까지 다 되는, 지랄 맞은 스킬이었다.
세 가지 형태의 스킬이 모조리 막히니, 강후 입장에서 접근하는 데에 스킬을 활용할 수가 없었다.
즉, 두 다리를 움직여 직접 이동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로 느껴졌다.
그때.
‘아냐. 아니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트인 강후가 곧바로 스킬 하나를 전방으로 전개했다.
【분신술】
분신을 세웠다.
그러자 주해미가 계속 만들어 내는 바람이 강후가 아닌 분신에 막히면서 잠깐, 바람에 닿지 않았다.
그 순간에 강후에게 걸려 있던 세 가지 디버프가 전부 풀렸고.
강후가 그림자 걸음으로 바람의 영향권을 빠져나오며, 기교의 장막에 은신과 무영을 연계했다.
기척을 지우고 사라진 강후.
백 텀블링을 멈추고 제자리에 선 주해미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주해미는 강후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 자신이 있었다.
타앗!
이내 그녀가 오른 다리를 머리 위까지 쭉 들어 올렸다가, 힘껏 지면을 내리쳤다.
그러자 낙엽과 흙이 뒤섞여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동시에 양손을 휘저으며 회오리를 일으킨 주해미가 그것들을 부채꼴 모양으로 흩뿌렸다.
어떤 형태의 공격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후는 앞으로 움직이면서 몸을 최대한 낮췄다.
일단 움직임의 전제에 ‘전진’을 무조건 넣었다.
무결의 벽 등을 활용해서 그녀의 공격을 막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방어적인, 안정적인 그림을 추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천살노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강후는 패턴을 완전히 다르게 가져갔다.
프스스슷!
거의 지면에 엎어져 가는 수준의 기동이지만, 추진력이 있다 보니 고꾸라지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무게 중심이 낮아져도, 얼굴과 몸통 앞쪽이 갈려 나가기에 딱 좋은 형태.
하지만 노림수는 통했고, 주해미는 강후가 바로 앞까지 접근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잡는다!’
강후가 손을 뻗어 주해미의 팔을 따라 늘어뜨려져 있는 인형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콰아아앗!
주해미가 강후의 접근을 인지하고는 바람을 수직 아래 방향으로 일으키며 훌쩍 날아올랐다.
“…….”
바람을 추진력 삼아서, 마치 로켓 추진하듯이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른 것이다.
상승했다면 하강이 있는 법.
강후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이내 돌아올 그녀를 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콰앙! 카앙!
공중에서 바람을 일으킨 그녀의 몸은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고.
원활하게 착지하는 위치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훈련이 길어질 듯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파악했다. 디버프 바람을 파훼하는 방법. 분신을 세우면 해결됐다.
강후가 눈빛을 반짝였다.
가장 큰 문젯거리에 대한 대처법을 얻었으니, 남은 것은 적극적인 공세. 다른 고려는 필요 없다.
* * *
시간이 흐른 뒤.
강후는 기어이 주해미의 인형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짧게 훈련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후우. 하아. 후우.”
강후가 반쯤 탈진하다시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앞서 천살노수와의 사과 훈련으로 피로가 누적되서 그런지, 몸이 느끼는 부하가 훨씬 더 컸다.
게다가 한 차례도 매드 솔라키움을 먹지 않은 만큼, 두통이 만성적인 수준으로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고생했어요. 고맙습니다.”
주해미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것이 아버지 천살노수에게 부지런히 가는 느낌이었다.
순간 강후도 별장에 가서 쉴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내 천살노수의 말이 떠올라 접었다.
- 지쳐 잠들 때까지 훈련장에서 뛰거라.
“하…….”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오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거의 자석 수준으로 지면에 달라붙은 다리와 몸을 강후가 억지로 떼어냈다.
휴식은 달콤한 유혹과 같아서, 일단 꼬임에 넘어가면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몸이 휴식에 적응하기 전에 다시 굴릴 생각이었다. 그래야 게을러지지 않는다.
“후우. 하아. 후우. 하아.”
강후가 호흡을 고르며, 훈련장 외곽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나무숲에 거의 닿을 정도로, 훈련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래야 한 바퀴를 뛰어도 더 먼 거리를 뛸 수 있고, 잡념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듯해서다.
뛰고, 뛰고, 또 뛰었다.
몸이 점점 피로감에 잠식당하기 시작하니, 역설적으로 정신이 맑게 트였다.
“뭔가 내면에서 내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던 무의식이 뻥 뚫리는 느낌이야.”
몸 상태만 보면 지옥이 따로 없는 훈련.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얻어간 것이 너무 많은 훈련이었다.
한 가지 사실만 깨달았을 뿐인데, 상황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계산법이 달라졌다.
이것이 천살노수가 원했던 그림일까? 그것은 또 다음의 훈련을 해 봐야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간 스스로는 절대 경험할 수 없었던 무의식의 벽을 뚫고 깨버린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열심히 뛰었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나왔지만, 그것조차 훈련이 남겨 준 훈장처럼 느껴져 행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아니,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 이 녀석아! 입 돌아간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훈련장에 엎어져 잠들어 있던 강후를 천살노수가 흔들어 깨웠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앞만 보면서 뛰고 있었던 자신.
하지만 지금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하늘을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었던 것처럼, 시간은 훌쩍 몇 시간을 흘러가 있었다.
그리고.
“서…… 서성님.”
“뭐? 이놈, 진짜 입 돌아갔네.”
정말 입이 돌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