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사과 (2)
- 지금의 너는 공수를 모두 커버하려다 보니, 창이 상대적으로 무뎌졌다. 아마 모를 것이다.
- 나는 한 번 막고 한 번 찌르는 것보다, 두 번을 찌르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다. 그 부분에 중점을 잡고 널 가르칠 것이다.
이 말이 떠올랐다.
‘지금 내 스킬은 전부 회피 기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험으로 깔고 있어. 리스크를 줄이면서 노림수를 특화하는 이기적인 구성.’
되돌아본 자신의 스킬 활용법이었다. 분명 리스크가 적은 대응법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상대에게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사과 훈련처럼 전부 상대의 손에 놀아나기 좋은, 막히기 딱 좋은 방식인 것이다.
천살노수가 경계했던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무뎌진 창은 자기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심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더 적극적으로.’
틀을 깨야 한다.
한 번에 바로 깨질리야 없겠지만, 강후는 나름의 답을 내고 적극적인 기동을 시작했다.
【가속】
【도약】
가장 기본적이지만 그렇기에 간단한 접근법. 가속과 도약의 연계로 천살노수에게 접근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기공포】
파앙!
천살노수의 움직임을 견제할 목적으로 기공포를 거칠게 날렸다. 공세적인 활용이었다.
“오호.”
천살노수의 추임새가 자신의 선택을 반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강후가 더 힘을 실었다.
【화룡창】
천살노수는 분명 기공포를 쳐내려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화룡창을 시간 차이를 두고 날렸을 경우, 그의 움직임을 추가로 억제할 수 있을 터다.
타앗!
뒤로 물러서던 천살노수가 손을 휘저어 기공포를 쳐냈다.
기감을 다루다 보니, 같은 부류의 기공포를 쳐내는 것이 고무공을 쳐내는 것만큼 쉬워 보였다.
다만 이어서 날아든 화룡창을 피하느라 훌쩍 뒤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고.
그 바람에 처음으로 사과를 먹지 못했다. 강후는 최대한 빠르게 천살노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래야지!”
천살노수에게서 긍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왔다.
강후를 자극하는 도발이 아닌, 그가 원했던 대로 강후가 움직인 것에 대한 칭찬이었다.
노림수가 제대로 먹힌 걸까?
강후의 위치가 천살노수와 두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까지 닿았다.
마음먹으면 사과를 들고 있는 천살노수의 손을 칠 수도 있는 위치.
스륵.
강후가 자기도 모르게 단검을 역수로 고쳐 쥐곤, 천살노수의 손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 순간.
천살노수가 세상 한심한 표정으로 강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노리면서 들어오는 강후의 손을 탁 잡아서는, 뒤로 잡아끌었다.
동시에 반대쪽 손에 자신이 들고 있던 단검을 이용해 강후의 팔뚝을 긋고 지나갔다.
푸슛!
피가 튀었다.
제자의 피 한 줄기를 얼굴에 뒤집어쓴 천살노수가 사과 한 입을 또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균형을 잃은 강후의 몸을 힘껏 발길질로 걷어차고는.
입에 물고 있던 사과 조각을 손에 쥐어서는, 강후를 향해 전력으로 내던졌다.
퍽!
그 바람에 비틀거리며 천살노수의 뒤로 끌어당겨 졌던 강후의 얼굴에 사과 조각이 작렬했다.
“내가 언제 너한테 쓸데없는 자비나 베풀라고 했더냐? 물러터졌구나. 내가 이런 놈을 제자로 받을 생각을 했다니. 당장 중국으로 돌아가야겠다. 누굴 탓하겠느냐? 널 선택한 내가 병신이지.”
그 순간, 강후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화가 났다의 개념이 아니라, 그 순간만큼은 정말 천살노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분노였다.
물론 이내 이성을 되찾았지만, 그가 남긴 말은 아프게 가슴을 후벼팠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오만했다. 대체 누가 누구를 봐준단 말인가? 무의식이건 아니건 간에 감정의 사치를 부렸다.
“지혈할 시간은 주마. 이제 한 입 남았다.”
터업. 터업. 터업.
천살노수가 단 한 입이면 뼈대만 남을 사과를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강후가 손수건을 꺼내서는 단검으로 쭉 찢어 최대한 길게 만들었다. 지혈을 위해서다.
천살노수의 말이 이어 들렸다.
“네 공격을 내가 위협으로 느낄 정도였다면 애초에 스승이 되겠다고 생각도 안 했다. 나는 지금 네 적이다. 공경이나 해 주면서 싸울 노인네가 아니란 말이다.”
“…….”
“생각이 글러 먹었다. 이게 무슨 소설이나 영화인 줄 아느냐? 현실이다. 내 나약한 감정 한 번으로 죽을 수 있는 현실 말이다. 정신 차려라, 이 녀석아!”
귓전을 파고드는 천살노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깊은 울림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X발.”
그래서일까.
스승에게 칭찬은커녕, 실망만 잔뜩 안겨줄 수밖에 없는 스스로에게 욕이 나왔다.
세상이나 적을 향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향해 진심으로 욕을 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 * *
한편.
현장을 줄곧 지켜보고 있던 주해미는 강후가 지혈을 마치고 다시 도전을 시작한 후.
그에게 바짝 독기가 오른 것은 물론, 내면의 ‘감정’이 자극받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해미의 눈에는 보였기 때문이다. 무채색으로 느껴졌던 강후에게 검은빛이 덧씌워져 있었다.
그것은 감정의 색깔이었다.
색깔이 꼭 감정의 특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지금의 강후는 감정적이면서 차분했다.
역설적인 감정이 공존한다는 것은 그만큼 감정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잘 받아들이기도 했다는 뜻.
그래선지 보통 천살노수의 ‘사과 훈련’은 1분 정도면 끝이 나기 마련인데.
어느덧 2분이 흐른 상황이었다.
중간에 동작을 멈추고, 말을 하며 상대에게 시간을 주는 것도 다 훈련에 있는 똑같은 과정이었다.
내면의 감정을 끌어올릴 시간을 주는 것인데, 그것을 1분을 버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나마 천살노수와 밥 먹듯이 사과 훈련을 하는 주해미쯤 되어야 2분을 넘기는 상황.
한데 강후가 첫 훈련에 벌써 그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천살노수에게 붙어서는 절대 떨어지지 않았고.
설령 견제를 받고 뒤로 물러나게 되더라도, 그림자 걸음으로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심지어 무결의 벽을 들어서 세운 채로, 천살노수를 그대로 들이박아 버리기도 했다.
마치 방패로 적을 밀쳐내고 찍어누르듯이, 천살노수에게도 비슷한 그림을 연출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예리해. 저건 후천적으로 학습됐다기보다, 태생적으로 내재된 공격성 같아.’
마음먹고 공세적으로 임하자 제대로 진가를 발휘하는 강후를 보며 주해미는 놀라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허명이나 잔뜩 얻은, 기교나 화려하게 부릴 줄 아는 암살자가 아닐까 했었다.
훈련 전에 강후에게 조언을 했을 때도, 그가 대단하다 여겼기에 조언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눈에 들지 못하면, 너 같은 암살자는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한 것이다.
‘충분히 아버지가 욕심낼 만한 실력을 가졌어. 레벨에 맞지 않는 스킬과 실력은 더욱 그렇고.’
그녀는 나름의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한데 갑자기, 주르륵, 하고 눈가를 따라 눈물이 흘렀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가와 웃으면서 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흘렀다.
주해미의 눈에는 분명 보였다.
실시간으로 성장과 변화를 거듭하는 강후를 보면서 너무 뿌듯해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계속 독한 말로 강후를 자극하고, 마음에도 없는 조롱을 하면서 강후의 감정을 휘둘렀지만.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계산된 행동임을 아는 주해미로서는 속마음이 들여다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 같았다.
제자와 함께 호흡하고 땀 흘리는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순수한 아이!
그때.
뒤에서 조용히 나타난 K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울 수 있을 때 혼자 울어두렴. 아버지 앞에서 애먼 모습 보이지 말고.”
“……네.”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할 것 없다. 네가 결론 지을 이유가 없다는 거야. 형님은 강건하게 버티실 거다. 그 이면에 있을 두려움을 억지로 찾아내어서 보려고 하지 말라는 거야.”
“죄송해요, 아저씨.”
“죄송은 무슨. 이럴 때는 꼭 내가 예전에 심장 수술하러 들어갈 때의 유리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플 따름이지.”
K는 한때 사경을 헤맸던 자신의 심장 수술을 떠올리며 주해미를 달랬다.
그때, 정유리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펑펑 울어댔었다.
할아버지가 죽으면 같이 따라 죽을 거라고도 했었다나. 강복화에게 전해 들은 말이었다.
K가 화제를 돌렸다.
“강후 청년. 어때 보이냐?”
“확실히 제가 그간 생각해 왔던 암살자와 결이 다른 사람 같아요. 물론 아버지의 눈에 차려면 멀었지만요.”
“맞아. 다듬어지지 않은, 하지만 누가 봐도 확실한 원석이지. 다듬기만 하면 된다고 본다.”
주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 강후가 레벨이 낮아,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더 큰 것을 높게 보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강하지만.
여기서 레벨이 높아지면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이라는 뜻이니까.
바로 그때.
“끝났다, 이놈아!”
천살노수의 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세상 다 잃은 것처럼 무릎을 꿇는 강후의 모습이 보였다.
“2분 30초…….”
첫 사과 훈련에서 주해미의 최대 스코어와 동점을 이룬 강후.
그녀 내면의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확실히 물건은 물건이었다.
* * *
“하악. 하악. 하악.”
강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매드 솔라키움을 안 먹고 전력으로 싸운 탓인지 두통이 미칠 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막판에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서 스킬을 쓴 탓에 단기간에 엄청난 양의 마력을 소모해 버렸고.
그런 이유로 몸이 당장 죽을 것처럼 아우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구역감도 같이 밀려 올라왔다.
“크으으……!”
결국 5분을 버티지 못했다는 생각에 강후가 분노하며, 낙엽 쌓인 지면을 내리쳤다.
그러자 천살노수가 방금까지와는 다른, 온화해진 어조로 강후에게 말했다.
“간만에 오래 버티는 녀석을 만났구나. 개인적으로 첫술에 조금은 배불렀다고 생각한다.”
“……겨우 반을 달성했을 뿐입니다. 실패했잖습니까.”
“마지막 10초 구간은 정말 좋았다. 체력과 마력의 고갈을 감지하고 전력을 다한 거겠지?”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계속 강조했던 것은 매 순간이 절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우…….”
스승의 말에 무어라 답을 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호흡에 한숨이 먼저 나왔다.
천살노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원초적인 살의를 끌어내라. 기계처럼 분쇄하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말이다.”
“원초적인 살의.”
“그래. 네 장점이자 단점은 체계적이면서 계산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무결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2분 20초까지의 너는 분명 다 내려놨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겠지만, 절대 아니다. 내 기준으로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다.”
“…….”
“그렇게 임하면 나처럼 네 머리 위에서 노는 적을 상대로는 영원히 이기지 못한다. 단언하지. 철저하게 유린당하다 죽을 것이다.”
천살노수의 말에 강후의 머릿속에서 번뜩, 하고 떠오른 것은 역시 장시환의 존재였다.
그리고 천살노수의 말은 강후가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장시환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다가 죽는 최후.
원작에서 이미 경험한, 그래서 절대 반복하고 싶지 않은 운명의 변곡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