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사과 (1)
* * *
메일을 읽는 내내, 유도훈은 이 사람의 정체가 궁금하다 못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마치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전부 읽고 있었다.
현재 서울 헌터 치안청의 원투쓰리라고 불리는 인물들.
헌터 치안청장 강효태. 부치안청장 봉성필. 그리고 서울 본부장 안격호.
유도훈은 분명 그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심을 잃은 치안청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그들부터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한 세력에 치우치지 않고, 그저 민중의 든든한 동반자, 수호자가 되어줄 치안청.
유도훈은 그런 치안청을 바라고 있었다.
오늘처럼 은밀히, 치안청에 보고되지 않은 던전 공략을 하면서 힘을 키우고 있는 것도.
언젠가 이 썩어 문드러진 치안청을 뒤집어엎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치안청의 물갈이뿐 아니라, 치안청을 이렇게 만든 뒷배도 같이 날리는 게 맞았다.
바로 장시환과 채관형을 위시한 정화 길드의 간부들이다.
유도훈의 눈에 그들은 적폐 세력이었다.
치안청을 입맛에 맞게 이용하기만 하고, 오히려 치안청의 네트워크를 각종 범죄에 이용했다.
최근에 헌터그램에 돌고 있는 헌터 인신매매 썰은 썰이 아니었다. 명백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치안청이 대응팀까지 만들어서 정화 길드의 악행을 묻어 주고 있는 탓에…….
썰의 수준에서 철저하게 억눌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진즉 진실로 까발려졌어야 했다.
- 치안청의 틀 안에서 찻잔 속의 태풍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말고.
딱 한 번만,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밖을 보세요. 누가 지금 치안청에 가장 크리티컬한 한 방을 먹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심연? 설마 범죄자들의 온상인 심연과 손을 잡으라고……?’
메일의 뉘앙스는 분명히 심연을 가리키고 있었다.
치안청의 위협은 곧 정화 길드의 위협이고, 정화 길드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심연이니까.
처음에는 유도훈도 자신도 모르게 심연을 범죄자들의 온상이라는 단어로 치환해서 생각해버렸다.
이것은 철저하게 세뇌된 정보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악당이라고 하니 악당이 되어 버린 케이스라면 맞을까?
예전에 유도훈이 내사(內査)한 바에 따르면, 심연의 범죄 혐의의 일부는 ‘조작’이 확실히 있었다.
‘심연이라…….’
유도훈의 눈빛이 깊어졌다.
찻잔 속 태풍으로는 찻잔을 깨뜨릴 수 없다.
하지만 찻잔 밖에서도 같이 바람을 일으킨다면, 안과 밖의 태풍이 맞물려 깨지게 만들 수 있다.
치안청을 뒤엎기 위해, 치안청이 그 누구보다 치를 떠는 세력과 손을 은밀히 잡는다…….
과연 이게 옳은 선택일까, 아니면 치안청의 명맥을 끊어 버릴 최악의 선택이 될까.
유도훈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결정할 문제는 절대 아니었다.
* * *
별장에 짐을 모두 풀고, 각자에게 배정된 별장 내의 거처를 확인하고 난 뒤.
강후와 천살노수는 넓은 훈련장으로 나오기에 앞서, 거실에서 시원하게 물 한 잔을 마셨다.
훈련장에 따로 수돗가라던가 물을 마실 만한 공간이 없기에, 미리 수분 보충을 한 것이다.
강후가 거실에 왔을 때, 천살노수는 약 봉투에서 꺼낸 몇 개의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기에, 강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걱정 어린 표정으로 강후가 쳐다보자, 천살노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뭘 그렇게 딱한 표정으로 봐? 관절염에 먹는 약들이다, 이놈아. 너도 내 나이 돼봐라.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이 곪는다!”
“아…….”
“괜한 걱정 하지 말고, 네 몸이나 걱정하거라. 아마 훈련하고 나면 남 걱정할 시간도 없을 것이다만. 흐흐흐.”
말끝에 붙은 천살노수의 웃음소리가 무척 음흉하게 들렸다.
마치 제자를 괴롭힐 고민을 끝낸, 스승의 기대감이 물씬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거실을 나와 대문을 열고, 훈련장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철제 기둥까지 걸어가는 동안.
강후와 천살노수는 계속 대화를 나눴다.
“강후야. 네 능력을 솔직하게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느냐? 네 생각 그대로를 말해 보아라.”
“95%는 될 것 같습니다.”
5%를 뺀 이유는 히든 스킬 흑월참/백일참의 존재 때문이었다.
무결의 벽이야 이미 많이 보여 줬으니 숨기는 게 의미가 없지만.
흑월참/백일참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적이 이 스킬을 보고 살아남은 전례가 없었다.
물론 아군 입장에서 본 케이스는 몇 있지만,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생각은 없는 스킬이었다.
“생각보다 비율이 높군?”
“높은 겁니까?”
“사실 네가 95%가 아니라 50%라고 했어도, 더 능력을 보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떠보신 거군요?”
“그래. 이 스승에 대한 믿음을 한 번 테스트해 본 것이지. 하하.”
천살노수 나름의 괴상망측한 신뢰 테스트였던 모양.
어쨌든 정답에 가깝게 말한 모양인지, 천살노수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그가 강후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이내 품속에서 뭔가를 하나 꺼냈다.
붉은 사과였다.
때깔이 좋았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음식에 딱히 욕심이 없는 강후도 잠깐 군침이 돌았을 정도였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나는 이 사과를 다 먹을 것이다. 내가 다 먹으면, 네가 지는 거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스승님이 사과를 다 드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겁니까?”
“그렇지. 지금부터 5분 동안 내가 사과를 다 먹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아봐라. 네가 말한 그 95%의 능력을 이용해서 말이다.”
“제가 지면 어떻게 됩니까?”
“저기 있는, 해미에게 가서 한 시간 동안 나머지 공부를 하면 될 것이다. 그다음의 과제는 네가 공부를 하러 갈 때 알려 주마.”
“음.”
저기, 라는 말에 시선을 돌려 보니 훈련장 주변을 감싸고 있는 나무숲 사이에 주해미가 있었다.
너무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서 있어서 제대로 안 보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나무와 비슷한 색깔의 운동복을 입은 탓에 더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시작한다!”
사각!
천살노수가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것으로 훈련의 시작을 알렸다.
저게 한 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과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졌다.
【납치】
강후의 첫 선택은 납치였다.
천살노수를 납치할 생각은 없었고, 그가 들고 있던 사과를 빼앗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살노수는 납치 발동을 위해, 타깃에 닿아야 하는 ‘보이지 않는 손아귀’를 인지하고는.
타앙!
그가 다룰 수 있는 그만의 ‘기감’을 이용해서 매섭게 그 손아귀를 쳐냈다.
“……?”
강후의 동공이 확장됐다.
지금까지 납치 스킬의 활성화를 인지하고 피하거나, 아예 저항하면서 무력화한 경우는 봤어도.
납치 스킬 자체를 쳐낸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아귀는 말 그대로 투명한 형태의 긴 손과 같아서 타깃을 잡아끄는 형태였다.
시전자인 강후도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쫓기 힘든 그 손아귀를 천살노수가 바로 알아본 것이다.
“그 스킬은 너무 뻔하다, 이놈아!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만 느끼면 바로 간파가 되는데, 언제까지 날로 먹을 셈이냐?”
사각!
한 턴을 소비해 버린 강후는 천살노수가 사과를 또 한 입 베어 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 제한이 생기니, 시작부터 마음이 급해지는 느낌이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에는 한 번에 천살노수가 입안에 욱여넣는 사과의 과육이 너무 많다.
이대로는 두세 번만 베어 물어도 훈련이 끝날 지경이다.
【타락수 소환】
그래서 일단 어떻게든 천살노수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해야겠다는 생각에 타락수를 보냈다.
녀석에게 공격 능력도 있으니, 천살노수의 식사를 방해하기에는 충분하다.
키에에엑!
강후의 뒤에서 암흑기를 머금고 갑작스레 등장한 타락수를 보자, 천살노수가 씨익 웃었다.
“오호, 이런 잔재주도 있고?”
타락수를 앞세운 강후가 녀석의 뒤에 바짝 붙어서는 천살노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한데 바로 그때.
【암흑난비】
천살노수가 한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허공에 간결하게, 세 번 긋는 공격을 펼쳤다.
스킬명 암흑난비.
12시에서 6시 방향, 5시에서 11시 방향, 1시 방향에서 7시 방향으로 검격을 잇는 스킬이다.
언뜻 보기에는 특수한 이펙트도 없고, 달리 바람이 이는 것도 없어 평범하게 보였지만.
프스스스슷……!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타락수가 암흑난비 한 번에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강후도 타락수를 소멸시키려면, 못해도 대참수 두 번은 꽂아야 했다. 그것도 제대로.
하지만 천살노수는 딱히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도 너무 쉽게 타락수를 제압해 버렸다.
【무결의 벽】
그 바람에 타락수의 뒤에서 바짝 붙어서 접근하던 강후가 무결의 벽을 세워야 했다.
타락수가 저렇게 종이 쪼가리처럼 찢어질 정도라면, 자신이 휘말렸을 때도 위험할 공산이 컸다.
카캉! 캉! 카카카카캉!
“크으윽, 제길.”
심지어 암흑난비는 타락수를 소멸시킨 뒤, 계속 앞으로 날아오면서 무결의 벽을 쳤다.
일단 막아내면 투사체가 흩어지든지 동력을 상실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찍어누르는 느낌이었다.
마치 앞에서 묵직하게 밀려오는 거대한 벽을 막아내는 느낌이랄까? 강후의 몸이 뒤로 쭉 밀렸다.
“암흑기를 다룰 줄 아는 게 너만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러터졌구나. 아주 물러터졌어!”
사각!
또 한 번 사과를 먹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사각, 하는 소리가 거슬리는 수준까지 왔다.
‘내가 너무 속 편하게 견제하려고 했나. 하기야 명색이 암살자인데 원거리 견제라니, 가당찮지.’
강후가 자평했다.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았기에, 이번에는 레퍼토리를 살짝 비틀었다.
【그림자 걸음】
강후의 주특기이자, 변수 창출에 가장 탁월한 스킬인 그림자 걸음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다섯 개의 그림자를 흩뿌릴 수 있으니, 상대 입장에서는 골머리를 앓게 된다.
그런데.
프스스슷……!
그림자들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다시 천살노수가 전개한 암흑난비가 그림자를 없애 버렸다.
그림자는 외력에 상당히 취약한데, 암흑난비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계속 날 실망시킬 거냐?”
사각!
이제 남은 사과는 2할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천살노수가 일부러 사과를 적게 먹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 굴욕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굴욕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냐마는,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이 처음이었다.
무기력감.
나는 전력을 다해 상대를 넘어서려고 하고 있는데, 상대는 태산처럼 우뚝 서서 넘어지지 않는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느낌이라면 좋은 비유가 될 것이다. 대책 없이 깨지는 계란이 된 느낌이다.
바로 그때.
강후는 이제야, 너무 뒤늦게 천살노수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