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주해미 (2)
* * *
K와 함께 천살노수를 만난 강후는 그의 옆에 다른 여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당분간 한국에 머물려면, 그만한 준비를 하고 와야지. 챙길 게 많다. 데려올 사람도 있고.
강후가 전에 천살노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면서, 그녀가 동행한 의미를 인지했다.
원작에선 아주 짧게, 천살노수의 거처를 지키는 심복이 하나 있다는 표현으로만 나오는 존재다.
그래서 막연하게 문형서와 같은 동성(同性)의 심복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천살노수보다 최소 마흔 살 이상은 어려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맹인의 특징이 보이지만 그녀의 시선은 분명 강후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원작에서 짤막하게 적은 그 내용이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서 나타나는 건가.’
새삼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심복이라는 표현 하나가 만들어 낸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과연 그녀의 존재와 외형도 무의식의 일부인 걸까? 아니면 저절로 만들어진 산물인 걸까?
강후가 우선, 다시 만난 스승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스승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기쁘다고 하면, 내가 기분이 좋을 것 같으냐? 에이…… 망할 놈.”
시작부터 애정이 잔뜩 담긴(?) 독설을 토해내는 천살노수의 반응에 강후가 웃었다.
K는 옆에서 껄껄껄 웃었고, 그녀는 딱히 반응이 없었다.
대신 강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주해미에요.”
“신강후입니다.”
주해미.
흔치 않을 듯한 이름이다.
원작에서 어떤 식으로든 언급된 적이 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천살노수의 심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천살노수가 세상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강후에게 힘주어 말했다.
“내 양딸이다. 유리와도 꽤 친하게 지내는 편이지. 네 녀석도 유리를 잘 안다고 했지? 해미와도 서로 잘 지내라.”
“예, 스승님.”
주해미와 정유리 사이에는 이미 인연이 있는 모양.
그것보다 수양딸이라니. 예상하지 못한 그림이었다. 심복이 아니라 딸이었던 것이다.
분명 사연이 있을 듯했다.
천살노수 같은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양딸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둘 사이에 있었던 거겠지.
강후가 주해미의 성좌를 스캔했다. 성좌 셋이 보인다. 이 정도면 레벨은 최소 450 이상이다.
【마음의 눈】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성좌입니다. 상대의 움직임 일부는 예측도 가능합니다.】
‘그녀의 핸디캡을 지워준 성좌군. 오히려 눈으로 보는 것 그 이상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고.’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정확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던 주해미의 시선이 이해가 갔다.
【하늬바람】
【모든 공격 스킬에 강풍을 연계하여 이끌어 냅니다. 바람 장벽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날카롭네.’
바람을 다루는 성좌는 생각보다 가치가 높다.
바람을 강력하게 다룰 수 있으면, 적의 스킬을 받아치거나 되돌리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혹은 날아드는 스킬의 속도를 대폭 늦출 수도 있기에 회피에도 매우 용이하다.
강후가 만약에 자신이 암살자가 아닌 마법사였다면, 가장 먼저 욕심냈을 성좌이기도 했다.
【측정불가】
【이 성좌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능력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도록 만드는 성좌입니다.
제3 자가 성좌 정보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어떤 능력의 성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특이하네.’
성좌의 능력은 따로 있다.
지금 강후가 보고 있는 것은 저것이 성좌의 주요 능력이 아니라, 태생적인 특성 같은 것이다.
즉, 주해미가 측정 불가 성좌의 정보를 본다면 전혀 다른 메시지가 출력되고 있을 터였다.
천살노수의 곁에서 함께하는 인물답게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판단이 바로 섰다.
어쩌면 천살노수의 또 다른 제자일 수도 있겠지 싶었다. 충분히 가능한 그림이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느냐?”
그때, 무의식 중에 주해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강후를 천살노수가 어깨로 툭 쳤다.
‘전형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만큼, 주해미는 중국인 특유의 미녀상이었다.
같은 중국인인 유청화가 뇌쇄적이고 도발적인 느낌이 난다면.
주해미는 청순하고 순수해 보이는 느낌이 났다. 서로 정반대 특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자주 보게 될 것 같아서요.”
“내 딸이 예쁘면 예쁘다고 얘기를 해라! 물론 내 딸은 네 녀석 같은 스타일을 가장 싫어한다.”
“어떤 스타일을 말하시는 겁니까?”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핏기없는, 하얀 피부를 가진 놈 말이다. 강시 같은 놈들 말이야.”
“…….”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주해미를 힐끗 보자, 그녀는 별다른 반응 없이 앞만 보면서 걷고 있었다.
양아버지인 천살노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살갑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심지어 옆에 같이 걷고 있는 K에게도 목례와 함께 첫인사를 한 게 끝이었다.
정유리와 친한 것은 맞는 걸까? 어쩌면 둘이서 대화를 하면, 대화 지분의 99%가 정유리일 지도.
“어쨌든 같이 눈에 담아 두도록 하자꾸나. 여기부터가 내가 가르치고, 네가 훈련할 곳이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천살노수를 쫓다 보니, 자연스럽게 훈련의 무대가 될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축구장 하나 크기는 될 법한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주변이 온통 나무숲이어서 시야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는데.
나무를 뚫고 안으로 들어오니, 생각지도 않은 큰 공터가 보인 것이다.
‘K의 비밀 공간이 내가 생각하고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네. 여기 별장은 또 처음 보고.’
공터 크기도 크기이거니와, 끝자락에 있는 별장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예전에 K가 자신에게 머물도록 배려했던 별장보다 3배 이상은 큰 크기다.
천살노수, 주해미 그리고 자신, 이렇게 셋이 머물기에는 너무 큰 별장이기도 했다.
“형님! 너무 앞서 나가시는 것 아닙니까! 아이고, 벌써 신나셨구만. 하하하하.”
잔뜩 들떠있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걷고 있는 천살노수의 뒤를 K가 바로 따라갔다.
왜 신이 나는 걸까?
강후는 제자인 자신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양딸과 함께 공기 좋고, 주변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곳에 왔기에 그게 기분이 좋은 거겠지.
제자와 함께 할 공간이 만족스러워서, 그것이 신나서 좋아하는 그림은 아닌 듯했다.
그때.
주해미가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번호는…….”
이어진 숫자들.
드디어 천살노수의 연락처를 알게 됐다. 이것을 몰라서 K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었다.
강후가 스마트폰에 번호를 입력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껐다.
그리고 확인차, 주해미에게 전화를 건 번호를 보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억한 모양.
그것으로 그녀와의 짧은 교감이 끝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주해미가 말을 쭉 이어 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 말이라서, 강후가 흠칫 놀랐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정말 신강후 님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준비도 많이 하셨어요.”
“그렇군요. 제게는 따로 말씀이 없으셔서, 정확히는 알지 못했습니다.”
“중국에서 머물던 거처도 임시이긴 하지만 어쨌든 닫고 오셨거든요. 그만큼 여기에서 긴 시간을 쓰겠다는 의지가 있으셨어요.”
“주해미 님이 같이 온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 겁니까?”
“네. 아마 잠깐 오실 생각이었으면, 지난번처럼 혼자 오셨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니까.”
“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으면 해요. 지금 그 누구보다 1분 1초가 소중한 분은 제 아버지거든요. 그 시간을 허투루 만드는 사람이 곁에 있길 원치 않아요.”
“명심하겠습니다.”
강후는 주해미의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리거나, 선을 넘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후에게 마음의 울림을 주었다.
천살노수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그녀의 말을 통해 느껴졌기 때문이다. 뜨거운 감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길게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편하실 대로. 대화를 강요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말을 함부로 놓을 일도 없을 거고요.”
강후는 그녀가 원하는 ‘거리감’을 존중해 줄 것을 약속했다.
말을 최대한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에게 친해지겠답시고 자꾸 말을 거는 건.
배려나 관심이 아니라 일방적인 무시고 폭력이라고 강후는 생각했다. 그녀의 의사에 맞출 것이다.
사그락. 사그락.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별장으로 걷는 길이 제법 운치 있었다.
바람도 선선하고, 하늘도 맑고 푸른 것이 벤치 하나만 있으면 드러눕고 싶을 정도였다.
강후는 K와 함께 껄껄 웃으며 보폭을 맞춰 걷고 있는 천살노수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스킬 복사 1회】
【헌터를 상대로 성별, 레벨, 클래스에 상관없이 직접 확인한 스킬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체득하는 과정에서 클래스 불일치에 따른 페널티는 없으며, 효율도 100% 승계됩니다.】
전에 레벨 100을 달성하고, 야바위 돌림판을 돌려 얻어냈던 특전이다.
처음엔 장시환을 생각했다가 이후에는 천살노수로 타깃을 바꿨었던 강후였다.
그 타깃이 이젠 ‘스승님’이 되어 눈앞에 있다.
스승으로부터 스킬을 하나 복사해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에게 정말 쓸 만한 스킬이 많기 때문이다. 일일이 나열하기 입 아플 정도다.
‘대놓고 스승님과 논의를 해 보는 게 나을지도?’
강후는 스킬을 복사할 헌터, 천살노수와 진지하게 의논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면 되려 천살노수가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그리고 전수하고 싶은 스킬을 추천해 줄지도 모른다.
물론 대화가 꼬이면……. 그때는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듯했다.
* * *
그 무렵.
한 남자가 얼굴을 흠뻑 적신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폐기물처리장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남들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던전의 출입구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단내 섞인 숨을 토해내며, 밖으로 나온 한 남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헌터들이 시원한 물을 주고, 두꺼운 수건을 건네며 격려했다.
“일단 가리자. 출입구를 오래 노출해서 좋을 건 없다. 감지기에 걸릴 수도 있고.”
“네, 알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모두 분주하게 움직였다.
드르르륵. 드륵.
끼이이이익.
출입구 앞에 맹독 표시가 된 폐기물 드럼통부터 해서, 녹슨 철제 구조물까지 싹 밀어 넣고 나니.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접근조차 하기 싫은 흉물스러운 외관이 만들어졌다.
그 사이.
“음?”
남자는 두고 갔던 자신의 스마트폰을 열었다가, 뜻하지 않게 온 메일에 시선을 빼앗겼다.
대외적으로 알린 적 없고, 특히 치안청에는 더욱 공유한 적 없는 보안 메일 주소.
거기로 익명의 메일 하나가 날아와 있었던 것이다.
- 당신은 날 모르겠지만, 난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고선 폐기물처리장.
그곳에 있는 던전에 자주 출입하시죠? 어쩌면 지금도 거기서 이 메일을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남자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 유도훈 씨. 지금부터 내 말을 새겨들을지, 흘려들을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익명의 발신자는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특정하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유도훈.
바로 치안청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