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주해미 (1)
* * *
“역시…… 고향이다, 이건가.”
한국의 익숙한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느껴졌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아, 여기가 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물씬 드는 것이다.
입국 수속을 밟고 나오니, 마치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건지 타카시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던전 공략 일정을 7일 뒤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구성원은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강후와 타카시, 그리고 유청화와 에밀리아였다.
던전 공략 수준은 네 사람의 평균 레벨에 맞춰 결정되므로, 강후에게는 난이도가 높을 듯했다.
강후는 귀국하기 전에 독일에서 미리 연락했던 대로, 곧바로 유리 랜드로 향할 예정이었다.
이유인즉, 천살노수의 거처가 그곳에 마련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K의 말에 따르면 천살노수가 툴툴댔다고는 하는데, 아마 마음에도 없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천살노수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 K다. 그런 동생의 배려를 천살노수가 싫어했을 리는 없다.
게다가 유리 랜드 쪽이면 K가 주변 보안을 꽉 잡고 있어, 외부의 눈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총 맞고 싶지 않은 이상, 그 근처에 얼씬거리는 헌터는 없을 것이다.
K와 관계가 좋은 정화 길드의 헌터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괜한 자극은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
이미 안전 리무진은 K의 배려로 준비되어 있었다.
강후는 짧게, K에게 준비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안전 리무진에 탔다.
K가 바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정화 길드에 대규모로 약제를 납품하는 건이 있는 모양.
그의 주 거래처 중 하나가 정화 길드이다 보니, 당연한 현상이다.
아마 최근 동두천 전투로 인해 약초, 약제의 수요가 늘어났을 테니 값도 폭등했겠지.
K의 입장에서는 지금만큼 장사 대목이 없을 터다.
이내 리무진을 탄 강후가 편안한 승차감을 즐기며, 유리 랜드로 향했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동안에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국내 정세에 관련된 뉴스를 확인했다.
독일에서는 공략에 집중하고 싶었기에 의도적으로 뉴스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상황.
이제야 밀린 뉴스를 보게 된 셈인데, 그래서인지 정말 많은 소식이 쌓여 있었다.
방대한 양의 소식에 그냥 관심 끄고, 음악이나 들으며 갈까 했지만…… 결국 눈이 먼저 움직였다.
‘이건 좀 센데.’
강후의 시선을 확 잡아끈 소식은 군벌 심연이 정화 길드의 주공(主攻)을 한쪽 전선에 묶어두고는.
동두천 전투에 참여한 해영 길드의 본진을 기습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해영 길드의 서열 4위 간부인 조치훈이 죽었다는 소식도 함께 적혀 있었다.
현장 영상을 보니, 심연의 적호대에게 포위되는 바람에 도망칠 겨를도 없이 벌집이 되어 죽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치훈은 죽기 전에 해영 길드 내부의 치부까지 발설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 혹은 영상에선 찍히지 않은 심연의 제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 우리가 정화 길드에게 협력하기로 한 것은 놈들의 주력 사업인 헌터 매매에 대해서 좀 더 확실한 사업성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그냥 협력한 게 아니야! 다 이유가 있었던 거지! 내부적으로 몰래 알아보려던 것들이 있었어!
그러니 제발 살려줘! 여기서 개죽음당하고 싶지는 않……!
심연이 공개한 영상에는 조치훈이 죽는 모습까지 담겨 있었다.
이 내용만 봐도 엄청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 예상됐지만, 생각보다 수습이 빨랐다.
정화, 해영 길드가 거의 동시에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심연의 의도된 조작이라고 입을 맞춘 것이다.
여전히 정화 길드와 해영 길드의 관계는 공고하고, 한 명의 변절자에 의해 무너질 하찮은 관계가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상황은 두 길드의 성명으로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후속 제보가 이어진 것이다.
특히 큰 이슈가 있었다.
헌터 그램의 몇몇 인기 인플루언서들이 심연 쪽의 정보를 받아서 제공하기 시작했다.
‘선전전으로 가는 건가. 괜찮은 선택이군. 진즉에 했어야 했던 것이기도 하고.’
강후가 친(親) 심연의 편에 서서 짧은 영상과 관련 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한 인플루언서의 출연을 반겼다.
그들은 정화 길드의 서열 4위인 김대만이 까쉬마르 길드에 포박한 헌터를 인계하는 영상을 올렸다.
출처는 불명.
하지만 카메라 앵글 상, 까쉬마르 길드 내부에 영상을 찍은 헌터가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즉, 내부 유출인 것이다. 아마도 의도된 유출일 것이다. 꽤 비싼 값에 영상을 팔았겠지.
영상 자체에 조작설을 제기하기에는 김대만의 얼굴이 너무 선명하게 찍혔고.
더 나아가 내용과 정황도 헌터 인신 매매에 관한 것이기에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 됐다.
그것은 까쉬마르 길드의 악행에 대해서, 그간 누구보다 규탄해 왔던 장시환의 이미지에 제대로 똥칠을 하는 사건이었다.
일단 헌터 그램에서는 친 정화, 친 심연 인플루언서 간의 해석이 갈렸다.
정화 길드 편의 인플루언서들은 매매한 헌터가 심연의 범죄자 출신 포로들이라며, 그래도 싼 놈이라는 물타기에 들어갔고.
심연 군벌의 편에 선 인플루언서들은 장시환의 표리부동을 지적했다. 집요한 물어뜯기였다.
‘이현석을 살린 나비효과가 여기까지 가게 될 줄은…… 정말 제대로 운명을 비튼 느낌이네.’
이현석 하나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지금 정화 길드에 해영 길드까지 휘말리게 만들었다.
심연의 선전전은 강후가 바랐던 그림이기도 했고, 제대로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보안 메일로 괜찮은 소스 하나를 더 던져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강후가 떠올린 것은 치안청 내부에서 이현석에게 협력해 줄 수 있을 듯한 조력자의 존재였다.
원작의 내용과도 연결되는 존재다.
원작에서 치안청은 훗날, 정화 길드의 이권을 노린 일종의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장시환과 채관형을 비롯한 정화 길드의 간부를 암살하려다가 진압된 사건.
당연한 얘기지만 시작과 동시에 치안청의 윗대가리 셋이 가장 먼저 목이 따였다.
그 셋은 정화 길드의 충실한 부역자였기에, 반란자들의 최우선 제거 대상이었던 것이다.
반란군의 대장으로 그려졌던 인물이 바로 치안청의 헌터 중 한 명인 유도훈이었다.
정화 길드 2중대로 전락하는 치안청의 모습을 보고, 전부터 깊은 실망감을 느낀 것으로 그려졌다.
더 나아가 치안청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청장을 비롯한 위선자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물론.
만악의 근원인 정화 길드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년에서 3년 후의 이야기고, 그때는 정화 길드의 세가 더 공고했던 만큼.
찻잔 속의 태풍만 일으키고는 반란군 전원이 체포됐다.
그 후로 체포된 반란군들이 죽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는 원작에서 더 다뤄지진 않았다.
‘유도훈이 탐욕스럽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그것도 이 망할 놈의 망상 엔딩에 맞춰 뒤집어보면, 그 자체가 거짓이었을 수도.’
강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원작자로서 만들어 버린 이 엿 같은 망상, 부역자 엔딩 때문에.
기존의 상황과 내용, 미래를 항상 재해석해야 하는 점이 매번 골머리를 앓게 했다.
엔딩 때문에 원작 내용 자체가 ‘망상에 빠진 장시환이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상황.
그래서 곧이곧대로 정의가 정의, 불의는 불의, 이렇게 해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욕심낼 것도 없어. 유도훈과 이현석 사이에 접점을 한 번만 만들어 주면 돼. 그에게 외부에 손잡을 수 있는 세력이 있다는 것만 인지시켜 줘도, 길은 스스로 알아서 틀 거다.’
강후는 보안 메일을 이현석, 유도훈에게 동시에 보내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원하는 대로만 흘러간다면, 꽤 재밌는 그림이 될 듯했다.
지금의 치안청은 까놓고 말해서 없어도 되는 조직이다. 아니,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낫다.
정화 길드에 타격을 입히며 공중분해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몇 배는 이득이다.
타닥. 타닥타닥.
강후의 손가락이 부지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익명의 보안 메일로 두 사람에게 전달하게 될 이야기들.
어떤 내용으로 시작을 맺는 것이 좋을까.
* * *
그 무렵, 이미 유리 랜드에 도착한 천살노수는 별장에 짐을 전부 풀고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의 옆에는 다부진 체형을 가진 여성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천살노수를 수행하는 젊은 여성인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는 천살노수의 양녀(養女)였다.
K와 강복화가 정유리를 입양했듯, 천살노수에게도 그런 수양딸이 있었던 것이다.
올해로 나이 스물셋이 되는 그녀의 이름은 주해미.
특징이 하나 있다면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맹인이나 다름없어서인지 주해미는 늘 눈을 가리는 안대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안대의 색깔을 매번 바꾸는 것이 취미 아닌 취미였다.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은 형체 정도는 구분할 수 있고, 색도 아주 조금은 볼 수 있기 때문에.
눈을 가린 안대의 색을 보면서, 시신경이 조금이나마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말수는 거의 없는 편이지만, 유독 말을 많이 하는 대상이 있다면 양아버지인 천살노수였다.
지금은 단둘만 있는 자리기에.
K를 만날 때도 인사를 제외하고는 아무 말도 안 했던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신강후라는 헌터는 아버지의 제자가 될 만한 실력과 자격을, 정말 갖고 있는 건가요?”
주해미의 말에서는 강후에 대한 의심이 짙게 묻어났다.
강후에게 악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상처가 많은 자신의 양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또 줘도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조심스럽기도 했다.
혹여나 천살노수가 또 한 번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면, 그때는 폭주해 버릴 것 같아서였다.
천살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을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는 녀석이 있지. 신강후, 그 녀석이 딱 그랬다.”
“아버지의 과거가 보이셨다는 건가요?”
“그래. 내가 보이더구나.”
“그럼…… 외로운 분이겠네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천살노수가 웃었다.
강후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것은 젊었을 때의 자신을 놀라우리만치 닮았다는 것이다.
감정의 변화나 동요가 크게 없어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매사에 진지하고 심각하게 달려드는, 승부사의 기질이 있었다.
천살노수가 이렇게 호탕한 성격으로 바뀐 것도 사실 얼마 안 된 일이었다.
K가 내면에 묻어 둔 자신의 본래 성격을 끌어내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매사에 냉정했을 것이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사람이 됐겠지. 타인의 입장에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됐을 터.
하지만 동생 K의 노력 덕에 천살노수는 어느 때보다도 자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분에게 어떤 것을 바라고 계세요? 제자로 들이기로 하셨다면…… 분명 지향하시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주해미의 물음에 천살노수의 눈빛이 깊어졌다.
잠시 말을 아낀 천살노수는 주해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 순간, 주해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 안에 담긴 천살노수의 감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소리를 듣지 않아도, 주해미는 아버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안대 뒤에 숨겨진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른 것은 과잉반응이 아니었다. 감정의 전이였다.
“얼마 남…….”
이어 천살노수가 주해미의 말에 대답을 해 주려던 바로 그때.
“형님! 도착했습니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K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강후가 도착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