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귀국 준비 (2)
일단 박동재나 이예린으로부터 유우지의 거취에 관한 연락은 딱히 없었다.
계속 동선을 파악하고 있을 텐데도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아직 움직임 자체는 없다는 얘기다.
“상황을 봐서 영체 훈련 정도는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네.”
타락귀가 타락수가 되면서 암흑기의 중요성이 다시 생겼다.
소멸된 타락수를 즉각 부활시키려면 암흑기가 500 필요한데, 강후의 암흑기 스탯은 아직 그에 못 미친다.
영체 훈련을 하게 되면 암흑기 성장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만큼 곧 도전해야 할 과제가 됐다.
“이번에 타락수도 꽤 많은 역할을 해 줬고. 최근에 얻은 스킬로 여러 가지로 재미를 많이 봤네.”
가장 뿌듯할 때가 최근에 추가한 스킬로 이득을 크게 볼 때다. 얻은 보람을 느낀달까?
어떤 던전을 가도, 미들 보스나 메인 보스가 다른 던전과 똑같지만 않으면 스킬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강후는 던전을 가는 것이 늘 즐거웠다. 스킬에 대한 기댓값이 항상 있어서다.
평범한 헌터에게는 그저 공략하고 전리품을 얻는 단순한 뺑뺑이에 그칠지도 모르겠지만.
강후에게는 그 이상으로 넘어가는 쾌감이 항상 있었다.
화려한 퍼포먼스와 스킬을 보여 주는 보스 몬스터를 보면, 먼저 군침부터 흘리게 된다.
“비천격을 못 쓴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은.”
강후가 제자리에서 다리를 들어 올리며, 리에게서 강탈한 스킬 비천격을 떠올렸다.
검사 헌터를 상대할 때, 이걸로 아래턱을 박살을 내줄 생각이었는데 다음으로 미루게 됐다.
“잠깐…… 눈 좀 붙여야겠군.”
아야네의 뒷수습이 빨리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헌터 셋이 죽었고, 외국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상황에 대한 꼼꼼한 조사 정도는 있을 터.
한숨 자고 일어나도 충분할 것 같았기에 강후가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잠이 빨리 왔다.
* * *
자정을 넘어,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호텔 최상층에 있는 바에서 강후와 아야네는 위스키 한 잔을 나눴다.
대부분 서비스를 자정 전에 마감을 하는 것과 달리, 이 호텔의 바는 운영 시간이 꽤 길었다.
덕분에 둘은 이번 독일 일정을 마무리하는 대화를 진한 알코올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강후는 먼저 바에 올라와 있었고, 샤워를 마친 아야네가 가볍게 머리만 말리고 왔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었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을 만큼 그녀의 피부에는 탄력이 있었다.
“아야네, 상황 정리는?”
“잘 됐어. 어차피 무개입이 원칙이라 수습만 했고, 일본 치안청에 인계한다고 하더라고.”
“시체를 말하는 거겠지?”
“응. 그게 다야. 놈들이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의 행방이라던가, 그런 건 묻지도 않았어.”
“일종의 불문율이니까.”
“그렇지. 일단 죽은 새끼는…… 말이 없잖아?”
다시금 이를 까득 가는 아야네의 모습에서 하야부사 길드원들에 대한 적의가 묻어났다.
용병의 삶이라는 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사람을 보내서 복수하려고 했던 것이 영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수 때문에 죽을 뻔하기도 했으니, 가슴 철렁한 감정도 있을 터다.
“고생 많았군, 이번 의뢰.”
“내가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아. 그냥 사격 연습하고 온 느낌인데, 진짜?”
고생했다는 강후의 말이 와닿지 않았는지 아야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떤 식으로 복기해 봐도, 강후가 차려 놓은 밥상 위에서 숟가락질만 열심히 한 느낌이었다.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강후의 모습이 좋아서, 그 모습에 반해서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자기 역할은 확실히 하고 싶었는데, 이게 잘 됐는지 의문이었다.
“어쨌든.”
“고마워, 강후. 아, 자꾸 고맙다는 말 반복하는 거, 싫다고 그랬지?”
“응. 그쯤이면 됐어. 낯 간지럽다.”
칭찬과 감사는 자꾸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신강후’라는 캐릭터에 뿌리 깊게 박힌 냉랭함은 이상하리만치 칭찬과 감사를 낯간지러워한다.
한두 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이내 뭘 그렇게까지 감사해하냐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감사 봇’이 되어 버린 안영호와 박동재를 볼 때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특히 박동재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망 플래그까지 서슴없이 꽂으니, 더 뜨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방 말이야. 하나 더 잡았어야 했나?”
“됐어. 난 소파에서 대충 자면 돼. 애초에 침대 체질이 아니기도 하고.”
청명 수용소에서 고생했던 일들을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편한 잠자리가 오히려 불편하다.
되려 딱딱한 바닥이라던가, 오래 자기 힘든 소파 같은 곳이 더 몸에 맞는 것이다.
딱히 빈말은 아니었는데,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눈치를 보냈다.
짠.
말 대신 위스키 한 잔을 단숨에 비운 두 사람의 눈빛이 방금보다 좀 더 깊어졌다.
그리고 약 1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새벽의 선선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의 은은한 조명에 감정을 맡겼다.
딱히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서로 보고만 있어도 충분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살짝, 아야네의 얼굴에 홍조가 띨 무렵, 그녀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얘기할게. 맨 처음에 너를 봤을 때는 잘생긴 얼굴과 몸에 더 많이 반했었어.”
“그랬군.”
“그래서…… 그저 하루에 충실하자고 했던 거야. 그게 서로에게도 부담이 없잖아?”
“그렇지. 나도 원했고.”
“응. 하지만 너란 사람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빠지게 돼. 뭐랄까, 헤어나올 수 없어.”
“그렇게 내가 좋나?”
“응. 밀어내려 해도 더 좋아지고, 밀어내지 않으면 훨씬 더 좋아지더라.”
강후가 웃었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것은 몇 번을 경험해도 낯 간지럽지 않았다. 기분이 좋았다.
원작자의 삶을 살 때도 그랬었다.
독자들이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그 행복 하나만으로 살았고, 열심히 글을 썼다.
하물며 이성의 마음을 받는 것이 싫을 리 없었다. 강후도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 같은 용병에게 멀리 보는 관계는 참 무의미하지 싶어. 지금 이대로가 좋겠지?”
“흔들리지 않으려면.”
강후가 짧게 답했다.
용병은 오늘 아무 일이 없었어도, 내일 피와 죽음으로 얼룩질 수 있는 것이 운명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두면, 그만큼 상처받기 좋은 삶이기도 했다.
언제든 그 사람이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후,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지금 딱 이 관계가 좋다는 생각이야. 어쨌든…… 정말 고마워. 오늘 일은 평생 잊지 않을게. 내일 내가 죽더라도.”
“그놈의 죽음 타령은 좀…….”
“알잖아. 난 오늘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지 마. 그냥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 죽음을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는 거야.”
“오늘을 치열하게 산다라…….”
“쓸데없는 사치 부리지 말라고. 오늘도 제대로 살고 있지 않으면서 무슨 내일의 죽음을 생각하는데?”
“…….”
강후의 날카로운 일침에 아야네가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의 늪에 푹 빠졌다.
생각해 보면, 항상 내일을 걱정하면서 살았던 것 같았다.
내일은 일감이 있을까? 돈을 좀 벌 수 있을까? 들어오는 의뢰가 좀 까다롭지는 않을까? 하고.
정작 그 고민에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빠져 있었다.
그 점을 강후가 지적한 것이다.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제법 깊은 울림을 만들어 냈다.
“오늘은 오늘의 내가 살고. 내일은 내일을 오늘로 맞이한, 또 다른 오늘의 내가 사는 거야. 그렇게 살아.”
강후의 말은 그녀에게 하는 충고임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항상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뒤처질지 알 수 없어서다.
남들은 강후를 보고 혼자 다 해 먹는, 그래서 너무 강력한 암살자라고들 말하지만.
정작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었다.
아무리 많이 따라잡았다고 말한들, 여전히 장시환은 헌터의 정점에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에게 닿기 위해선, 여전히 꺾고 짓밟아야 할 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강동현, 이시하라 유우지, 증선락, 빈센트 마이어 등등……. 앞으로 더 늘어날 예정이기도 하다.
“명심할게, 강후.”
“멀리 보지 마. 오늘을 충실하기에도 빠듯한 삶이야.”
강후가 잔을 내밀었다.
오늘 새벽은 이렇게, 그녀와 술잔을 기울이며 보낼 생각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 * *
그날, 정오.
푹 자고 일어난 뒤.
귀국에 앞서 라르스를 만난 강후가 던전에서 얻은 마력 반지를 건넸다.
자신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물품이었기에, 미련 없이 건네기에 좋은 아이템이었다.
달리 생색을 내진 않았다.
그저 기념품 같은 것을 선물하듯, 무심한 느낌으로 라르스에게 아이템을 건넸다.
시끌벅적하게, 있는 티 없는 티 다 내면서 넘겼더라면 라르스에게 평가절하를 당했겠지만.
무심하게 건네자, 오히려 라르스에게서 더 좋은 반응이 나왔다.
어쨌든 눈도장을 그렇게 찍고.
라르스에게 투사의 긍지를 포함해, 어제 하야부사 길드의 세 헌터로부터 탈취한 아이템 판매를 요청했다.
현장 감정이 이뤄지고.
차후 해당 아이템의 획득 문제로 인한 ‘분쟁’에 대한 후처리까지 전부 포함한 가격을 평가받아, 1,350억 원을 정산받았다.
잔고 총계 3,860억 원.
이제 슬슬, 단순 현금 계산으로도 1등급의 아이템을 가시권에 둘 만한 금액까지 왔다.
보통 1등급 아이템이 5천억 원에서 6천억 원의 기본 가격으로 시작하는 만큼.
조금만 더 모으면, 쓸만한 1등급 아이템을 노려볼 수 있었다.
과연 그런 값비싼 아이템이 많을까 싶겠지만, 헌터의 세계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자기가 경험한 세계만큼 보일 뿐이다.
수 천억대 아이템들이 거래되는 시장은 그 이하 금액대의 시장보다 더 많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렇게 정산까지 마무리하면서, 독일에서의 첫 공식 일정은 끝이 났다.
뜻하지 않았던 사고(?)도 있었지만, 결국 큰 이득으로 끝난 해피 엔딩이었다.
이별의 순간.
라르스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곧 길드 차원에서 다시 연락을 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확정입니다. 다음에는…… 저도 꼭 동행해 보고 싶군요.”
“불러만 주신다면.”
눈빛을 반짝이는 라르스에게 강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르스의 관심은 아주 긍정적인 신호라고 봐도 좋다. 오히려 그에게 어필할 좋은 기회다.
어필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욕심과 야심을 더 자극할 기회가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그만한 메리트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하지만 말이다.
어차피 라르스가 원하는 건, 힘이다.
그것에 대한 욕심만 채워 줄 수 있으면, 꼭 열세 개의 별 같은 조직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독일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 강후와 아야네는 귀국하는 전세기에 각각 따로 탑승했다.
올 때는 함께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갈 때는 각각 한국과 일본으로 행선지가 달랐던 것이다.
잠시의 이별.
두 사람은 머지않아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서는 각자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이제.
강후에게는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스승, 천살노수를 만날 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