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교전(交戰) (1)
* * *
우선 파선각은 걸렀다.
학습하기 전, 예비 동작이나 느낌을 확정 단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있는데.
미리 살핀 파선각은 동작이 너무 커서, 강후가 원하는 컴팩트함과는 맞지 않았다.
화려한 퍼포먼스는 필요가 없었다. 오직 효율! 그것만이 관심사였다.
“흠…….”
생각보다 고민이 깊어졌다.
리에게서 강탈할 수 있는 스킬 종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강후가 보지 못한 다리 활용 즉, 각법 스킬이 많아서 살피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강후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스킬은 바로 ‘비천격’이었다.
다른 형태로 직관적으로 풀어서 쓴다면, 강(强)-올려차기라고 불러볼 수도 있는 스킬.
“비천격은 마나를 미친 듯이 잡아먹는 스킬이네. 매드 솔라키움 복용은 필수고, 두 번 연속 사용은 안 되겠다.”
총평이었다.
비천격은 앞서 강후가 리를 상대할 때, 그가 턱 아래를 올려칠 때 봤던 그 보랏빛 발차기였다.
기본 발차기가 아닌 스킬 발차기이므로.
스킬을 쓰는 순간에 다리 자체의 강화와 엄청난 추진력이 단번에 실리는 형태였다.
자신의 인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한계점을 순간적으로 넘어가므로 부상을 조심할 필요도 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제대로 얻어맞는다면 턱이 부러지든, 목이 꺾이든 하겠지.”
체험한 바가 있어 확신이 든다.
강후가 곧바로 비천격을 학습하고는 던전 밖으로 향하는 이동 루트를 잡았다.
이제 더 이상 이 던전에 미련은 없었다.
이곳의 메인 보스 같은 경우는 자신이 열 명이 있어도 못 잡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수호 옵션도 없고, 굳이 여기서 추가적인 변수를 만들 필요는 없다. 일단 나가서 좀 쉬고 싶었다.
* * *
얼마 후.
매드 솔라키움의 후폭풍까지 전부 휴식으로 상쇄하고 나온 강후가 던전 밖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던전 안의 공기도 제법 맑았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밖이 훨씬 더 산뜻했다.
“일단 라르스에게 줄 선물은 킵했고…….”
품속에 넣어 뒀던 반지 아이템을 다시 확인했다.
마력 반지. 라르스가 좋아할 것이다.
어차피 강후에게는 필요 없는 만큼, 선심성으로 주기에도 딱 좋은 아이템이기도 했다.
라르스를 만나게 되면, 반지를 선물로 건네면서 흉갑도 같이 판매할 생각이었다.
어느덧 찾아오고 있는 저녁.
라르스는 당장 만나기보다, 내일 만나면 좋을 듯했다. 마침 그렇게 조율도 해 뒀던 상태.
그래서 아야네가 미리 잡아 둘 것이라고 했던 호텔 주소를 보기 위해 그녀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헌터 그램에는 시내에 가자마자 먼저 짐을 풀어 둘 요량으로 잡겠다던 호텔 주소가 적혀 있었다.
“멀리도 잡았네.”
주소를 포털에 검색해 보니, 시내와는 거리가 제법 있는 교외의 호텔이었다.
뷰가 끝장나게 좋긴 했다. 로맨틱한 데이트에 딱 어울리는 그런 야경을 갖고 있었다.
일단 지금 간다는 통보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아야네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우-. 뚜우우-.
하지만 신호음이 갈 뿐, 받지는 않았다.
지금 씻는 중일 수도 있고, 혹은 쉬는 중일 수도 있기에. 괜히 흐름은 깨지 않기로 했다.
일단 호텔 앞까지 도착한 다음에 다시 연락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시내의 도로변으로 나온 강후가 바로 택시를 잡고는 기사에게 호텔 주소를 찍어 줬다.
그러자 기사가 허니문? 허니문? 하면서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덕담을 장황한 독일어로 건넸다.
“…….”
5개 국어가 가능하지만 독일어에는 연고가 없는 강후.
그래서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호텔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통, 번역 스킬이 절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왜 이런 스킬은 강탈할 기회가 아직 오지 않는 걸까?
얻을 기회가 한 번쯤은 꼭 왔으면 했다.
* * *
얼마 후.
호텔 근처에서 내린 강후가 호텔로 막 향하려던 중, 정말 여기서는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호텔 인근에 있는 산 쪽에서 들려온 탕, 하는 총성이었다. 환청이 아니었다.
심지어 들린 총성은 강후의 귀에 익숙한 소리이기도 했다.
아야네의 장총에서만 들을 수 있는, 그 특유의 쇳소리 같은 것이 들렸던 것이다.
“…….”
호텔 로비를 드나들던 사람들이 어수선한 반응을 보였지만, 직접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이런 호텔 내부에는 다수의 가드가 있다.
필요에 따라서 외부에서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는 결계도 활성화할 수 있는 만큼.
적어도 외력으로부터는 안전했다.
총성을 들었던 것이 강후뿐만은 아니었는지, 호텔 전체 외벽에 방탄 결계가 구현됐다.
꽤 비싼 시설이기는 하나, 일단 설계 단계에서부터 만들어 두면 여러모로 유용한 시설이었다.
굳이 호텔을 두고 아야네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애꿎은 전투에 타인이 휘말리기를 원하지 않아서인 듯했다.
결과적으로 자기 목숨의 리스크를 대폭 높여버린 셈이 되었지만, 그녀의 속마음은 이해가 갔다.
찰캉. 철컹. 찰캉.
이윽고 로비로 나온 가드 여럿이 강화된 아이템 방패를 세우고는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이들은 오지랖이 넓게 주변에서 벌어지는 갈등, 분쟁 상황에 개입하진 않는다.
그저 보수를 받은 대로, 호텔을 지키는 일에만 충실할 뿐이다. 도움을 요청해 봤자 의미 없을 터.
일단 강후가 산 쪽으로 타락수를 보냈다.
대신 자신이 명령하기 전까지는 어떤 개체도 공격하지 않고, 특유의 비명도 내지 않도록 했다.
타락귀와 달리 타락수는 하수인 반응의 통제가 가능해서, 타락귀보다 가치가 더 높았다.
특히 이제 막 저녁이 찾아오면서 어스름이 깔리는 중이라, 타락수가 들킬 염려도 적었다.
【은신】
바로 모습을 숨긴 뒤, 부지런히 산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나 추적 능력】
지면 위에 남은 헌터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마나 추적 능력 스킬을 썼다.
네이밍이 마나 추적까지만 됐으면 좋았을 텐데, 성좌에서 파생된 스킬이라 그런지 이름이 길다.
이 스킬을 사용한 지는 참 오래됐다. 그만큼 정도 많이 들었다.
청명 수용소를 탈출할 때, 자신을 추격하던 헌터를 처음으로 ‘살인’하고 얻은 능력이라서다.
마치 발자국처럼, 헌터가 흘리고 간 마나의 자국을 그대로 보여 주기에 유용한 스킬이었다.
레벨이 높은, 그리고 기척 지우기에 능숙한 헌터들은 마나의 흔적을 절대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수준이 낮거나, 혹은 상황이 급해서 그럴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어느새 강후의 위치가 산속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고, 한 번 들렸던 총성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네 개의 흔적이 보인다.
하나와 셋이 따로 노는 것을 보면, 아마도 아야네를 쫓은 헌터가 셋인 모양이다.
정황상 하야부사 길드에서 보낸 해결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제대로 복수하겠다는 거겠지.
‘일단 머리는 잘 썼네.’
강후는 아야네가 산을 이동 루트로 잡은 것이 꽤 좋은 선택이었다고 봤다.
몸을 숨기거나 위치를 조정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격에 특화된 아야네 입장에서, 상대를 노리기에도 어려운 곳이기는 했다.
이래저래 서로 뒤엉켜 싸우기는 어려운 곳. 하지만 강후에게는 가장 좋은 무대였다.
그녀의 계획과 예상 속에 강후의 합류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새로운 변수는 이미 추가됐다.
‘아무리 피해를 주기 싫었어도, 나한테 연락을 하지 않는 건 쓸데없는 자존심이지 싶은데.’
강후가 은신 상태로 가속, 도약을 반복하는 이동 과정에서 단검을 양손에 힘껏 쥐었다.
상대가 하나가 아닌 만큼, 기회를 잡으면 단기간에 목숨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끌리면, 적에게 역으로 노려질 공산이 크다.
‘시작에 한 놈은 딴다.’
아직 어떤 상황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최우선 전제를 세웠다.
일단 일대 삼의 구도에서 자신은 더하고, 적은 하나 줄인다.
그래서 서로 대적할 인원을 동수(同數)로 만든다. 그것이 강후의 첫 계획이었다.
* * *
타앙!
한동안 상대를 겨누지 않던 아야네가 기습적으로 허리를 크게 돌리면서 뒤를 노렸다.
하지만 빗나갔다.
어둠이 더 짙게 깔리고 있는 데다가 저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기민하게 움직이며 피했다.
산속이다 보니,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나무가 문제였다. 공격에는 장애물이 많았다.
사서 고생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야네는 후회하지 않았다.
용병 세계에서 마음대로 적과 아군의 경계를 넘어 다니며 카멜레온처럼 살아온 것은 맞았다.
하지만 자신과 관련 없는, 그것도 죄 없는 민간인을 엮이게 하는 것은 절대 싫었다.
이 호텔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때도, 부모의 손을 붙잡고 즐겁게 놀러 오는 아이를 봤었다.
그런 아이가 자신의 업보에 휘말려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듯했다.
적이 된 타깃은 백 명을 죽여도 감정의 동요가 없지만, 애꿎은 희생양은 한 명이 다쳐도 마음의 상처가 컸다.
“……?”
그런데 다시 뒤를 돌아보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쫓던 셋 중 한 명이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 뇌리를 엄습하는 불안감에 위쪽 이동 루트를 보니 상황이 파악됐다.
한 녀석이 우회하며 크게 도는 형태로, 아야네를 포위하는 그림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칫.”
아야네가 멈춰 섰다.
핵심 이동 루트가 두 갈래인데, 양쪽이 모두 막혀 버렸으니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다.
쫓기던 아야네와 그녀를 집요하게 쫓던 셋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멈춰 섰다.
어차피 여기에서 어떤 형태로든 싸움이 벌어질 것을 알기에 암묵적인 휴전이 이뤄진 것이다.
서로 목숨 걸고 생사전을 벌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 남자 헌터 중.
그들의 리더인 마법사 헌터 하나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아야네에게 말했다.
“아야네. 네년이 후쿠오카 해방구의 질서를 어지럽힌 탓에 길드 차원의 손실이 크다.”
“뭐래? 용병이 돈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그러면 놀아? 니네 목 따라고 돈을 받았는데, 안 따면 그게 용병이야?”
아야네가 지지 않고 맞섰다.
괜한 허세가 아니라 그녀의 신념이기도 했다.
용병이 보수를 받았으면 돈값은 당연히 해야 한다. 수행하지 못할 의뢰면 시작부터 거절한다.
이 두 가지 원칙이 그녀에게는 늘 기본이었다.
리더가 답했다.
“네가 죽인 우리 길드원의 아이템 가치만 계산해도 수백억 엔이 넘어. 넌 상도덕이 없어. 어제까지 아군이었던 우리를 배신해?”
“상도덕이 없는 건, 자기 의뢰에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폐급 용병이 없는 거지. X신아.”
그녀가 가차 없이 욕을 박았다.
강후에게 늘 조심스러운 단어와 화법을 구사할 때와 비교하면, 훨씬 ‘그녀다운’ 말투였다.
“그래. 너 같은 년이랑 말을 섞어 뭘 하겠나. 일단 널 잡아서 아이템은 싹 가져다 팔고, 희귀하다는 그 안경도 팔아먹고. 더 나아가 몸도 팔면 딱 좋겠지.”
“응, 이거나 먹어.”
아야네가 호기롭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세 헌터를 도발했다.
어려운 상황인 건 맞았다.
이놈들이 일본도 아닌 독일에서 이런 짓을 하면서도 당당한 것은 독일의 특성 때문이다.
독일은 자국민 혹은 자국 헌터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면 국외 헌터의 싸움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수습 및 중재도 양측의 요청을 모두 받기 전까지는 하지 않았다.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에서 난타전이 벌어진다고 한들, 호텔의 가드가 도우러 온다거나 할 일은 없었다.
마법사 하나에 검사 둘.
근거리 전투에 완전 젬병인 아야네로서는 어떻게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후아.”
그녀가 체념한 듯 장총을 슬쩍 내렸다.
아무리 계산해도 이건 승리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한데 바로 그때.
끼아아악-!
방금까지 조용하기 그지없던 공중에서 갑자기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리더니.
“……!”
이내 아야네에게 익숙한 검은빛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타락수였다.
타락귀나 타락수나 생김새는 똑같으므로 그녀의 시선에서는 예전의 타락귀로 보였다.
그 순간.
‘……강후?’
아야네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타이밍에 지원군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강후가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