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Type-V (1)
논의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 무료했던 차에 잘 됐지 싶어서 에밀리아도 유청화도 강후의 합류를 찬성했다.
타카시야 대환영이었다.
강후와 둘이서만 움직여도 재밌을 것 같은 상황에 친하게 지내는 두 친구도 합류하게 됐으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지난 몇 주 동안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방 청소까지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도전에 앞서, 분신을 컨트롤할 공간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은! 행복의 표현이었다.
* * *
한편 던전에 들어온 강후는 맛보기로 일반 몬스터 하나와 탐색전을 겸해서 싸워 보았다.
전투 후.
녀석을 제압하고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무리 여왕의 하위 호환 버전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까진 어떻게 싸운다고 치더라도 둘이나 셋이 뭉치면 매우 버거울 듯했다.
어쨌든 탐색전으로 싸웠던 몬스터가 경험치 막타를 친 덕분에 레벨은 271이 됐다.
강후가 점검 차원에서 오랜만에 상태창을 한 번 켰다. 스탯 확인 용이었다.
【신강후 Lv. 271】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 다재다능】
【근력 1263】【민첩 1439】
【체력 965】【마력 31】
【항마 660】【맷집 834】
【* 암흑기 455】【* 신성력 100】
“맷집…… 166 남았군.”
맷집 1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 1천을 달성하기만 하면.
시스템 보정에 따라, 레벨 100 미만의 헌터, 몬스터에게 받는 기본, 스킬 공격 대미지가 90% 감소한다.
소위 던전에서 ‘잡몹’이라고 부르는 몬스터들은 레벨 수준이 상당히 낮다.
그래서 보통 잡몹은 다수의 무리가 떼를 지어 나타나는 형태로 불리함을 상쇄하곤 했다.
하지만 맷집이 1천을 넘어가서, 녀석들의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는 수준이 되면.
떼를 지어 나타나든, 아예 하나의 군단이 나타나든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말이 90% 감소지, 액티브 혹은 패시브 스킬로 보유한 추가 방어 능력까지 모두 합치면 거의 생채기도 안 나는 수준이 돼서다.
그러면 굵직한 몬스터가 아님에야, 어지간한 잡몹은 굳이 스킬을 투자할 필요도 없어지게 된다.
접근하고, 적당히 맞을 것은 맞으면서 목을 따버리면 되니까. 아니면 가슴을 꿰뚫거나.
전투 방식이 매우 단순해지므로 강후에게 맷집 1천 달성은 중요한 목표 중에 하나였다.
사실 암살자의 목표 설정이라고 하기엔, 정말 어이없는 목표인 것은 맞았다.
마법사가 마력보다 근력을 높이거나, 검사가 근력보다 민첩을 높이는 것과 같은 언밸런스함이 있기에.
하지만 일대다 전투에서 잡몹을 상대로 탱킹도 욕심을 내는 강후로서는 꼭 필요한 가치였다.
“일단 흉갑부터 얻고. 그다음에 원래 착용하고 있던 흉갑의 수호 옵션을 활용해서 미들 보스까지 욕심을 내보는 걸로.”
계획을 확정한 강후가 타락 세트 시리즈인, 흉갑이 있는 곳을 분주히 찾기 시작했다.
GPS에 가까운 안내 구조가 활성화되어 있어, 숨겨진 곳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다만 위치가 특이했다.
확실히 그곳까지 이동하는 동선이 복잡하기 그지없고, 던전 메인 루트와도 관련성이 없었다.
이 던전에 온 헌터가 ‘굳이’ 갈 이유가 전혀 없는 장소였다.
그렇다고 다른 보상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이를테면 몬스터가 많은 곳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던전 내의 쓰레기 영역(Garbage Area)이기에 찾아갈 이유가 없는 장소였다.
오히려 중간중간 비탈길이나 낭떠러지까지 있어서 괜한 호기심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키에에엑-.
한편, 미리 날려 둔 타락귀가 열심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전방에 몬스터가 감지되면,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려 둔 상태였는데 아직 반응이 없었다.
즉, 주변에 경계할 만한 몬스터는 없다는 뜻이므로, 속도를 높여 움직이는 중이었다.
‘세트 아이템을 이렇게 딱 원하는 부위로 막힘없이 얻을 수 있는 것도 엄청 큰 이득이지.’
세트 아이템을 보유한 몬스터가 생기는 구조는 이렇다.
보통 던전의 몬스터는 계속 헌터에게 죽고, 이후 던전이 초기화되면서 안정화가 이뤄진다.
몬스터에게 있어 ‘안정화’란, 변수 없이 그저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개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계속 잡히지 않은 몬스터는 초기화 과정에서 ‘변숫값’이 쌓인다.
이 변숫값이 특정 임계치 이상을 넘어가게 되면, 그때는 특이한 보상을 가진 개체가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고, 변숫값이 최대로 쌓인 몬스터 중의 0.01% 경우가 특이한 아이템을 드롭하곤 했다.
오늘 타락 시리즈 흉갑을 얻게 될 몬스터가 바로 저 확률의 산물인 것이다.
변숫값이 최대로 쌓이는 것 자체가 엄청 힘든 경우인데, 만분의 일의 확률도 같이 뚫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강후처럼, 세트 아이템의 존재를 미리 인지하고 찾는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그래. 회귀를 콘셉트로 한 소설을 쓸 때도 미래 지식의 중요성을 매번 입 아프게 강조했었지.’
이젠 기억조차 희미해져 가는 전생, 그때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열심히 쓰면서, 혹은 한 명의 독자로 재밌게 읽으면서 생각했었다.
남들에게 없는 지식을 가졌고, 그것으로 이익을 선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이득인가 하고.
지금 자신의 모습이 딱 그랬다.
던전에 들어온 지 약 1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중간에 경사진 비탈길이나 낭떠러지 등을 지나오긴 했지만, 별 탈 없이 이동을 마쳤고.
드디어 GPS가 가리키는 위치에 가까워졌다. 멀게 잡아도 500m 안에 타깃이 있었다.
“음…….”
바위와 썩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던 곳을 나오니 바로 적이 보였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나 싶을 만큼, 뜬금없이 홀로 공간을 배회하고 있는 몬스터였다.
[Type-V : 쌍권총의 달인]
이름이 길다.
약칭하자면 브이가 되겠지.
브이는 인간형으로 쌍권총의 마탄을 쓰는 거너형 몬스터였다.
마력을 응축시켜서 쏘는 마탄형 권총을 쓰기 때문에, 탄창을 갈아 끼울 필요가 없는 녀석이다.
즉, 무한대에 가까운 난사가 가능해서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탄창을 교체하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마력을 모으는 시간이 유일한 틈이다.
그간 상대한 일반 몬스터를 생각하면, 브이는 분명히 특색 있는 몬스터다.
녀석에게 미들 보스, 메인 보스의 타이틀이 붙는다면 이상할 게 없는 콘셉트지만.
브이는 일반 몬스터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구성을 가졌다.
‘사실 상위 헌터 세계에서는 기본값이기도 하지. 유난 떨 것 없는 콘셉트이기도 하고.’
뚜둑. 뚜둑.
강후가 양쪽 손목을 풀었다.
이제 이런 녀석들을 일반 몬스터로 마주할 일도 늘어날 것이다.
당장에 타카시와 같이 가게 될 던전만 생각해도, 수준 떨어지는 몬스터가 판치는 하위 던전과 전혀 다른 그림이 될 터다.
“단순 레벨로 환산하면 550 수준은 될 것 같네. 이런 쌍권총 거너 몬스터가 그 구간에 있으니.”
원작의 설정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레벨은 강후의 2배에 가깝게 추측된다.
쉬운 전투가 되진 않을 듯하다.
카득.
강후가 곧바로 매드 솔라키움을 씹었다. 이제 남은 여분은 9개로 한 자릿수가 됐다.
【은신】
【무결의 벽】
은신 상태로 무결의 벽을 펼치며 움직였다.
여기서부터는 사방이 탁 트여 있는 오픈 필드인 만큼 서로 부담스러운 공간이기는 했다.
그래서 은신을 맹신하는 위험한 판단은 하지 않았다. 적이 위치를 감지할 것을 예상에 넣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타탕!
브이의 쌍권총이 양쪽으로 불을 뿜으며, 강후가 있던 위치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퉁! 퉁!
“역시.”
브이의 마탄을 막은 강후의 위치가 노출됐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단독 은신으로는 녀석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아마 적외선 감지나 몬스터만의 특별한 방법을 이용해 위치를 간파하는 방법이 있을 터다.
강후가 슬쩍 나무가 있는 후방까지 쭉 물러났다가, 그 뒤쪽에서 먼저 스킬 하나를 전개했다.
【기교의 장막】
여기에 다시 은신과 무결의 벽을 섞어서, 시야가 트이는 곳까지 나와보았다.
“…….”
그러자 이번에는 브이의 반응이 없었다. 이 상태에서는 강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모양.
스으윽. 스윽. 스윽.
그 틈을 타, 독혈 스킬을 활용하기 위해 단검에 착실히 피를 묻혔다.
매번 손가락에 상처를 내야 하는 것이 고역이기는 하지만, 딱히 귀찮은 작업까지는 아니었다.
그때.
타탕! 타탕! 타탕! 타탕!
브이가 360도 회전을 거듭하면서, 사방으로 대중없이 마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투웅! 투웅!
그 바람에 무결의 벽에 마탄이 명중하면서, 다시 강후의 위치가 드러났다.
“이러면 정공법이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탄 난사. 그것은 마력탄을 쓰는 모든 거너의 핵심 레퍼토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마력이 뒷받침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가장 확실한 견제법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응하면 은신이나 공간 이동할 것 없이, 거너에게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마탄을 완전히 방어해낼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님에야, 접근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 대응하면, 이마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상대가 아닌 자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수준 높은 은신을 써도, 마탄을 ‘회피’할 수는 없는 만큼.
어찌 보면 거너의 특성상 암살자를 상대하기에 가장 속 편한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터업! 터업!
강후가 큰 보폭으로 전진했다. 물론 무결의 벽으로 정면을 완벽하게 방어한 상태였다.
타앙! 타앙!
브이가 탐색 차원에서 양팔 모두 나란히 앞으로 내밀면서,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두 발의 마탄이 강후의 벽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이 정도면.’
받아낼 만하다.
이동하면서 마력을 불어넣어 벽의 내구도를 일부 회복하는 상황이기도 하고.
게다가 생각보다 깎이는 내구도 수준이 적어서,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듯했다.
다만 녀석이 기본 공격만 할 리 없으므로, 조만간 화력 좋은 스킬을 꺼낼 듯했다.
“…….”
강후가 지면을 보았다.
무른 흙 지면이다. 토질이 지금 상황에서는 여러모로 쓸 만하다.
그렇기에.
【가속】
【도약】
단숨에 브이와 직선거리를 좁히는 스킬 연계를 이었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음에도 바로 위치를 조정하지 않는 브이의 대응으로 봤을 때.
강후는 브이에게 강후의 도약처럼 거리를 벌릴 수 있는 스킬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흥.”
브이가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강후는 지금의 브이에게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을 스킬 하나를 전개했다.
【붕괴】
녀석이 든든하게 두 발을 딛고 있는 지면. 그 위부터 예상치 못한 변화를 줄 생각이었다.
갑작스럽게 가라앉는 땅을 보고, 최대한 높이 도약하면서 피하기만 한다면 하수.
같은 방법으로 피하면서 자신을 견제하기까지 한다면 중수.
오히려 간단하게 옆이나 앞, 뒤로 구르면서 위험 지역만 이탈한다면 고수가 될 상황.
그 상황에서.
“그래. 메뚜기 점프는 못 참겠지.”
브이는 강후가 예상한 범주 안에서 가장 최악의 회피를 선택했다.
점프나 도약에 관련된 스킬을 가진 헌터 혹은 몬스터라면 참을 수 없는 본능!
단순하게 피할 수 있음에도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 이른바 ‘점프충(蟲)’의 패턴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