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광대 (2)
【첫 번째 마력 획득 이후, 남은 99차례에 대해서는 스탯 편입을 보류할 수 있습니다.】
【총 100차례의 스탯 획득 작업이 완료되면 마비, 수면, 중독 상태 중 하나에는 완전 면역이 됩니다.】
‘역신의 숨결 목걸이 덕분에 중독 상태에는 반쯤 면역이긴 하지. 어쨌든 착실하게 100스탯을 쌓으면, 셋 중 하나는 영원히 신경쓰지 않아도 돼.’
강후는 최대한 빨리 완전 면역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스탯을 쌓을 생각이었다.
물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보상은 받아야 하고, 그러면 마력이 31이 된다.
야만의 시대 발동을 위한 최소 조건인 마력 50에 더 가까워지게 되는 상황.
하지만 그래도 여유가 남는 만큼, 저 보상은 꼭 받아낼 생각이었다.
원래 강후에게 수면 유도 능력이 없어서, 몽마 성좌가 있음에도 스탯을 쌓을 기회가 없었지만.
지난번에 독혈 스킬을 얻은 덕분에 몽마 성좌를 활성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생겼다.
아야네가 계속 피를 묻히는 강후를 보며, 가늘게 뜬 눈으로 물었다.
“……변태야?”
“스킬이야.”
“자해하는 스킬도 있어?”
“응. 내 피가 재료거든.”
“흡혈귀 되고 뭐 그런 거는 아니지?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피 빨리는 페티쉬는 없거든?”
“뭐라는 거야.”
“독공? 흑마법?”
“그 경계 어딘가쯤에 있는 스킬이라고 해 두지.”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에 피를 내고, 그것을 단검에 쓱쓱 묻히고 있는 강후.
그 모습을 본 아야네가 오른쪽 눈을 약간 찡그리며,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전자든 후자든, 암살자와 어울리는 조합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강후의 본질은 암살자다.
피를 이용한 스킬이 있다는 것은 암살자의 틀에서는 일단 확실히 벗어남을 뜻한다.
【저 녀석, 뭔가 이상하군.】
그때.
아야네의 메인 성좌인 ‘광기의 처형인’이 아야네를 통해 강후의 모습을 보고는 말을 걸었다.
홀로 있는 일이 많은 아야네는 자신의 메인 성좌와 대화를 하는 일이 많았다.
광기의 처형인 역시 그런 아야네와의 대화를 즐겼다.
광기가 느껴지는 이름과는 다르게 꽤 수다스럽고, 아야네를 아끼는 그런 성좌였다.
‘뭐가 이상해요?’
【전에 널 처음 만났을 때는 암흑기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신성력도 느껴지는군.
일반적인 계약자 헌터의 성향과는 결이 달라. 물과 기름을 섞어놓을 수가 있는 건가?】
‘정말이에요?’
【네 감각을 통해 내가 느낀 거다. 넌 둔감해서 못 느끼겠지만, 나는 미세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암흑기, 신성력을 공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것 아닌가요?’
【그렇지. 더 큰 특이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사고가 없다는 것. 즉, 성좌끼리도 서로 반목하지 않고 있다는 거다.】
‘그 말은 성좌들이 강후의 능력에 대해서 전적으로 믿고 신뢰한다는?’
【그것도 그렇고. 암흑기와 신성력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억제해 줄 수 있는 수준급 성좌가 함께함을 의미하지.】
아야네의 눈빛이 반짝였다.
처음부터 강후가 남들과 다른 실력을 가진 헌터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헌터로서 그리고 이성으로서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광기의 처형인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는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영역이었다.
어떤 성좌가 뒤를 봐주고 있기에 불가능에 가까운 공존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보인다.”
“그러네.”
그때, 강후와 아야네가 동시에 몬스터의 등장을 인지했다.
공식 명칭, 광대 7호.
이 던전을 구성하고 있는 몬스터의 이름이다. 외형이 피에로를 쏙 빼닮은 녀석들이다.
7호가 가장 늦은 등급이고, 1호가 가장 높은 등급이다.
지금 나타난 7호는 가장 기초적인 하위 구성원으로 난이도가 낮은 녀석이었다.
“강후, 내가 들어갈까?”
“들어가긴 뭘 들어가. 자리 잡아. 내가 최대한 모을 테니까, 한 방에 잡을 ‘원턴킬’ 각을 잡아 봐.”
“그럼 여기서 더 안 간다?”
“확인.”
파앗!
【가속】
【도약】
강후가 순식간에 아야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강후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이동 레퍼토리지만, 매번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스킬들 모두, 최대 숙련도를 달성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야네는 강후가 쓰는 모든 스킬의 숙련도 수준이 결코 낮지 않다고 추측했다.
확신이 아니라 추측의 수준으로 낮춘 이유는 모든 스킬의 숙련도를 최대로 찍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
차원 강탈자의 존재를 알 리 없는 아야네로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그림자 걸음】
어느덧 광대 7호 즉, 7호 근처로 접근한 강후가 사방에 자신의 그림자를 펼쳤다.
프슷! 푸욱!
프스슷! 푹!
연달아 그림자와 위치를 바꿔가던 강후는 자신의 움직임을 간신히 쫓던 7호의 목을 찔렀다.
잠깐 사이에 줄줄이 당한 7호 다섯이 목을 움켜쥐고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림자를 활용한 공격의 영역에 닿지 않았던 7호 한 녀석만이 동료와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납치】
으엣!
바로 납치 스킬에 끌려오는 최후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납치에 끌려서 날아오는 순간, 이미 강후의 서슬 퍼런 단검이 앞으로 나와 있었고.
푸욱!
심장을 시원하게 뚫고 들어가서는 7호의 목숨을 한 번에 끊었다. 그렇게 여섯이 목숨을 잃었다.
“…….”
강후는 아직 생존해 있는, 7호 다섯을 자극하면서 살짝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동료의 피가 묻은 단검을 앞뒤로 까딱이며 뒤로 빠지자, 7호들이 강후와 거리를 두고 접근했다.
앞서 동료가 손도 못 쓰고 죽는 것을 본 터라, 그들 나름대로 조심하는 것이었지만…….
조심하기 위해 거리를 벌린 것이 자신들도 모르게 일렬로 대열을 만들었단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타앙!
아야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퍼석! 퍼서서석! 퍼석! 퍼석!
“음.”
강후의 입에서 탄성에 근접하는 소리가 나올 만큼의 놀랄 광경이 펼쳐졌다.
아야네의 저격 한 번에 7호 다섯의 머리가 줄줄이 풍선처럼 터져 나간 것이다.
다섯의 목 위를 깔끔하게 날려 버린 터라, 굳이 생존 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강후가 후방의 아야네를 향해서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리스펙할 만한 화력이다.
광대 7호의 특징은 접촉한 적에게 끊임없이 둔화 효과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어떤 녀석도 강후와 아야네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어떤 형태의 둔화인지 체감할 틈도, 그럴 이유도 없이 7호 구간을 순식간에 돌파했다.
가까운 7호는 강후에게 죽었고, 어설프게 일렬 대형이 만들어지면 아야네에게 몰살당했다.
아야네의 저격 한 번을 버텨낼 맷집이 안 되는 7호는 그저 잡기 좋은 과녁일 뿐이었다.
* * *
이윽고 맞이한 6호 구간.
6호는 몸을 흐느적거리는 듯하면서 반격과 방어를 유려하게 쓰는, 일종의 체술형 몬스터였다.
공수 전환이 빠르고, 끌어들여 치는 한 방이 강하다 보니 역시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이큿! 에이큿!
“…….”
전투 시작부터 강후를 마주한 6호가 앞뒤로 스텝을 밟으면서, 정신 사나운 추임새를 넣었다.
제법 빠른 움직임이긴 하다. 하지만 쫓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태생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을 갖고 있는 강후이기에 움직임은 바로 파악이 됐다.
다음 순간.
이크읏!
파앗!
강후에게 멀어지는 스텝으로 몸을 뒤로 빼던 6호를 향해 강후가 쇄도했다.
가속 스킬에 몸을 바짝 낮춰서 도약을 앞으로 쓰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그 과정에서 6호가 좀 더 몸을 뒤로 쭉 뺐지만, 이미 강후는 6호의 후방 이동까지 고려하고 속도를 낸 것이었다.
결국.
푸욱!
커엑!
강후의 단검이 6호의 복부 한가운데를 찔렀다. 복막을 찢은 단검이 사방으로 피를 흩뿌렸다.
그 와중에 6호가 양팔의 주먹을 움켜쥔 채, 몸을 앞으로 튕기면서 최대한 반격하려 애썼다.
스읏! 푸욱!
하지만 그 역시 횡 이동으로 가볍게 빠져나온 강후에 의해 무산됐고, 한 방을 더 찔렸다.
이후로도 몇 차례 공방전이 오갔지만, 철저하게 유린당한 것은 6호 쪽이었다.
피하다 찔리고, 반격하다 찔리고. 겉보기만 화려할 뿐, 6호의 공수 전환은 실속이 없었다.
게다가 뒤늦게 합류한 6호 하나는 강후와 거리를 조절하며, 기이한 웃음소리로 약을 올리다가.
【기공포】
빠각!
강후의 손끝을 떠난, 예상치 못한 기공포 스킬의 일격을 얼굴로 받아내고는 즉사했다.
목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면서 뒤로 부러진 터라, 그 순간에 이미 회생 불가였다.
“푸핫!”
그 광경을 본 아야네가 웃음을 터뜨렸다.
6호 둘이 강후 하나를 상대로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둘 다 능욕을 당하다가 죽었다.
한 놈은 제 딴에는 회피였지만, 그때마다 강후에게 단검에 찔려 넝마가 되어 죽었고.
다른 한 놈은 거리를 두고 강후를 약 올리려다가 무심히 강후가 쏜 기공포 한 방에 절명했다.
피가 튀고 죽는 장면만 제외한다면, 코미디의 한 장면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웃음은 잦아들고, 아야네는 강후가 가진 능력의 확장성에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강후의 무서운 점 중의 하나는 보조 스킬이 암살자 특유의 약점을 완전히 보강한다는 것이다.
그의 기반이 암살자이기에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문제점들. 이를테면 원거리 전투 능력의 부재 같은 것들.
이런 약점이 기공포 같은 스킬로 인해 사라진다. 되려 변수 창출의 요소로 쓰인다.
‘내게 공중 저격과 필살기에 가까운 한 방 화력이 없었으면, 애초에 날 필요로 할 던전도 아니었겠지.’
아야네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지금 강후에게 없는 것이 공중 공격 옵션과 원거리 형태의 필살이기에 자신을 필요로 한 것이다.
만약 두 가지 분야에 관련된 능력까지 있었다면? 이 의뢰는 혼자 수행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강후는 채워야 할 부분들보다 채운 부분이 훨씬 더 많아서다.
‘매력 없는 파트너는 싫어.’
아야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강후에게 감탄하는 만큼, 강후 역시 자신의 능력에 감탄해 주기를 바랐다.
부러워만 하는 모습은 싫다. 내 가치를 인정받는 것! 아야네는 매력 있는 파트너가 되고 싶었다.
그때부터 아야네 역시, 적극적으로 강후와의 연계 공격에 나섰다.
굳이 공격 레퍼토리를 숨길 생각도 없었고, 강후의 박수 부대가 되는 것도 싫었다.
어차피 던전의 핵심 공략 요소 중 하나인 ‘출혈 유지’는 강후가 꽉 잡고 있는 만큼.
아야네는 출혈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화력을 보충해 주면 됐다. 그 점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강후를 노리며 달려드는 한 녀석이 있었다. 광대 몬스터 중, 대장격에 해당하는 녀석이다.
보스라는 명칭까지 붙을 정도는 아니지만, 맷집과 체력이 제법 높은 녀석이다.
【전탄 일격】
아야네가 곧바로 녀석을 조준했다.
그리고 극심한 두통을 느낄 정도로 최대치로 응축한 마나를 한 점에 모으고는.
타앙!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빠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전류 특유의 섬광을 방출하며 마탄이 날아갔다.
마치 공중에 반짝이는 흰색 실선을 긋는 것처럼, 경로가 선명하게 보이는 한 방이었다.
그리고.
퍼석! 후드드드득!
놈의 가슴을 꿰뚫은 전탄이 몸통을 박살 내버렸다. 의심할 여지 없는 폭사(爆死)였다.
그 순간.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강후의 모습에 아야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랄까.
레벨은 낮지만 처음부터 자신이 늘 동경하고 부러워했던.
그리고 스스로에게만큼이나 타인의 실력에도 깐깐한 강후에게 인정을 받은 듯해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