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광대 (1)
* * *
독일에 도착한 강후와 아야네.
안에서 푹 쉬면서 편하게 온 덕분인지 둘 다 때깔이 좋았다.
약속대로 슈타크 길드의 관계자이자, 강후의 관심 대상이기도 한 라르스 아벨이 나와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주가가 높은 용병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슈타크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 라르스 아벨이라고 합니다.”
“신강후입니다.”
“아야네에요.”
영어로 나누는 인사와 가벼운 포옹이 오갔다. 역시 만국 공용어는 영어다.
원작에서 묘사된 대로, 라르스는 맞춤형으로 제작된 수트 차림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이 아닌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치장에 포마드로 쫙 넘긴 올백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짧은 금발에 벽안, 서양인 하면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스캔된 성좌 정보를 보니, 광전사 계열에 특화된 것이 확인된다. 역시 원작의 내용과 일치한다.
“바로 던전으로 이동하실까요? 대화는 차 안에서 나누시죠. 시간이 귀하신 분들일 테니.”
“감사합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강후와 아야네는 라르스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이미 공항 앞에는 두 사람을 데리고 갈 안전 리무진이 세팅되어 있었다.
언뜻 외형만 봐도 강후가 한국에서 타던 안전 리무진보다 10배 이상은 좋아 보이는 녀석이었다.
단순 방탄 처리뿐 아니라, 안전 리무진이 외부의 위협에 대응해 반격할 수 있는 수단도 있었다.
마석의 마나를 이용, 기공포처럼 마나를 응축시켜 발사하는 구조물이 보였다.
이쯤 된다면 움직이는 요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아마 실력 있는 장인의 세공과 손길이 닿았을 텐데, 김신령의 작품 같지는 않았다.
그녀 말고도 전 세계적으로 실력 있는 세공, 개조 장인은 열 명 정도 있다. 그중 한 명이겠지.
이내 출발한 리무진 안.
레이디 퍼스트인지, 아니면 본론을 일부러 뒤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라르스는 아야네와 먼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의무적으로 대화를 진행하고 있는 느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많았지만, 라르스가 아야네를 보는 눈빛이 썩 흥미에 차 있진 않았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라르스가 강후에게 질문을 하는 순간부터, 차 안에는 전에 없었던 온기가 돌았다.
“한국의 정세는 어떻습니까? 저희 독일은 아시다시피 세력 분할이 확실히 되어 있어서, 서로 건드리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라르스의 말대로 독일은 각 지역마다 확고하게 자리 잡은 세력이 있어, 오히려 분쟁이 적었다.
힘의 균형이 유지되다 보니, 함부로 깰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물론 살얼음 같은 평화이긴 했다.
“아시다시피 정화 길드를 주축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군벌 심연을 상대로 공방전 중이죠.”
“최근에 서울에 있는 정화 길드의 무기고와 훈련 시설에 심연이 폭탄 테러를 가했다죠?”
“네, 보안이 뚫린 듯하더군요.”
라르스 정도쯤 되는 인물이 심연의 공격을 ‘테러’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니.
그간 정화 길드가 공들여온 프로파간다가 제법 뿌리 깊게 박혀있는 듯해서 기분이 씁쓸했다.
국내에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심연을 악이라고 생각한다. 정화 길드를 정의의 수호자로 믿는다.
국내 사정이 이럴진대, 정보를 한 단계 걸러 듣게 되는 외국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
이건 라르스의 잘못이나 오판이 아닌, 정화 길드와 장시환의 대외 전략의 승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론 정화 길드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누가 봐도 내부자의 소행 아닙니까? 내부 단속을 소홀히 하는 길드는 절대 외부와의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죠.”
“대한민국 제1 길드의 민낯을 본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후가 담백하게 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라르스가 보인 반응에 흥미를 느꼈다.
원작에서 라르스는 늘 정화 길드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이후에 장시환의 영입 제안을 받고, 망설임 없이 그의 동료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슈타크 길드의 비난 성명을 감수하면서까지 장시환에게 운명을 맡긴 중대한 선택이었다.
한데 지금 라르스는 정화 길드에게 잔뜩 실망한, 한심함을 함께 담은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원작과 다른 흐름이다.
자신이 이현석의 죽음을 막고, 더불어 심연의 붕괴를 막은 것에 대한 나비효과인가 싶었다.
라르스가 정화 길드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가질수록, 미래의 그림이 달라질 확률이 매우 높다.
그의 야심을 채워 주지 못하고.
걱정과 근심을 유발하는 대상은 결코 그에게 매력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 딱 그런 모양새.
강후는 여기에 시기적절하게 양념을 쳐주기로 했다. 그의 부정적인 판단을 강화해 주는 것이 좋다.
“내부 단속이 잘 안 된 것이 사실입니다. 서울 시민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치안청을 등에 업고도, 저렇게 빈틈을 노출할 정도면…… 관리의 한계점을 드러낸 셈이죠.”
“장시환 마스터의 명성도 거품이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신강후 님은 정화 길드의 영입 제안이 없었습니까? 당연히 있으셨을 듯한데요.”
“있었으나 거절했습니다.”
“역시. 저라도 그렇게 선택했을 듯합니다.”
라르스의 전반적인 어조가 정화 길드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이 계속 확인된다.
강후는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기서 라르스를 조금만 더 자극해 줄 수 있다면.
훗날 그가 열세 개의 별로 합류하는 그림을 조기에 차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머리 좋은 장시환이 다른 방식으로 라르스에게 자신을 어필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녀석이 손을 쓰기 전에 강후가 미리 옆자리를 확실하게 차지해 두면 좋겠지 싶었다.
어쨌든 당장, 라르스가 장시환과 정화 길드에 호감을 느낄 일은 없을 듯했다. 좋은 조짐이다.
그렇게 던전으로 이동하는 동안 정세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진행됐다.
아야네를 통해 일본의 정세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강후에게도 꽤 의미 있는 정보가 많았다.
그리고 최종 브리핑 차원에서 한 차례 더, 던전에 대한 안내가 이루어졌다.
이미 사전에 건네받은 자료 확인 및 공부를 통해서, 세부 내용 숙지가 전부 끝난 상황.
하지만 라르스가 한 번 더 요점을 짚어 주니, 그려 뒀던 그림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내 도착한 던전 앞.
진입을 앞둔 강후와 아야네에게 라르스가 정중한 목소리로 부탁을 전했다.
“꼭 안전하게 공략을 완료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샤프리히터 채집을 꼭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의뢰를 완수할 생각으로 온 거지, 어설프게 타협할 생각으로 오진 않았습니다.”
“걱정마세요. 최선이 아니면 죽음뿐이니까요.”
“와, 역시 아야네 님! 멘트가 멋지십니다.”
옆에서 아야네의 말을 들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곱씹어 보니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최선이 아니면 죽음뿐.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헌터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죽기 딱 좋은 빌어먹을 환경이 너무 많다.
평범한 시간과 공간에서도 그럴진대, 위험이 도사리는 던전 안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번 건만 잘 해결해 주신다면, 길드 차원에서 부탁을 드리고 싶은 의뢰가 정말 많습니다.”
처치 곤란의 일감이 많은 모양.
용병 입장에서는 돈만 주면, 일은 많을수록 좋다.
‘그루 길드와의 파트너십 계약처럼. 일단 한 길드가 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서 나쁠 것은 없지. 써먹을 일도 많아지고.’
내가 없을 때 상대가 아쉬움을 많이 느낄수록, 헌터의 세계에서는 가치가 대폭 높아진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앞으로 라르스와의 인맥을 만들고 관계 설정을 새로이 하기 위해서라도, 강한 어필은 필수다.
강후는 이번의 의뢰를 지금까지 수행해 온 것보다 더 치열하게, 적극적으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남들과 차별화가 되면 될수록, 라르스에게서 돌아올 보상과 관심은 폭발할 것이다.
* * *
5분 후.
최종 준비를 마치고 던전에 입장한 강후가 곧바로 타락귀를 소환해 전방으로 보냈다.
전세기 안에서 아야네에게 미리 얘기를 해 둔 덕분에.
그녀는 갑자기 강후의 등 뒤에서 검은 유령(?) 같은 것이 날아갔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미리 얘기해 두지 않았다면, 타락귀를 보자마자 방아쇠부터 당겼을지도 모른다.
【제3의 눈】
타락귀로 전방 정찰을 보낸 강후가 입구에 바로 제3의 눈을 설치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을수록, 더욱 경계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라르스가 허튼짓을 할 것 같지는 않으나, 그렇기에 돌다리를 확실히 두드려 보는 것이다.
제3의 눈을 설치한다 해서 부담이 커지는 것도 아닌 만큼, 고정 CCTV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잠깐만?”
“응.”
한편 아야네는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바로 고글을 썼다. 자세하게 보니까 ‘안경 아이템’이었다.
‘귀한 걸 들고 있네.’
강후가 바로 고글의 가치를 알아봤다.
세상의 귀한 아이템이 모두 자기 것은 아닌 만큼, 그녀의 희귀 아이템 보유가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워낙 구하기 힘든 종류의 아이템이다 보니, 계속 시선이 갔다.
보통 헌터가 기본적으로 아이템을 착용하는 부위는 다음과 같다.
무기, 목걸이, 흉갑, 한 손 장갑 2종 또는 양손 장갑 1종, 팔찌, 반지 10종, 발찌, 신발, 부적.
여기까지 공식 아이템 부위다.
총량 자체도 많고 구하기 쉬워서, 등급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이 부위는 다 채웠다.
하지만 예외가 있는데, 바로 안경 같은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던전에서 얻기도 힘들고, 총량이 매우 적다 보니 안경을 착용한 헌터를 보기 어렵다.
심지어 원작에서 장시환도 안경은 끝내 얻지 못해서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머리띠도 있고. 코걸이나 귀걸이, 심지어는 속옷도 있기는 했으니…… 진지하게 얻는 걸 생각해 봐야 하나.’
원작에서 등장한 수많은 희귀 아이템의 구성과 출처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나 같이 얻기 어려운 곳에 있기는 하다.
간다고 하더라도 획득을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원작 속의 장시환에게 만든, 거의 유일한 결핍이다 보니 얻기가 정말 어렵게 만들어 놨었다.
이를테면 에베레스트산의 정상 근처에서 목숨을 잃은 산악인에게 아이템을 얻는다거나 하는…….
극악의 난이도를 대놓고 만들어 놨다. 그랬다. 주기 싫어서 온몸을 비틀어 만들어 둔 시련이었다.
그때.
마나 응축과 장전까지 마친 아야네가 강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최종 세팅이 끝났음을 알렸다.
“강후. 준비됐어.”
“응. 나도 잠시.”
강후는 바로 새끼손가락에 살짝 단검을 그으면서, 얼마 전에 얻은 스킬을 활용할 준비를 마쳤다.
【독혈】
22.2%의 절대 확률로 타깃에게 마비, 수면, 중독 중 하나를 유발할 수 있는 스킬.
강후가 독혈 스킬을 부지런하게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에는 던전 공략 외에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몽마(夢魔)】
【스킬로 수면 상태가 유발된 타깃을 직접 죽일 경우, 영구적으로 마력 10을 획득합니다.
최대로 100회까지 가능하며, 그 이후에는 몽마가 한 단계 더 성장한 특전을 제공합니다.】
바로 성좌 ‘몽마’ 때문이었다.
물론 마나 50을 넘어가게 되면, 야만의 시대 효과를 상실하게 되므로 기본 툴팁 내용에 따르면 강후와는 시너지가 아주 나빴다.
하지만 강후가 살피지 않았었던 상세 툴팁에 세부적인 내용이 추가로 더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강후에게 많은 동기부여를 해 줄 수 있는 특수한 조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