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전장의 천사 (4)
구아아악!
교잡종을 차곡차곡 아름답게(?) 쌓아 둔 구덩이 안에 뇌격진이 작렬하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감전된 교잡종이 서로 뒤엉키고 쥐어뜯으면서 연쇄 감전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라서 몸에 부패한 구석이 많은 교잡종들.
그런 녀석들에게 감전의 연속은 신체의 약한 부분을 터뜨리고 태워 버리는 생지옥이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구덩이 안쪽에서 확 올라왔지만, 강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악취에는 면역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향기처럼 느껴질 정도다.
【죽음의 불꽃】
강후는 거기에 한술 더 떠 암흑기로 시원하게 불을 질렀다.
꺼지지 않는 암흑 불꽃에 휘말린 교잡종들이 산 채로 빠르게 녹아들어 갔다.
【진멸】
여기에 추가 옵션은 덤.
사방에서 불꽃이 폭발하며 교잡종의 몸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워낙 좁은 공간에 많은 교잡종이 붙어 있다 보니, 폭발 효율도 너무 좋았다.
교잡종의 몸이 폭발하면, 바로 옆에 있는 교잡종도 같이 피해를 받는 것이다.
【혈화】
한 번 더 마무리를 얹었다.
그 와중에도 분명 목숨을 부지하는 놈은 있기 마련. 한 놈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퍼엉……! 퍼엉! 퍼어엉!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기, 불꽃, 두 차례 폭발을 차례대로 선물로 받은 교잡종은 단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거야……. 이게 바로 전략과 전술이야. 역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어. 멋지다, 계약자!】
희열에 찬, 황야의 전략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슬아슬한 유인부터 깔끔한 전멸까지. 군더더기 없이 이뤄진 과정에 감탄한 것이다.
【혼자서 1인 3역을 하네. 누구를 닮아서 이리 다재다능한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어 자연스럽게 숟가락을 얹는 차원 강탈자의 목소리도 들린다.
1인 3역. 맞는 말이다.
몬스터를 유인하고 몰아오는 도발 탱커, 전류를 퍼붓는 광역 마딜러, 흑마법의 특수 딜링까지.
세 가지 콘셉트로 교잡종을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구덩이 안을 살펴봤지만 살아 있는 교잡종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학살로 쓸어 담은 경험치 덕분인지 레벨이 263까지 뛰었다.
경험치 바가 비슷한 곳에 멈춰 있어서 인지하지 못했는데, 레벨이 두 번 바꾸고 멈춘 모양이다.
바로 그때.
【전장의 천사가 당신의 광기를 안쓰럽게 지켜봅니다.】
‘드디어!’
타깃이 반응을 보인다.
강후의 이번 북한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좌 ‘전장의 천사’를 불러내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렇다고 반가움에 열심히 꼬리를 치는 것은 하수다. 강후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곤 말았다.
전장의 천사가 직접 계약을 원하며 손을 내밀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손을 내밀어선 안 된다.
따각. 따각.
마침 적절한 시점에 무리 여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장의 천사도 지켜보는 상황이니, 어필할 무대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다.
이번에는 미련 없이 각신환을 먹을 생각이었다.
각신환 하나를 먹고 전장의 천사를 얻는다면, 남아도 한참은 남는 대박 장사다.
아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가속】
타다다닷!
강후가 무리 여왕을 향해 가속을 걸고 질주하면서 카득, 하는 소리와 함께 각신환을 씹었다.
어둡고 칙칙했던 세상이 황금빛이 감도는 낙원으로 변하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이 덧씌워진다.
시간의 흐름은 모든 순간을 잘게 쪼개어 나눌 수 있을 만큼 느리게 느껴지고.
생각의 흐름은 시간의 체감과는 다르게 가속에 가속을 거듭한다.
각신환 도핑과 함께 시작한 무리 여왕과의 전투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얼마 후.
강후는 죽은 무리 여왕의 시체에서 적출한 쓸개를 용기에 보관했다.
각신환의 효과가 더해지니, 처음 무리 여왕을 상대했을 때처럼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기 쉬웠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수많은 공방전이 오가긴 했어도, 결과적으로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확실히 내성이 있는 게 맞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강후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매드 솔라키움에 각신환을 더해 먹었을 때.
그때는 분명히 매드 솔라키움의 효과가 끝났을 때도 후폭풍이 오지 않았었다.
너무 극적인 변화였기에, 같은 조합의 복용법을 반복할수록 내성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후폭풍이 온다.
각신환을 아예 먹지 않았을 때와 비교하면 가볍지만, 전에 없던 탈력감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생기 흡수】
【몬스터 또는 헌터로부터 생기를 흡수하여 체력을 회복하거나 전투력을 높일 수 있게 합니다.】
강후는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죽은 무리 여왕의 시체 위에 생기 흡수를 사용했다.
생기 흡수.
예전에 오쇼 용병단의 대장이었던 전종두를 죽이고 강탈한 성좌, 무정한 탐식가의 능력이다.
보통 체력 회복을 꾀하기 전에 전투가 끝나다 보니, 생기 흡수를 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얻은 지는 한참 됐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능력을 쓴 셈이었는데 효율이 괜찮았다.
단숨에 체력이 올라오면서 몸에 기운이 확 도는 것이 마치 강장제를 먹은 느낌이었다.
‘일반적인 힐 스킬과 달리, 정제되지 않은 탁한 기운이 들어오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괜찮네.’
기운의 성질만 다를 뿐이지, 체력이 회복되는 메커니즘은 똑같은 듯했다.
그때.
【성좌 ‘광란의 살인마’가 특수 조건을 달성한 당신에게 선택 가능한 스탯 48을 제공합니다.】
【단, 항마와 맷집 스탯은 24를 제공하며, 히든 스탯의 경우에는 16을 제공합니다.】
‘교잡종도 인간 취급을 해 주나? 잊을 만하면 나오네. 성좌도 한둘을 강탈한 게 아니니, 집중하지 않으면 몇몇은 까먹겠어.’
배부른 고민에 웃음이 나온다.
확실히 성좌가 많긴 많다.
메인 성좌를 제외하고도 순수하게 강탈한 성좌의 수만 마흔이 넘어간다.
청명 수용소에서 능숙한 교감자 성좌를 강탈했을 때가 첫 강탈의 기억이었는데…….
어느새 참 멀리도 왔다.
성좌의 수만 놓고 따지면, 채관형이 보유한 성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메인 성좌까지 다 합치면, 장시환이 가진 성좌의 수에 근접한 정도다.
물론 성좌의 격이 다르고, 연계된 능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머릿수가 많다고 다는 아니다.
하지만 그간 부지런히 차원 강탈자의 능력을 활용해 왔다는 점에서 강후는 깊은 자부심을 느꼈다.
‘일단 맷집 1천을 목표로 잡았으니 맷집이 낫겠네. 24를 받으면, 834군.’
바로 맷집 보상을 선택해서 스탯을 끌어올렸다.
잊고 있을 때 한 번씩 나타나 주는 보너스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불로소득이랄까?
어쨌든 체력을 회복한 이후에도 묵묵히 교잡종 토벌을 이어 나갔다.
무리 여왕과의 충돌은 최소화하고, 교잡종만 골라내서 잡았다.
막다른 길목으로 몰아가는 포위는 피하면서 각개격파를 하고, 광역 타격으로 재미를 계속 보니 레벨도 265의 끝자락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렸던 반응이 왔다.
【전장의 천사가 교잡종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하는 당신에게 매우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전장의 진정한 평화는 그릇된 자들의 죽음에서 비롯된다는 신념으로 당신을 응시합니다.】
【전장의 천사가 교잡종 토벌에 진심인 당신에게 정식으로 계약을 제안합니다. 당신의 뛰어난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비행기 태워 주는 게, 장난 아닌데?’
입꼬리가 올라간다.
교잡종을 막 잡는다고 해서 전장의 천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이 죽이되 스킬 활용력이 좋아야만 하고, 무엇보다 위기 극복 능력이 뛰어나야 했다.
강후가 포위를 당하며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든 것. 타락의 날개로 탈출하는 모습을 보인 것.
모든 것이 하나의 잘 짜인 연출이었다. 연출, 각본, 연기. 모두가 신강후 타이틀이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불쑥 나타나선, 나랑 겸상을 하겠다고?】
이번에도 차원 강탈자의 날 선 반응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정말 그녀가 불쾌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약 정말 계약을 만류하고 싶었다면, 강후에게 대놓고 말했을 것이다. 계약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불평불만은 하되, 늘 최종 결정은 강후가 하는 것인 만큼 월권하지 않았다.
강후는 그것이 그녀 특유의 의사 표현이자 존중이라고 믿었다.
가끔은 살가운 말들도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녀의 성격상 그럴 일은 거의 없을 듯하다.
순흑의 구도자나 황야의 전략가에게도 심심찮게 욕을 박는(?) 것을 보면 요원한 일이다.
어쨌든 전장의 천사와 계약을 완료하면, 이제는 마음 놓고 영체 훈련에 도전해 볼 수 있다.
더 욕심이 나는 신성력 쪽 계열의 성좌는 없으니까.
전장의 천사만 메인 성좌로 있으면 신성력 쪽은 딱히 아쉬울 일은 없다.
“계약하겠습니다.”
【전장의 천사가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대성전에 계약의 긴급 승인을 채근합니다. 계약이 즉시 진행됩니다.】
“빠르기도 하셔라.”
차원 강탈자의 드센 반응을 경험한 탓인지, 전장의 천사가 계약을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망설였다가는 강후가 계약을 취소하거나, 차원 강탈자 때문에 마음을 돌릴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는 차원 강탈자가 계약 추진에 도움을 준 그림이 됐다. 의도한…… 걸까?
그렇게 메인 성좌의 계약이 바로 이뤄졌다.
강후는 활성화된 전장의 천사의 성좌 특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신성력 스탯 100을 즉시 부여받으며, 신성의 기운은 계약자의 모든 조건에 순응합니다.】
“물과 기름처럼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히든 스탯의 동거라니. 그래도 충돌은 없겠네.”
첫째 특전은 신성력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원래 암흑기와 신성력은 정반대의 기운으로 서로 반목하기 좋은 특성을 갖고 있지만.
전장의 천사가 이를 조율하여 신성력이 강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둘째, 1분당 신성력 1을 회복하는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순흑의 구도자가 그랬듯이 히든 스탯의 자체적인 회복 능력을 부여받았다.
귀중한 능력이다.
다른 헌터의 경우.
히든 스탯을 얻더라도 회복하는 방법이 없거나 그 속도가 극악이라고 할 정도로 느리기 때문에, 히든 스탯이 있는데도 없는 것과 같은 기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차는 있는데 기름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관상용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셋째, 광휘의 전당에서 지목한 암흑기 몬스터를 처치할 경우, 아래의 보상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성력 증가.
광휘의 전당에 스킬 하나를 맡기고 신성 스킬 대여.
절대 광휘 획득.】
“이게 킬포인트네.”
흥미로운 세 가지 보상 목록을 확인한 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엇을 선택해도 자신에게는 큰 이득이 되는, 전장의 천사를 욕심낸 가장 큰 이유가 셋째 특전에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