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254화 (254/304)

254화 다시, 제주도 (1)

* * *

제주행 비행기를 타기 전.

공항에서 강후는 타카시에게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음성 변조기를 쓴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가 들렸다.

원작에서 타카시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딱 한 번 언급된 적이 있기는 했다.

【타카시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매혹적으로 들릴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사람은 안타깝게도 단 한 사람, 자신밖에 없었다.】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기에 타카시의 원래 목소리가 더 궁금해진다.

하지만 녀석이 실수라도 해 주지 않는 한, 평생 그 목소리를 들을 일은 없을 듯했다.

- 신강후! 잘 지냈어?

“잘 지냈지. 요즘은 어때? 같이 갈 던전을 물색해 본다더니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강후가 은근히 타카시를 압박했다. 어차피 던전을 가 보자고 먼저 요청했던 것은 타카시 쪽이다.

- 던전은 많은데, 너랑 개고생할 던전을 찾다 보니까 시간이 좀 걸리네? 이왕 가는 거, 머리 빠개질 정도로 고생해야 가는 의미가 있지 않겠어?

“큭, 캐릭터 확실하네.”

강후가 웃었다.

갈 곳은 많은데, 제대로 구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정말 ‘빡센’ 곳을 고르고 있다는 얘기.

고통을 즐기는 것에 진심인 타카시의 얘기를 듣자, 강후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 뭐 하고 지냈어? 어디 던전 다녀온 곳은 있고?

타카시의 물음에 강후가 최근에 노르웨이에서 박동재와 공략했던 던전 얘기를 해 주었다.

신호등 보스, 데세오에 대한 얘기를 해 주자 타카시가 매우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략, 접근법을 개진했는데 그것이 강후가 공략했던 방식과 거의 같았다.

성향이 비슷하면, 생각하는 결이나 방향도 그렇게 흘러가는 모양이다.

강후도 타카시가 주장하는 만물패턴론에 원작자로서 격하게 공감하는 만큼.

그와 패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피드백을 하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

한편 타카시는 자신이 수집해 둔 정보를 강후에게 전달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최근에 유우지가 안 보인지가 좀 됐어. 한국에 입국했을 가능성이 크니 조심해.

“그것까지 걱정해 주진 않아도 되는데. 꼼꼼하게 신경써 줘서 정말 고마운걸.”

- 딱히 널 생각해서라기보다, 내가 유우지를 X 같이 생각하는 구석이 많아서 그런 거야.

“이유야 어쨌든.”

- 놈은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놈이니까. 싸움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아.

“알아. 각오하고 있어. 그럴 생각으로 처음 만났을 때, 공격했던 것도 있고.”

- 회복을 했다고는 하는데, 예전 같지는 않은 모양이야. 녀석의 약점이나 분석한 패턴을 좀 알려줄까?

“아냐. 내가 고민해 볼게.”

- 괜찮겠어?

“떠먹여 주는 밥은 질색이야.”

타카시의 호의를 거절했다기보다는, 강후 나름대로 생각해 둔 유우지 공략법이 있었다.

타카시에게 좀 더 자신을 어필하려면, 의존적인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좋다.

그에게만큼은 디메리트가 될만한 요소를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 좋아. 몸조심하라고. 조만간 연락할 테니, 긴장하고 있어. 만만찮은 곳으로 뽑아올 거야.

“실망이나 시키지 마.”

- 패기 봐라? 좋아. 딱 기다려.

“연락 기다릴게.”

타카시와의 짧은 통화 내내, 기분이 좋은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어린애처럼 모험을 즐길 생각에 푹 빠져 있는 타카시가 부러웠다.

아마 그도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열세 개의 별의 동료들은 던전을 두고 의도적으로 고생하고 모험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니까.

그들은 지름길을 따라서 빠르게 가는 과정에 희열을 느끼지, 길을 찾는 과정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이게 타카시가 원작에서 끝끝내 열세 개의 별에서 겉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강후는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고.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것도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타카시도 느낀 것일 터다.

통화를 끝낸 후, 정유리가 보낸 메시지를 하나 확인했다.

내용은 딱히 대단한 것은 없고, 요즘 던전 공략만 하면서 지내느라 질린다는 얘기였다.

K와 강복화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으며, 각 잡고 성장에 올인을 하는 듯했다.

모르긴 몰라도, 전보다 레벨이 훨씬 더 많이 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유우지가 국내 입국을 마쳤다면, 아무 생각 없이 밖에 나다닐 일은 없겠지. 강동현이 직접 관리하고 있을 거야.’

유우지가 물불 안 가리는 구석이 있다고는 해도, 머리를 비우고 다닐 것 같진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는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일본이 아닌 한국이고, 한국에서도 그는 수배 대상자다.

그렇다면 강동현의 보호가 필수일 것이고, 대전을 활동 영역으로 둘 가능성이 컸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지 않는 한, 무리하게 외부로 나서진 않을 것이다.

특히 서울이나 제주도처럼 치안이 확실히 잡혀 있는 곳은 절대로 출입하지 않을 터다.

그래서 이예린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클립스의 동향을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클립스의 흐름을 쫓다 보면, 자연스럽게 유우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광전사이면서 동시에 암살자이기도 한 이시하라 유우지.

최소 레벨 500 이상으로 추정되는 유우지는 절대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앞서 상대했었던 무리 여왕보다 더 까다로운 전투가 예상되는 만큼, 만반의 준비는 필수다.

* * *

제주 공항에서 박동재와 접선한 강후는 그루 길드와 만나기로 약속한 게이트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그루 길드의 헌터와 치안청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 무슨 일인가 했는데.

슬쩍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제주도 내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도내에 긴급 수배가 내려졌는데, 수배자 체포에 그루 길드도 적극 협력하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그루 길드가 제주도 관리에는 진심인 것 같아. 그렇지?”

“길드의 기반이니까 소홀히 관리하지는 않을 거야. 정화 길드가 서울 수호에 진심인 것처럼.”

“하긴, 형 말이 맞네. 정화 길드가 곧 서울인 것처럼, 그루 길드가 제주도인 것도 맞지.”

“잘 쉬었고?”

“어. 명가 길드 쪽에서 연락 왔는데 이번에는 쉬겠다고 했어. 디버프 스킬 훈련도 좀 하고 싶었고 해서, 개인 트레이닝 좀 했지.”

“고생했다.”

“형은?”

“뭐…… 많은 일이 있었지.”

강후가 천살노수와의 일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마 지금쯤 중국에 도착한 천살노수는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고 챙기고 있을 터다.

그때.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신강후 님 옆에 계신 분은 박동재 님 맞으시죠?”

그루 길드의 마스터 오유진이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녀의 옆에는 오혜진과 마진호도 함께 있었다. 그루 길드의 핵심 간부 셋이 모두 나온 것이다.

어지간한 귀빈이 아니라면 보기 힘든 구성이었다. 보통은 마진호만 나오고 마니까.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박동재입니다!”

강후와 박동재가 그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특히 초면인 박동재는 하나하나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며, 눈도장을 확실히 찍는 모습이었다.

“직접 모실게요. 이쪽으로.”

오유진은 준비해 둔 차량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길드 건물로 먼저 가게 될 듯했다. 던전 브리핑이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 * *

이내 도착한 그루 길드 소유의 빌딩에서 오늘 공략할 던전에 대한 브리핑이 진행됐다.

다만 세부 브리핑에 앞서, 오유진이 몇 가지 이야기를 쭉 꺼냈다.

“우선 이번에 공략하신 노르웨이 쪽 던전 있잖아요? 그라티아 길드에서 연락이 왔어요. 두 분의 공략이 엄청 빨라서, 정말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을 빨리 끊게 됐습니다.”

기본 루트가 아닌, 이중 던전을 공략한 구조였기 때문에 일찍 공략이 끝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내막을 알 리 없는 길드 입장에선 신속하게 공략을 마무리한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굳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썰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는 만큼, 강후는 그쯤에서 답을 끝냈다.

눈치 빠른 박동재 역시 눈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입을 무겁게 해야 할 때임을 잘 알았다.

“브리핑 전에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신강후 님은 저희 길드와 추가로 파트너십 계약을 맺는 것은 어떠신가요? 아울러 박동재 님은 저희와 일대일 파트너십 계약을 한 번 맺어보시는 것은요?”

“일단 저는 좋습니다.”

강후가 바로 의사를 밝혔다.

이번에 그루 길드가 던전을 물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 강후였다.

그루 길드는 자신에게 없는 인맥을 다수 가지고 있다.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될 터다.

아울러 파트너십 계약이 던전으로만 한정해서 이뤄진다는 부분도 강후에게는 무조건 이득이었다.

던전을 공략하면 보스 몬스터가 없는 것이 아님에야, 스킬 강탈은 확정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략 요청에 응하든, 혹은 던전을 요청하든, 어떤 선택을 해도 이득을 보는 것이 강후다.

그러니 파트너십 계약을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강후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인맥과 교섭의 문제를 그루 길드가 대신해 주니, 복잡할 것도 없다.

사실상 그루 길드의 ‘옵저버’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상호 의뢰수행이라는 특징만 제외한다면, 옵저버와 포지션이 똑같았다.

갑작스런 파트너십 계약 제안이 얼떨떨했는지, 박동재가 물었다.

“보통 이런 파트너십 계약 건은 테스트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아는데요. 너무 갑작스럽습니다만.”

“테스트는 따로 필요 없으세요. 신강후 님이 추천하는 헌터시잖아요? 자동으로 검증이 된 거죠.”

“예?”

“박동재 님만 괜찮으시면, 테스트는 없다는 얘기에요.”

“오…….”

“어떠세요?”

“저야 좋죠!”

그 이후.

계약은 빠르게 진행됐다.

강후는 그루 길드와 추가로 파트너십 계약을 2회 더 체결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루 길드에서 공략에 애를 먹고 있는 던전이 꽤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정화 길드나, 다른 세력에 손을 벌리자니 자존심이 상하는 구석이 있는 모양.

강후 입장에선 던전 공략은 다다익선인 만큼, 흔쾌히 받았다.

박동재 역시,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버퍼인 그의 입장에서도 던전은 많이 갈수록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퍼에게 고된 출혈 셔틀을 요구할 것도 아니고, 원하는 바는 버프 셔틀로 뻔했다.

그러니 박동재로서는 던전을 갈 기회를 계속 늘릴 수 있는 파트너십 계약이 반가울 수밖에.

계약을 마무리한 뒤.

브리핑이 신속하게 진행됐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확보된 정보를 모두 공유한 브리핑이었다.

강후와 박동재는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하며 숙지해 나갔고, 일차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박동재는 버프를 어떻게 굴릴지 판을 짰고, 강후는 각각의 상황에 맞는 선택지를 고민했다.

손발을 맞춘 기간이 제법 있기 때문인지, 강후와 박동재가 생각하는 결이 거의 비슷했다.

그래서 전략 논의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 없이 의견의 일치를 봤다. 그루 길드의 세 사람과도 마찬가지였다.

공략을 미룰 이유가 없는 만큼.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던전 공략을 진행했다.

다만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오유진, 탱딜형 검사.

오혜진, 탱딜형 검사.

마진호, 탱킹형 검사.

강후, 암살자.

박동재, 버퍼.

누가 봐도 땀내가 물씬 풍기는 근딜 도배의 조합이라는 점.

그리고 순간 대미지가 가장 높은 헌터가 그루 길드의 세 사람이 아닌 강후 자신이라는 점!

여러모로 일반적인 형태와는 다른 던전 공략이 될 듯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조합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