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천살노수 (5)
* * *
둘 사이에 많은 얘기가 오갔다.
부드러운 대화가 오가기도 하다가, 천살노수가 날 선 반응을 보일 자극적인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
강후는 시종일관 천살노수에게 예를 갖추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참거나 숨기지는 않았다.
천살노수의 격앙된 목소리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가 악의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살노수는 언성을 높이면서, 강후의 반응과 표정을 살피는 쪽에 가까웠다.
이 녀석의 배포는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능청스러운지, 또 자기 주관은 뚜렷한지 보는 것이다.
편한 대화의 자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서도 시험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었다.
생각을 있는 그대로 계속 말하는 것이라, 강후의 입장에선 어려울 것이 없었다.
천살노수도 강후의 말에서 포장되지 않은 진심을 느꼈다.
마치 판박이처럼,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는 느낌이었다.
깍듯이 선배와 스승을 대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꼭 한다.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다.
강후를 볼 때마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하면서도 좋았다.
자신을 닮은 녀석을 보면 기분이 더러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친근한 느낌이 든달까.
천살노수가 물었다.
“질문을 바꿔보자. 내게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가르치고 싶으십니까?”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답을 정하고 물어봤던 질문이기도 하기에 천살노수가 바로 대답을 했다.
“네 공격성을 강화하고 싶다.”
“공격성이라고 하시면?”
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도 충분히 공격적인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눈에는 아닌 모양이다.
“지금의 너는 공수를 모두 커버하려다 보니, 창이 상대적으로 무뎌졌다. 아마 모를 것이다.”
“예. 오히려 전보다 더 날카로워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 방어 능력이 다른 암살자들에 비해서 월등히 뛰어나고, 좋은 스킬을 갖고 있는 것은 맞다.”
“…….”
“하지만 암살자는 결국 가까이서 상대의 숨통을 끊어야 끝나는 직업이다. 무딘 과도로 사과를 깎아 먹는 것보다야, 날카로운 과도로 깎아 먹는 게 과육도 살고 맛도 좋겠지.”
“음…… 다 갖고 싶다 보니, 역설적으로 다 갖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강후가 인정했다.
아까 천살노수의 시험에서도 분명 더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있었다.
만약 무결의 벽이 없었다면?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없기에 위험해지더라도, 더 앞으로 나서며 대응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결의 벽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방어에 치중하게 되고, 수동적인 포지션을 잡았던 것.
천살노수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믿음은 확신을 주지만, 때로는 그 방향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때도 있다. 아까 네가 내게 보인 실력이라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면 상황이 더 빨리 풀렸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나는 한 번 막고 한 번 찌르는 것보다, 두 번을 찌르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다. 그 부분에 중점을 잡고 널 가르칠 것이다.”
그의 말이 마치 야수의 본능을 일깨워 주겠다는 말처럼 들려서 강후는 기분이 좋았다.
암살자의 본질은 공격이다.
방어는 부수적인 개념이지 기반과 중심이 될 수 없다. 천살노수의 지론에 적극 동의하는 바였다.
천살노수가 찻잔에 가득 채워 둔 차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힘주어 하려는 말이 있는 듯, 헛기침까지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습이었다.
“신강후라고 하였지.”
“예.”
“정말 내 제자가 되고 싶으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는 스승님을 오래전부터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너에게 꼭 한 가지를 약속받고 싶다. 계약서 따위를 내밀거나 피의 맹세를 시킬 것은 아니나, 마음의 약속을 받고 싶다.”
“말씀하십시오.”
“네게 평생의 스승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하겠느냐? 그렇다면 내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하는구나.”
“예.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강후의 말은 진심이었다.
원작의 천살노수를 제외하고는 암살자로서 배움을 갈구하고 싶은 존재는 없었다.
참고하거나 일부 좋은 점을 가져올 수 있는 실력 좋은 암살자야 전 세계에 많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남김없이 배우고 싶은 암살자는 천살노수가 유일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다. 그러면 다시 중국에 다녀오는 대로, 내가 원하는 곳에서 너를 가르치고 지도할 것이다.”
“중국에는 어떤 일로 가시는 겁니까?”
“원래는 여행이나 하려고 왔다가, 저놈에게 붙들려 담즙도 정제하느라 시간을 빼앗겼거든.”
“아…….”
“당분간 한국에 머물려면, 그만한 준비를 하고 와야지. 챙길 게 많다. 데려와야 할 사람도 있고.”
“알겠습니다.”
데려와야 할 사람이라면 아마도 천살노수의 거처를 지키는 사람일 터.
유리 랜드의 문형서나 황보혜처럼 천살노수의 곁에도 그의 심복이 하나 있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내가 다시 오는 대로 정식으로 맺자꾸나. 네게 변화를 만들어 주고 싶다.”
“저 역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내 얼굴에 똥칠하는 순간, 네 목숨도 같이 끝나는 거다.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강후는 아주 잠깐이지만, 천살노수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 세상 차가운 사람일 줄만 알았는데.
막상 만나 보니 감정적인 구석도 많고, 표현의 톤이 매번 다른 느낌이 있었다. 생동감이 있달까?
항상 건조하게 보이는 자신과는 다른 모습이 그에게 있었다. 비슷한 성격의 부류가 아니었다.
떨렸다.
실력자를 스승으로 두게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인 걸까.
무엇을 하든 배울 수 있다는 확신이 주는 기쁨의 크기는 과연 어느 정도인 걸까?
강후는 빨리 천살노수에게 가르침을 얻고 싶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암살자가 될 수 있다면, 어떤 고생이든 마주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 눈을 뜬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내려놓은 적 없는 투지였다.
* * *
K는 사제지간을 맺기로 했다는 천살노수의 확답을 듣고는 감격에 젖은 듯, 눈물을 살짝 글썽였다.
K의 눈에 천살노수는 강후만큼이나 외로운 사람이었다. 늘 홀로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천살노수에게 마음을 툭 터놓고 교감할 수 있는 제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갱년기도 아니고 눈물을 글썽이고 지랄이냐?”
“형님, 감동을 좀 붙잡을 수 있는 틈이라도 주시지…… 그러시면 눈물이 쏙 들어가잖습니까.”
“눈물 짜지 말고, 내가 중국에서 다시 연락하면 머물 곳이나 미리 알아봐 둬라.”
“물론입니다. 자네도 고생 많았어. 내 생각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기쁘구만.”
“감사합니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새로운 길을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이 떨립니다.”
정말 떨렸다.
두려움과 공포의 떨림이 아닌, 예측할 수 없는 기대감이 주는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그때.
천살노수가 강후의 손목에 있는 팔찌를 보더니, 이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개조 아이템 같은데. 맞지?”
“예, 맞습니다.”
“느낌이 김신령 그 녀석에게 얻은 아이템 같은데, 내가 짐작하는 바가 맞는 것이냐?”
“맞습니다.”
“무슨 관계지?”
“소환수 훈련에 제가 자문을 드리고, 한편으로는 특수 재료 세공을 요청 드리고 그런 식입니다.”
“흠…….”
“제가 강해지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찾는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김신령에 대한 천살노수의 적대적인 감정을 알았지만, 강후는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의미 없음을 안다. 차라리 솔직한 것이 낫고,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좋다.
천살노수 역시 강후의 대답을 듣고는 더 이상 문제 삼지는 않았다. 오히려 화제를 돌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건데 말이다. 너를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력의 흐름이 심상찮다.”
“내가 설명해도 될까?”
K가 강후를 보며 물었다.
자신이 강후의 ‘선천성 마나 과민증’에 대해서는 좀 더 이론적으로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일련의 대화가 오갔다.
강후와 K가 그간 해 온 노력과 실패한 과정들, 그리고 다시 시도하려는 방법들까지.
놓치지 않고 경청한 천살노수가 K의 설명이 끝나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부분은 나도 해결책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군. 돌연변이 중에서도 가장 큰 돌연변이 같은데.”
“그렇습니다, 형님. 다만 잘 다룰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최고의 실력과 연결될 수 있는 장점이자 특징이 될 겁니다.”
“이 부분은 나도 고민하고 연구해 보겠다. 마력을 빨아들이는 능력이라…… 부럽기도 하구나. 조롱은 아니니 오해는 말 거라.”
“물론입니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결책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자 동시에 핸디캡인 특성을 두고, 걱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만약 선천성 마나 과민증을 치료하는 대신, 특성마저 잃게 된다면?
강후는 절대 치료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한 특성을 포기할 순 없다.
그렇게 천살노수와 K와의 짧고 깊었던 만남이 끝나고, 셋은 다시 헤어졌다.
천살노수는 바로 중국행 비행기를 탔고, K는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라졌다.
강후 역시 서울로 돌아왔다.
마침 그루 길드에서 연락이 온 상태였다. 던전 공략 준비가 끝났으니, 시간을 내달라는 요청.
동선에 맞게 일정이 착착 돌아가니, 비는 시간도 없고 좋았다.
안전 리무진을 타고 서울역으로 돌아온 강후는 바로 제주도로 갈 준비를 했다.
마침 박동재와도 연락이 끝났으니, 바로 이동하면 될 터다.
* * *
그 무렵.
‘심연 아니면 그라운드 제로 쪽인가.’
강후가 안전 리무진을 타고 서울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김희운이 미행 내역을 정리했다.
앞서 강후를 은밀히 미행하며, 서울역에서 안전 리무진을 타고 출발한 것을 확인했던 그였다.
워낙 교통량이 없는 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차를 이용한 미행은 중간에 중단했었다. 발각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복귀했다.
안전 리무진을 타고 이동할 정도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래서 김희운은 강후가 다녀왔을 곳을 두 곳으로 특정하고 있었다. 심연과 그라운드 제로였다.
강후가 머무는 거처가 없다 보니, 동선이 대중없었다. 미행하는 입장에선 가장 엿 같은 상황이다.
‘일단 리무진 기사부터 조사해 보는 게 좋겠군. 적어도 어딜 다녀왔는지는 알 수 있겠지.’
김희운은 강후의 뒤꽁무니만 쫓기보다는 인맥 혹은 연관된 인물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면, 그의 성향이나 추구하는 바를 유추하는 건 쉽다.
이를테면.
‘심연에 연이 있는 녀석이라면, 언제 죽어도 할 말 없겠지.’
바로 적으로 특정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화 길드 최대의 적은 심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