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천살노수 (4)
* * *
시험을 겸한 전투는 거기서 끝났다.
사생결단까지 가지 않아도, 실력을 가늠하고 판단하기에는 충분한 공방이 오갔기 때문이다.
시험의 중단 즉, 종료를 선언한 것도 천살노수였다. 강후는 어떤 의견도 개진하지 않았다.
“재주가 제법이구나. 처한 상황에 맞게 대응할 선택지가 이렇게 다양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가르침은 얼어 죽을! 손모가지 비틀릴까 봐 미친 듯이 내뺀 것이 내 모습이다. 이게 가르침이냐?”
“발을 쓰셨잖습니까. 제가 생각한 그림에는 없었던 돌발 상황이었습니다.”
“그것도 가르침이다, 이거냐?”
“예.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시더라도, 제게는 아주 귀중한 가르침이 됐습니다.”
“실력만 좋은 줄 알았더니 입놀림이 제법이구나. 어쨌든 꽤 마음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강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천살노수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은 아니다. 칭찬을 할 때면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칭찬이 나올 확률이 낮다는 점이 문제이긴 하다.
어쨌든 자신의 대응이 그의 기준에는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암흑기 스킬을 봉인하고, 방어에 특화된 스킬을 갖고 있고. 여기에 창을 다룰 줄 알고, 악력까지 강화하는 아이템도 있고. 끔찍한 혼종이로군.”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딴 말을 지껄이면 보통 하지 말라고 하는 편인데, 한번 말해 봐라.”
“제게 보여 주신 스킬도 암살자의 틀에 정확히 들어맞는 스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강후가 짚은 부분은 천살노수의 스킬 구성이 자신처럼, ‘올라운더’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암살자 특성을 생각한다면, 원거리 견제 스킬은 거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광비도와 같은 비도술을 암살자가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스킬화가 되진 않는다.
그저 힘껏 단검을 던지는 수준일 뿐이다. 대미지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스킬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천살노수는 마력 단검을 쓰는 모습에서, 암살자의 틀을 깬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단검의 형상으로 위장(?)하기는 했지만, 사실 마법사 쪽의 능력을 보여 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
게다가 연기 형태로 변하는 것도 은신이나 환영과는 결이 다른, 제3의 능력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 말이다. 지금 내가 네게 접근하려고 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이걸 쓰겠습니다.”
【기공포】
파앙!
강후가 바로 천살노수로부터 한 걸음 정도, 떨어진 앞쪽에 기공포를 날렸다.
강후가 보란 듯이 날린 기공수의 스킬을 본 천살노수가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암살자의 탈을 빌려 쓴 가짜 암살자. 그게 네 본질이다. 내 본질이기도 하고.”
“깊이 공감합니다.”
“그래?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예. 방금 보여드린 기공포 같은 잡기(雜技)를 익힌 이후로 더 그런 생각이 강해졌죠.”
“레벨이 몇이지?”
“255입니다.”
“255라……. 나랑 딱 500 차이군.”
앞서 강후가 했던 예상이 맞았다.
인내자 성좌 효과가 발동되면서 계산된 스킬 회피율을 보고 역산했는데, 오차가 없었다.
그 사이, 강후가 천살노수의 성좌 정보를 쭉 스캔했다.
볼 것도 없이 다수의 성좌와 계약이 맺어져 있다.
한 페이지에 최대 10개가 표시되는 성좌가 3페이지까지 있으니, 적어도 21개 이상이다.
천살노수가 말을 이었다.
“레벨 300도 되지 않은 풋내기가 이 정도면, 떡잎은 확실히 좋은 게 맞구나. 일단 따라와라. 시험은 끝났다.”
“합격입니까?”
“뭐, 여기서 목걸이라도 만들어서 걸어주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옆으로 와라. 같이 걷자.”
자연스럽게 손짓하는 천살노수의 모습에선 방금까지 가득했었던 살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꼭 할아버지 뒤를 쫓아가는 손자가 된 느낌이었다.
천살노수는 일흔 살을 넘겼고, 강후는 서른을 앞두고 있으니 나이 차이도 적절하다.
그와 함께 조용히 걸었다.
강후가 옆에서 살핀 천살노수의 모습은 끊임없는 훈련과 노력 그 자체였다.
세월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는 얼굴을 제외하면, 몸은 강후만큼이나 좋았다.
김신령을 만났었을 때도 나이를 초월한 몸 관리에 혀를 내둘렀는데, 천살노수는 더 했다.
사진을 찍고, 주름만 보정할 수 있으면 현역으로 뛰고 있는 운동선수라고 해도 될 정도다.
강후가 천살노수를 보며 감탄하는 동안, 그 역시 강후의 특징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상당히 신중하군. 내가 옆에서 걷고 있는데도, 대응 자세를 풀지 않고 있어.’
천살노수는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강후의 모습에 놀랐다.
그 역시도 강후와 비슷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K의 관할 영역인 이곳에서 갑자기 불청객이 나타날 일은 없다. 몬스터도 마찬가지.
하지만 확률이 0%여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게 암살자의 기본기라고 생각하는 천살노수였다.
암살자는 필요할 때 즉각 무기를 낼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반드시 일격필살이어야 된다는 생각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기본기에 충실한 강후의 모습은 늘 이것을 강조하는 천살노수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만 하기에는, 애초부터 몸에 밴 것처럼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과거 어느 순간에도 늘 이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빈틈없이.
‘스킬을 도대체 어떻게 늘린 걸까. 이건 특성에 따라 분화된 것도 아니고, 서로 따로 노는데.’
천살노수는 그것이 궁금했다.
방금 시험에서 강후가 보인 스킬을 전부 떠올려 보면, 공통 키워드랄 것이 없었다.
전부 따로 논다.
한 명의 헌터가 다루는 스킬인 것은 맞지만, 하나로 통합할 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 이런 경우는 스킬북을 학습해서 스킬을 늘릴 경우에 생긴다.
그러나 방어벽을 세우는 스킬은 암살자에 특화된 스킬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른 직업군의 스킬을 배운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페널티가 있어야 하는데, 효율이 너무 좋았다.
‘……생각을 덮자.’
호기심에 생각이 잠식되기 시작하자, 천살노수는 괜히 마음이 들뜰까 싶어 마음을 차분히 눌렀다.
강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녀석에게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보이면, 왠지 지는 것 같달까. 그래도 나름의 위엄(?)을 유지하고 싶었다.
* * *
그 무렵.
“설마 그 노인네가 열 받아서 끝장이라도 내버린 건…….”
K는 별장 앞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K가 떠올린 최악의 상황은 강후의 실력이 그의 성에 안 차서, 제대로 혼쭐을 낸 상황이었다.
한심한 암살자를 볼 때면 급발진할 때가 있는 노인네(?)인지라, 일말의 가능성에 걱정이 됐다.
천살노수의 지론은 간단했다.
쓸모없는 암살자는 언제든지 죽기 딱 좋으니, 내 손으로 끝내주겠다…… 같은 기적의 논리였다.
“오!”
다행히 걱정은 바로 해소됐다.
강후와 천살노수가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몸 여기저기 흙이 묻은 자국이 있기는 했지만, 둘의 상태는 양호해 보였다.
그리고 천살노수가 강후를 쳐다보는 시선이 꽤 부드러웠다. 깐깐한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다.
사실 K는 처음부터 강후를 믿고 있었다.
전에 무리 여왕을 혼자 잡은 것도 그렇고, 그동안 늘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 줬었으니까.
한달음에 두 사람 앞으로 달려간 K가 반갑게 손을 맞잡으며, 천살노수에게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형님?”
“제법 쓸만한 녀석으로 보이기는 하는구나. 물론 다듬어야 할 구석이 많다만.”
판단을 보류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하기는 하지만, 저것이 칭찬의 화법이라는 것을 K는 잘 알았다.
그의 속내를 정확히 번역하면, 실력이 꽤 괜찮고, 가르치고 싶은 게 많다는 내용이 나온다.
천살노수의 겉과 속이 다른 화법을 수십 년 경험한 K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K가 강후에게도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예. 좋은 가르침을 단기 속성으로 받았습니다. 제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셨습니다.”
천살노수를 시작부터 제대로 치켜세워 주는 강후의 모습에서 K는 융통성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비위를 맞춰 주는 말은 못 할 줄 알았는데, 아주 능구렁이처럼 칭찬을 풀어냈다.
그때, 천살노수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K에게 말했다.
“이 녀석과 단둘이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차만 한 잔 내주고, 자리는 비켜줄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형님. 좋은 차로 내어오겠습니다!”
K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만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건, 그만큼 강후와 좀 더 허심탄회한 얘기를 하고 싶다는 뜻이라서다.
제자로서 강후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신호인 만큼, K가 이 반가운 신호를 싫어할 리 없었다.
주선자의 행복이 이런 걸까.
이 일에서만큼은 철저하게 3자인 K지만, 둘의 인연이 맺어지는 과정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기뻤다.
누군가에게는 든든하고 실력 있는 스승, 또 누군가에게는 남부럽지 않을 제자가 생긴 것 같았다.
* * *
K가 자리만 세팅해 주고 빠르게 자리를 비우고 난 뒤.
천살노수가 원했던 대로 강후와 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오늘 처음 본 두 사람이었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분위기는 편했다.
앞서 시험을 치르면서 암살자로서의 교감을 나눈 덕분이었다. 둘에게는 충분한 대화였다.
천살노수가 먼저 말했다.
“혹시 저 녀석에게 등 떠밀려서 이 자리에 온 건 아니고?”
“자리 자체는 마스터 K께서 만들어 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꿈꾸고 원했던 자리인 것도 맞습니다. 기회가 없었을 뿐이죠.”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쉬운 건 없다. 강후가 지금 그에게 하고 있는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K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천살노수와의 인연도 생기지 않았을 터.
강후는 이렇게 연결된 귀한 인연의 고리가 값지게 느껴졌다.
인연이 없었더라면.
천살노수를 만날 기회는 중국에 있는 그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것밖에 없었을 테니까.
보통 그렇게 직접 찾아간 헌터들의 십중팔구는 죽는다. 그만큼 천살노수는 외부인에 적대적이다.
강후가 말을 보탰다.
“지금 자리까지 오르시게 된 것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느니, 남의 피를 제물 삼아 오른 자리이거니 수군대지만.”
“으흠.”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노력으로 쌓아 올린 공든 탑이라고요.”
“네가 뭘 안다고?”
“노력이 아닌 운으로 쌓아 올린 실력이었다면, 누군가의 피를 제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제물이 되셨겠죠.”
“살아있기에 노력인 것이다?”
“뒤집어서 해석하시려고 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죽는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과 도전이 운빨이 되는 것이고?”
살짝 날이 선 듯한 천살노수의 질문에 강후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