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천살노수 (3)
* * *
천천히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천살노수의 위치가 짐작은 됐지만, 실력 좋은 암살자답게 모습이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봤으면, 강동의 대현자 성좌를 이용해 은신 추적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처음부터 완전히 은신하고 숨어 있는 상태였기에, 짐작 외에는 찾을 방법이 없었다.
사실 강후도 고요의 바다 팔찌에 있는 ‘억제’ 옵션을 쓰면서, 은신 싸움으로 갈 수도 있었다.
피차 서로 보이지 않으면, 노림수를 갖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천살노수도 지금처럼 강후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면서 공격을 할 수는 없었다.
‘이왕 해야 하는 문제 풀이면, 아는 문제여도 꼼꼼하게 검산하는 것도 기본기 강화에 좋겠지.’
강후는 천살노수의 힘을 더 느껴보고 싶었다. 또 은신하지 않고 버텨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숨는 건 너무 쉽다.
하지만 숨지 않고 당당하게 대응한다면, 그만큼 그에게 많은 어필이 될 터다.
한데 바로 그때.
우웅!
“……?”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의 어딘가로 마력이 확 빨려 들어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천살노수가 스킬을 쓰려는 건가 싶었는데, 빨려 들어간 마력이 급격하게 응축되더니.
홰앵!
곧바로 강후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력 단검?’
천살노수의 스킬을 알아봤다.
마력 단검.
실체화된 무기가 없어도, 마력을 단검의 모양으로 만들어 날려 보낼 수 있는 공격이다.
당하면 단검처럼 꿰뚫리고 찢기는 것은 똑같기에 단검과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까다로웠다. 무기가 없더라도 무한대에 가깝게 계속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쿠웅!
“큭!”
무결의 벽으로 마력 단검을 막아낸 강후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렸다.
강후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나뭇가지 사이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천살노수가 보인다.
공격 행위로 인해 은신이 풀렸기 때문이다.
강후는 우선 강동의 대현자 성좌를 이용해 재빠르게 천살노수를 지정했다.
이젠 그가 은신을 해도 쫓아갈 것이다. 절대로 그의 위치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타탓!
강후는 천살노수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가 이미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만큼, 도약을 활용해 신속히 나무를 올라야 할 듯했다.
‘일단 선택지 하나부터 자르자.’
강후는 천살노수가 자신의 접근을 막기 위해, 어떤 대응을 할지 예측하고 있었다.
선택지 자체는 다양하나, 공통의 키워드가 있었다.
암흑기. 그가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쓸법한 스킬은 전부 암흑기 기반의 스킬이었다.
【무의 질서】
그래서 꺼내든 것이 순흑의 구도자 성좌의 다섯 번째 특전인 무의 질서였다.
자신의 암흑기를 제물로 삼아, 상대의 암흑기도 같이 태워 버리는 것.
그리고 상대의 암흑기 활용 스킬을 일정 시간 동안 봉인해 버리는 것!
강후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암살자로 레벨도 더 높고, 오랜 시간 수련했을 천살노수의 암흑기가 훨씬 더 많을 테니까.
【무의 질서가 집행되었습니다.】
【대상의 암흑기가 훨씬 더 많으므로, 등가 교환에 따라 일부 암흑기만 증발하였습니다.】
【대상의 암흑기 스킬이 30초간 완벽하게 봉인됩니다.】
‘됐어.’
회심의 미소를 지은 강후는 나무에 단검을 박아 넣으며 단숨에 도약으로 뛰어올랐다.
“……?”
한편, 천살노수는 갑자기 일어난 스킬 봉인에 놀랐다.
암흑기가 순간적으로 증발하면서, 육체 전반에 대미지가 들어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온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더니, 암흑기 관련 스킬이 전부 ‘X’ 표시가 뜬 것이다.
별도로 활성화된 디버프 알림에는 ‘무의 질서’라는 표시와 함께, 30초간 암흑기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알림이 표시됐다.
‘천라 환영술’을 이용해 접근하는 강후를 골탕 먹이려던 천살노수의 계획이 깨진 것이다.
강후가 어떤 식으로든 임기응변을 발휘할 것이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했었다.
하지만 그 임기응변이 천살노수 자신의 암흑기 스킬들을 봉인하는 방법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녀석이!”
천살노수가 몸을 뒤로 훌쩍 날리며, 나무를 오르는 강후를 향해 마력 단검을 투척했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공격을 허용할 만큼 거리가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따앙! 까앙!
강후가 무결의 벽으로 마력 단검을 받아냈다.
계속 내구도가 쭉쭉 깎이는 것이 보였지만, 아직까지 몇 대는 더 받아낼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대미지.
천살노수의 명성에 걸맞게, 무척 손쉽게 던지는 듯한 마력 단검이 강후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막아낼 때마다 왼쪽 팔꿈치 전체가 울리는 느낌. 벽을 끼고서도 아릿한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짜 무기는 쓰지도 않았는데, 초반 탐색전에서 힘을 엄청 빼고 있네.’
강후는 자신과 천살노수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차이를 여실히 실감했다.
용납할 수 없다거나, 분하다거나 하는 어리석은 감정이 들진 않았다. 그는 상당한 실력자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마음먹고 여기에 온 것은 시작부터 진심이었다.
청출어람도 배움을 얻고 난 다음에 이루는 것이지, 만남 전부터 이뤄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때.
후웅!
마력 단검이 또 날아들었다.
그런데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인내자 성좌의 효과가 발동되어 대상을 상대로 5%만큼 스킬 회피율이 증가합니다.】
낮은 확률이긴 하나, 스킬 회피율이 적용된 것이다.
덕분에 강후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던 마력 단검이 마치 뭔가에 이끌린 것처럼 휘어져 나갔다.
‘레벨 차이에 0.01을 곱해서 회피율을 얻게 되는 것이 인내자였는데. 내 레벨이 255니까…… 천살노수는 755인 건가? 엄청나군.’
강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천살노수의 레벨이 꽤 높았다. 이 정도면 거의 장시환에 근접하는 수준.
그때.
타앗!
강후가 꿋꿋이 마력 단검 견제를 받아내며 접근하자, 거리를 벌리기 위해 천살노수가 도약했다.
이번에는 아예 다른 나무로 옮길 요량인 듯했다. 그래서 강후도 나름의 견제구를 던졌다.
【화룡창】
화르르륵!
품에서 꺼낸 강격의 장창에 화룡창 스킬을 덧씌워서는 천살노수의 도약 예측 지점으로 날렸다.
‘거리 벌리기는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 이거냐?’
천살노수가 공격적인 대응을 선택한 강후의 패기에 감탄하며, 자신도 대응 방식을 바꿨다.
멀리서 견제하는 식으로 강후를 괴롭혀보려 했는데, 이렇게 나온다면야 정면 승부를 해 줄 수밖에.
파팟!
나무에 박혀 있는 강격의 장창 끝을 사뿐히 밟은 천살노수가 가볍게 몸을 날렸다.
【신영】
그러자 천살노수의 모습이 마치 형체를 종잡을 수 없는 귀신을 보는 것처럼 흩어지고 늘어졌다.
강후가 멈칫했다.
분명 자신을 향해서 도약한 것이 맞는데,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은신은 아니다. 그랬다면 강동의 대현자 성좌의 효과를 받아 확인됐을 테니까.
‘귀신 그림자. 신영 스킬이군.’
이내 활용한 스킬을 간파한 강후가 망설임 없이 정면으로 훌쩍 도약했다.
천살노수는 여전히 자신에게 정면으로 날아오고 있다. 단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은신도 아니고, 환각도 아닌.
엄밀히 따진다면 정유리가 검은 연기 형태로 몸을 바꾸는 것과 비슷한 능력이었다.
보이지는 않게 되지만, 그것을 은신 탐지나 환영 간파로 발견하려고 해도 볼 수 없다.
“…….”
강후가 최대한 집중했다.
보려고 할수록 보이지 않는다.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몸이 가는 대로 반응한다.
막연할 수 있지만, 막연하지 않은 다른 방법보다 훨씬 성공률이 높은 방법이었다.
다음 순간.
“……!”
희미한 기척을 느낀 강후가 오른손을 힘껏 빼며, 동시에 왼손을 쭉 뻗었다.
콰악!
“큭!”
한발 늦었다. 천살노수에게 오른손을 붙잡히고 만 것이다.
하지만 당하고 끝나진 않았다. 강후 역시 천살노수의 팔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서로가 허공에서 마주쳤고 이젠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제법이구나.”
“안녕하십니까?”
짧은 인사가 오가고.
슈우우!
서로 사이좋게 추락했다.
그 와중에 강후는 추락 이후 대응보다, 천살노수를 좀 더 압박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증오】
【‘원념’ 장갑의 증오를 발동, 마력을 활용하여 악력을 극대화합니다.】
꾸드드득!
이내 천살노수의 손목을 움켜쥔 강후의 원념 장갑에 힘이 들어가자, 천살노수의 표정이 변했다.
공중에서 추락하는 중인 만큼, 암묵적으로 일단 안전하게 착지할 그림을 볼 줄 알았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서로 얽힌 채로 떨어져, 무릎이든 어디든 박살이 날 판이었다.
물론, 강후는 나름의 보험이 있었다.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에 그림자 걸음으로 그림자를 흩뿌리며, 그림자와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충격을 최소화할 생각이었다.
“이놈이!”
천살노수가 아예 자폭을 할 요량인 듯한 강후의 모습을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지금은 골려줄 때가 아니라, 일단 광기를 한 번 눌러줄 때다. 실전과 시험은 엄연히 다르니까.
꽈악!
공중에서 천살노수가 바로 강후의 양손을 잡은 뒤.
하체를 끌어올리면서 그대로 두 발로 힘껏 강후의 가슴을 찼다.
평범한 발길질이 아니었다. 스킬의 탈만 쓰지 않았을 뿐, 마력이 잔뜩 실린 한 방이었다.
퍼억!
“크윽!”
“후!”
가슴에 정통으로 천살노수의 발을 얻어맞은 강후가 신음을 토하며, 공중에서 뒤로 쭉 밀려났다.
천살노수도 공중제비를 돌면서, 일단 뒤로 빠지며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그림을 그렸다.
강후는 역시 천살노수라는 생각을 했다.
천살노수는 자신에게 위기가 될 수도 있었을 상황을 다시 비틀어, 유리한 그림으로 짰다.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은 천살노수가 될 터. 여기서 속 편하게 두 발이 땅에 닿을 리 없다.
강후는 천살노수의 후속 동작을 보진 못했지만, 암살자의 직감으로 그의 수를 읽었다.
한 박자 늦게 지면에 착지할 자신이 가장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방향!
【무결의 벽】
그곳으로 벽을 펼쳤다.
그리고 충격으로 확 숙였던 머리를 들었을 때.
까앙!
역시 정면에서 날아든 마력 단검이 무결의 벽에 부딪혔다.
치이익!
중심을 제대로 잡을 새도 없이 강후의 몸이 뒤로 쭉 밀렸다.
앞서 경험한 것보다 위력이 세 배 이상은 강한 마력 단검이었다.
【그림자 걸음】
강후가 후방으로 그림자 걸음을 펼쳤다.
이미 중심이 무너진 상태라, 정상적으로 재정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천살노수의 손끝을 떠난 마력 단검이 또, 강후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잠깐의 숨돌릴 틈도 천살노수는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허락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그림이겠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쿠드드득!
지면이 들썩이더니, 강후가 딛고 선 땅이 액상화됐다. 늪에 빠진 몸처럼 되기 직전이었다.
파팟!
강후가 미리 펼쳐 뒀던 그림자와 위치를 바꿨다.
그림자 걸음 스킬이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늪에 빠진 제물 신세가 되었을 뻔한 상황.
하지만 기지를 발휘하며 강후도 위험에서 벗어났고, 이제야 땀 한 방울을 식힐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당돌한 놈…… 제법이구나.”
지금까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에 변함이 없던 천살노수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