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250화 (250/304)

250화 천살노수 (2)

“느꼈나?”

“이동하려는 길에 숨어 기다리고 계신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죠. 먼저 가시죠.”

“음?”

“같이 시험 보실 건 아니잖습니까.”

강후가 우측면으로 보이는 샛길을 가리켰다. 그쪽으로도 K의 별장으로 갈 수는 있으니까.

“내가 말을 해 주기도 전에 이미 알아차려 버렸군.”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서 가시죠. 시험을 다른 반 선생님과 치를 순 없으니까요.”

“그래. 조심해서 오도록 하고, 절대 무리할 필요는 없어. 위험을 감수하진 말라는 얘기야.”

“그것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별장에 잘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K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즉, 별장으로 가는 동안 다양한 형태로 천살노수의 방해를 받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걸 뚫고, 무탈하게 별장에 도착해야 천살노수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겠지.

“조심해!”

K가 걱정이 되는지, 다시 힘주어 말했다.

천살노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시험이 필수지만, 위험한 것도 역시 알기에 조심스러운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늘의 자리를 주선해 놓고 뒤늦은 후회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K는 꼭 강후가 천살노수의 마음을 얻어, 가르침을 받았으면 했다.

“어서 가십시오. 여기에 계시면 제가 집중이 안 됩니다.”

“그래. 얼른 가지.”

K가 바로 샛길로 사라졌다.

【감각 집중】

그러자 강후가 곧바로 감각 집중 스킬을 썼다. 가장 먼저 강화한 것은 시각이었다.

“…….”

확장, 확대된 시야 속에서도 천살노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보일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눈에 띌 정도로 형편없는 암살자였다면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테니까.

대신 강후는 마나의 흐름이 유독 이질적인 곳에서 특이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나뭇잎이나 가지가 살짝, 투명한 뭔가에 눌려 있는 모습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것이다. 마치 왜곡의 사선의 투명화 버전처럼 말이다.

일단 이 상태에서 강후가 시각 강화를 멈추고, 후각 강화로 이어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느껴지지 않던 다양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흡사 개가 된 것 같은 느낌.

그중에 천살노수의 냄새, 그러니까 사람 냄새는 나지 않았다.

천살노수가 없는 것이 아닐 터다. 그가 냄새까지 완벽하게 숨겼기 때문이겠지.

‘일단 보이지 않는 선을 깔아놨고. 기척은 숨겼고. 원작의 내용대로면 열기는 있을 텐데.’

기억을 더듬어가며, 강후가 촉각을 강화시켰다. 그러자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선선한 바람 속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열기. 그것은 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일 것이다.

‘무형무진이군.’

강후는 그제야 천살노수가 구사할 수 있는 다양한 스킬 중에 하나임을 알아차렸다.

무형무진.

보이지 않는 선을 얽히고설키도록 설계해 두는 스킬이다.

강후가 쓰는 왜곡의 사선 스킬이 한 개의 줄을 만들어, 적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라면.

무형무진은 왜곡의 사선이 여러 줄의 구성으로 있는 형태다.

절단 능력은 왜곡의 사선에 비하면 살짝 떨어지지만, 위협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함정이나, 다른 공격 수단과 연계하는 것도 가능했다. 일종의 알람 기능도 있는 셈.

그래서 무형무진을 건드리면 갑자기 땅이 푹 꺼지면서, 아래로 빠져서 죽는다거나.

혹은 미리 설치해 둔 다른 낙석류 함정에 걸려서, 그대로 생매장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후우…….”

강후는 심호흡을 하며 무형무진의 상태를 다시 파악했다.

눈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선은 단 한 개도 없다.

전부 마나의 흐름과 주변 자연 지물의 모습, 그리고 특유의 열기로 판단을 끝내야 한다.

마치 제3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 새로이 선이 덧칠된다.

강후만이 느끼고 볼 수 있는 무형무진의 흐름. 이내 안전한 루트와 아닌 루트가 판단된다.

【가속】

타다다닷!

강후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보폭을 늘리며 달린 강후의 몸이 어느새 진형 가까이 접근했다.

강후는 천살노수가 분명 어디엔가 모습을 숨기고, 자신을 꼼꼼히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말은 무형무진을 안전히 통과해도, 다음 공격이나 견제가 어디서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파앗! 팟! 파팟!

강후가 힘주어 도약했다가, 몸을 바짝 낮춰 지면을 거의 기다시피 움직이기도 했다가.

어느 위치에 이르러선, 아예 몸을 직각으로 틀어 림보를 하듯 넘어가기도 했다.

묘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야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무형무진이 고약한 형태로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치와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강후이기에 그나마 통과할 방법이라도 찾을 수 있는 거지.

만약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왔다면 운 좋게 몇 개는 지나쳤어도 결국은 죽었을 그림이었다.

‘테스트에 진심이네.’

강후는 느꼈다.

천살노수가 단순히 간 보는 수준으로 판을 짜 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심은 진심으로 대하는 법. 그래서 강후도 더욱 속도를 내며 돌파하기 시작했다.

K가 이동한 샛길이 아닌, 주요 길목을 따라 어떻게든 별장에 도착하면 시험은 끝난다.

그러면 천살노수가 차근차근 보면서 판단할 시간을 주기보다,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뚫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써먹어 볼 수 있는 수단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상대의 노림수를 최대한 제한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는 것!

강후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 * *

같은 시각.

‘이놈 봐라. 내 눈으로 직접 보라고 일부러 저렇게 지나가는 건가? 이건 의도적이군.’

천살노수는 자신이 촘촘하게 펼쳐 놓은 무형무진을 통과하는 강후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지나가도 어지러울 정도로 일부러 복잡하게 무형무진을 짜 둔 천살노수였다.

그래, 나름의 악취미였다.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를 대상으로 ‘시험’을 해 볼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최대한 어렵게, 복잡하게 꼬아서 극한까지 몰아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작정하고 짜 둔 무형무진이었는데, 강후가 까다로운 구간을 부드럽게 넘어가고 있었다.

오감을 뛰어넘은 육감까지 발달 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어. 확실히 기본은 잡혀 있는 녀석이군.’

천살노수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가장 경멸하는 암살자 스타일 1순위는 화려함을 추구하는 암살자였다.

그런 암살자는 필연적으로 많은 자잘한 동작과 쓸모없는 퍼포먼스를 잔뜩 섞는다.

최단 경로, 최대 효율, 일격필살의 수로 타깃을 노려야 하는 암살자와 상극인 스타일이다.

한데 강후는 모든 과정에서 필요한 움직임만 최소한으로 쓰고는 매끄럽게 지나갔다.

몸도 최대한 움츠리면서 외부에 노출되는 면적을 좁혔고, 시선도 한 곳에만 두지 않았다.

최대한의 경계와 최소한의 노출이 공존하는 모습이 마치 노회한 자신을 거울로 보는 듯했다.

이후로도 천살노수는 강후의 실수를 ‘기대’하고 꾸준히 움직임을 봤지만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천살노수 나름의 무형무진 패턴에 적응했는지 속도가 더 붙는 모습.

‘그렇군.’

확실히 그랬다.

가까이서 무형무진을 꼬고 비틀면서 설계할 때는 별생각 없이 쭉 만들었는데.

멀리서 다시 보니, 일정한 간격과 패턴이 보였다.

좁은 시야로는 볼 수 없던 것이 넓은 시야로 보니 보이는 셈.

무형무진을 활용한 1차 시험은 무난하게 통과하는 그림이다.

사실 여기에서 고전하길 바랐지만, 난 놈은 난 놈인지 한 번을 막히지 않았다.

‘오만하게 으스대지 마라. 시험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당사자는 오만하게 군 적도, 뭐라 말을 한 적도 없었지만, 천살노수의 악취미는 이미 발동됐다.

강후에게 관심이 가면 갈수록, 호기심이 생기면 생길수록 강후를 더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싶었다.

그런 혹독함까지 이겨내야만 자신의 제자가 될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잖은가. 천살노수의 제자는 개나 소나, 아무나 탐낼 수 있는 자리여서는 안 된다.

제자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품격이 필요하다.

* * *

“후.”

1차 구간으로 보이는 무형무진 구간은 잘 통과했다.

확실히 한 번 감이 잡히기 시작하니, 이후로는 미리 몸을 피하면서 움직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설계자인 천살노수가 무형무진을 짜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패턴을 보인 것도 한몫했다.

이를테면 세 걸음 혹은 네 걸음 단위로 안전 지역을 만든다거나. 반대로 위험 지역을 만드는 식.

본인은 나름 변주를 준다고 생각하고, 규칙성을 깼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지만.

막상 다 만들고 나서 보면, 일정한 흐름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실수다.

어쨌든 그렇게 무형무진 구간을 통과하고 나니, 이번에는 울창한 숲이 바로 강후를 반겼다.

워낙 많은 나무가 햇빛을 잔뜩 받고 높이 자라 있는 탓에 시야 확보가 쉽지 않았다.

대낮인 상황이 무색하게 숲 안쪽은 어두웠다. 음침하고 음산한 느낌이 날 정도.

‘은신 능력은 정말 일품이네.’

강후가 여전히 티끌 하나도 보이지 않는 천살노수의 존재를 느끼며 웃었다.

중간에 한 번쯤은 인간미가 날법하게 은신을 풀거나, 혹은 작은 체취라도 흘리게 될 법도 한데.

지금까지 강후는 천살노수가 어디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천살노수가 자신을 공격하려고 마음먹는다면, 그땐 기척을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겠지.

이윽고 강후가 햇빛이 끊기는, 숲 안쪽으로 한 걸음 힘주어 내딛는 순간.

스카앙!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울창한 나무 사이의 나뭇잎을 뚫고 뭔가 날아들었다.

처음엔 단검이나 표창 같은 무기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끝이 뭉뚝한 커버로 덮여 있는 볼펜이었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맞아도 되는 볼펜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펜이 아니라 단검이었으면, 스치기만 해도 뼈와 살이 다 터져나갔겠는데.’

볼펜을 감싼 붉은 꼬리가 뒤로 쭉 이어지고 있었다.

마력이 잔뜩 실려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다는 뜻.

볼펜을 날렸는데 저 정도면, 진짜 무기를 썼을 때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다.

【무결의 벽】

강후가 무결의 벽을 펼쳤다.

그림자 걸음이나 신속 회피를 써 볼까 했지만, 날아오는 펜이 한두 개가 아니었던 탓이다.

애초에 모든 회피 경로를 차단하려는 듯, 어림짐작으로도 열 개가 넘는 펜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펜들은 하나 같이 강후가 회피처로 삼기 좋은 방향을 전부 향하는 중이었다.

‘암살자 마음은 암살자가 가장 잘 안 다는 건가.’

방어하는 나라면 그쪽으로 피했을 것이기에, 노리는 나로서는 무조건 차단하고 싶은 경로.

천살노수는 강후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회피 경로의 선택지를 모두 차단해 버렸다.

그렇다면 무결의 벽을 들고 몸으로 직접 때워낼 수밖에. 스킬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다음 순간.

투웅!

왼팔을 들어서 올려 막기 형태로 무결의 벽을 펼친 강후가 손쉽게 볼펜을 막아냈다.

충격에 몸이 살짝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대미지는 완벽하게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보호 결계라던가 석화로 대응했으면 큰 충격이 전해졌을 한 방.

하지만 무결의 벽 앞에선, 그저 힘없이 벽에 부딪혀 떨어진 장애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같은 시각.

‘허?’

너무 쉽게,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을 본 천살노수의 표정이 이채를 띠었다.

암살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방어 스킬이 불쑥 튀어나왔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없는 특이한 스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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