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천살노수 (1)
* * *
인천 공항에서 서울역으로 이동한 강후는 K가 준비해 준 안전 리무진을 타고 이동을 시작했다.
한 번 타는 가격을 생각하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뜨악하게 되는 것이 리무진 비용이지만.
K의 배려 덕에 100원도 안 내고 타는 리무진이라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탑승하자마자 기사는 출발하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는 바로 중간 창을 올렸다.
덕분에 강후는 창밖을 보며, 편하게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한 것은 무결의 벽의 내구도 충전을 하는 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무결의 벽 스킬을 스킬창에서 확인한 뒤, 현재 내구도에 맞춰서 마력을 불어넣으면 됐다.
마력을 1,000이나 잡아먹는 하마라서 그런지, 충전에 제법 시간이 걸렸다.
강후의 마력 총량이 적은 것과 별개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듯이 필요한 절대 시간이 존재했다.
그렇게 1,000의 내구도를 완전히 채우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5분. 1분에 200 정도가 올라간 셈.
전투 중이 아닐 때나, 지금처럼 자유로울 때면 마음 편하게 충전을 할 수 있겠으나.
전투 중에는 재충전을 하는 것이 썩 쉬워 보이지 않았다.
전투 중에도 내구도를 충전하려면, 다른 것보다 마력 관리가 대단히 어려울 듯했다.
스킬은 스킬대로 써야 하고, 내구도 충전을 위한 마력은 마력대로 또 써야 하니까.
매드 솔라키움을 먹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한 마력 총량이 많아지는 것의 문제다.
어쨌든 충전이 끝났다.
내구도가 333을 넘어간 순간부터 ‘무조건’ 한 번은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상태도 활성화됐다.
든든했다.
암살자가 정말 챙기기 힘든 방어 기제를 히든 스킬 하나로 쉽게 해결할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서둘러 노르웨이에 다녀온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흑 성소도 한 번 다녀와 보고 싶기는 한데…… 문제는 신성(神聖)과의 단절이군.’
강후가 순흑의 구도자의 네 번째 특전인 영체 훈련에 대한 내용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다녀오고 싶은데, 문제는 여기를 가게 되면 신성력과 관련된 성좌와 아예 접점이 끊긴다는 점이다.
‘어차피 신성력에 관해 굵직한 성좌들은 이미 이 시점에 다 가질 놈들이 가진 상태기는 하지만.’
네임드라고 불릴 법한 성좌들은 이미 다 계약자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엘리자베스나 에밀리아.
둘을 제외하고도.
나름 국내외에서 신성력 다루기에 일가견이 있다는 헌터는 계약이 마무리되어 있다.
하지만 차원 강탈자처럼 특별한 관심을 끌어야만 계약할 수 있는, 미계약 성좌가 하나 있긴 했다.
전장의 천사.
원작에선 엘리자베스가 북한에서 공략 활동을 하다가 계약하게 된 성좌다.
계기는 교잡종 토벌이었다.
전장의 천사가 죽어도 죽지 못한 취급을 받는 교잡종을 토벌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고는.
그녀가 교잡종, 그러니까 망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준다고 ‘착각’해서 나타난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목적은 당연히 그것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착각으로 좋은 계약을 맺게 됐다.
‘열세 개의 별 중에서 가장 활동력이 떨어졌던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생각하면…….’
전장의 천사 성좌가 자신과 계약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강후였다.
엘리자베스를 미래의 적으로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반대로 동료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엘리자베스의 속내가 예측되지 않았다.
차라리 채관형처럼 장시환의 편일 것 같다거나, 타카시처럼 돌아설 요소가 있다거나.
둘 중 하나로 생각이 명확하게 정리되면 좋겠는데, 엘리자베스는 쉽게 가늠되는 부분이 없다.
‘천살노수와의 만남이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면, 북한에 다시 갈 타이밍을 잡기는 해야겠어.’
돌아가는 일정이 바쁘다.
지금 계획대로면 천살노수를 만나고, 이후에 그루 길드와 관련해서 던전 공략이 있을 예정이고.
그다음에 타락 시리즈와 관련해서, 아야네와 함께 독일에 용병으로 다녀올 일이 있고.
이어서 강복화를 통해 1등급 부적인 인페르누스에 손을 대 볼 기회가 생긴다.
인페르누스 건이 가장 뒤로 밀린 이유는 아까 서울역에 도착할 즈음에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부적을 가진 유족이 베트남에서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얘기였다.
아마 부적의 효과와 옵션을 탐내고, 목숨을 담보로 도전하는 헌터들이 많다는 얘기겠지.
강후는 따로 가로채기를 당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원작을 직접 읽고 방법을 알아낸 것이 아니고서야, 부적을 길들일 방법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후우.”
강후가 눈을 감았다.
노르웨이에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도 잠을 꽤 많이 잤는데, 이상하게 피곤했다.
예전에는 항상 몸이 100% 긴장 상태였다면, 지금은 쉴 때는 몸도 같이 제대로 쉬어주는 느낌.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다는 것이 나쁜 조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만큼, 느슨해지는 것은 경계하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노리기 좋은 먹잇감은 빈틈을 노출한 적이 아니다. 자고 있는 적이다.
* * *
그 무렵.
쾅!
장시환이 책상을 내리쳤다.
양 주먹으로 내리치는 것 정도로는 분이 안 풀렸는지.
화르르륵!
책상을 붙잡은 채, 흑마법을 이용해 통째로 불태워버렸다.
진멸의 불꽃.
손이 닿은 모든 대상을 발화시켜,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독한 흑마법이다.
“X발! X발! X발!”
비싼 책상을 태워 먹고도 분이 안 풀린 장시환이 계속 욕지거리를 해댔다.
얼마나 불같이 화를 냈는지, 옆에 있던 채관형도 깜짝 놀라서는 장시환을 달랠 정도였다.
“그쯤 해. 뭐 이렇게 열을 내고 있어? 우리가 진 것도 아니고, 여전히 할 만한 상황인데 말이야.”
“X미, 뭐가 할만해. 이 좆같은 새끼야. 어? 지금 동두천에 갖다 부은 대가리가 몇 개인데, 어?”
“와……. 너 이렇게 욕을 찰지게 할 줄 알았냐? 다른 의미로 꽤 매력적이다?”
“닥쳐, 좀.”
평소답지 않은 장시환의 모습에 채관형이 오히려 웃었다.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매번 성인군자 행세할 때마다 고구마 백 개는 먹는 느낌이었는데.
본심에 가까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니, 역시 내 친구다(?)라는 생각이 드는 채관형이었다.
한편.
“…….”
채관형의 뒤에 도열한 세 간부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있었다.
정화 길드의 서열 3위, 신태석.
4위 김대만, 5위 최사라까지.
이 자리에 정화 길드의 Top 5가 모두 모인 셈이었다. 최사라는 유일한 여자였다.
“후우.”
한숨을 토해낸 장시환이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고도 상황이 어색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다들 미안합니다. 화가 주체가 안 돼서.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을 사과하지요.”
“갑자기 왜 존댓말이야?”
“너한테 말하는 거 아니야.”
장시환이 채관형을 째려보았다.
옷매무새를 다시 단정히 한 장시환의 얼굴이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방금까지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눈에 담긴 독기는 전혀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장시환이 말을 이었다.
“심연과의 상황이 이 지경까지 꼬인 건, 문유석의 배신이 조기에 발각됐기 때문이에요. 은밀히 포섭한 문유석이 왜 갑자기 죽었을까요?”
장시환이 신태석, 김대만, 최사라에게 차례대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들에게도 문유석의 죽음은 의외였기 때문이다.
“문유석을 포섭한 건은 우리 다섯만 알고 있던 사실. 이 정보가 내부에서 새지 않고서야, 문유석이 갑자기 이현석에게 죽을 리가 없잖아요?”
“네 말은 우리 다섯 중에 배신자가 있다?”
“정확히는 너랑 난 제외하고.”
“허허.”
“배신을 한 것까진 아니더라도, 분명 입을 가볍게 놀린 사람이 있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장시환의 말에 옆에 있던 채관형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신태석의 어깨에 손을 슬쩍 올렸다.
“어이, 태석이. 너냐?”
“아닙니다.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은밀하게 추진한 건을 함부로 떠벌리겠습니까?”
“김대만이. 너 술 좋아하잖아? 술 먹다가 다른 년들에게 지껄여댄 건 아니고?”
“절대 아닙니다, 대장.”
“최사라. 넌…… 됐다.”
채관형이나 장시환이나 여기서 범인 찾기가 의미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괜한 화풀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현석이 영리하게 내부자를 찾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다만 장시환이 분노를 참지 못한 것은, 이현석이 죽지 않은 탓에 모든 계획이 꼬여버려서다.
문유석의 배신이 발각되지 않고 이현석을 제거했다면, 심연이 통째로 정화 길드에 흡수됐을 터.
하지만 계획이 무너져버린 탓에 지금 정화 길드는 동두천 일대에서 심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앞서 장시환이 한 말대로, 거기서 희생된 정화 길드의 헌터가 벌써 100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모두 소중한 자원이고, 정화 길드의 고급 인력들이다.
정예 헌터 하나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생각한다면 여간 아까운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현석이 문유석의 배신을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지금 우리 정화 길드가 쓸데없이 발목을 오래 잡히게 됐어요.”
장시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이현석에게 문유석에 대한 귀띔을 해 준 것이 강후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장시환의 최우선 척살 대상은 이현석이 아닌 강후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가 어디에서 샜는지 알 리 없는 장시환은 속만 부글부글 끓을 뿐이었다.
장시환이 연달아 한숨을 토해내며 최대한 속을 진정시킨 뒤. 정리된 생각 하나를 내어놓았다.
“치안청에 연락하세요. 모든 전력을 다 소집해서 보태라고. 서울에서 쫓겨나기 싫으면.”
새로운 지원군에 대한 계획이었다. 바로 정화 길드 2중대라고 불리는 치안청에 대한 건이었다.
* * *
안전 리무진을 타고 편하게 유리 랜드에 도착한 강후가 입구에서 K를 만났다.
지난번처럼 문형서나 황보혜가 없는 상태에서 직접 강후를 맞이하게 된 K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내가 모양이 너무 빠지는데? 문지기라도 하나 구해야 하나 싶구만.”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늘 잘 지내지. 그나저나 자네는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 요즘 잘 먹고 잘 자고 있는 모양이야?”
“잠은 정말 많이 잤습니다.”
“그래. 잘 수 있을 때 자 둬. 마음 편하게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이잖나.”
별 의미 없이 던진 말인 듯하지만, 강후는 K의 마지막 멘트가 꽤 인상적으로 들렸다.
욕심이 많을수록, 세상에 더 치열하게 도전하는 헌터일수록. 그만큼 위험도 높아지는 것이 사실.
누군가에게 노려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밤과 어둠, 그리고 외로움이 두려워진다는 뜻도 된다.
강후가 물었다.
“어디로 이동합니까?”
“전에 말한 대로 내 별장으로 이동할 거야. 내가 욕심을 좀 냈어.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와 형님과는 좋은 사제지간이 될 것 같아서 말이야.”
“감사합니다.”
“늙은이가 너무 오지랖인가 싶기도 해.”
“아뇨. 그만큼 배려하고 챙겨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지금부터…….”
바로 그때.
“잠시.”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강후가 자리에 멈춰 섰다. 동시에 K의 손을 잡았다.
다음 순간.
이어질 상황을 직감한 강후가 K에게 물었다.
“지금부터 시험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