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무결의 벽 (2)
* * *
그놈은 암살자가 아니다, 라는 대답과 함께 천살노수의 악담이 이어질 줄 알았던 K.
하지만 긴 침묵을 끝내고 운을 뗀 천살노수의 첫 멘트는 생각과는 결이 달랐다.
“암살자의 탈을 쓴 돌연변이지. 순수한 암살자가 아닌 녀석을 과연 내가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형님, 그렇지만…….”
“기다려. 내 말 안 끝났다.”
K가 하고 싶었던 말이 하나 있다면, 천살노수 역시 순도 100%의 암살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 역시 암살자와는 결이 다른 스킬을 제법 갖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했다.
K는 순혈 운운하는 천살노수의 말이 그의 이상한 열등감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의 태생이 순혈이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
하지만 내면 속에 숨겨진 나름의 상처를 알기에 K는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삐뚤어진 순혈주의 때문에 천살노수는 김신령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템을 개조하고 원래의 성질을 바꿔버리는 그녀의 세공 능력이 반가울 리 있을 리 없다.
천살노수가 말을 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가르칠 순 없지. 적어도 자기 스스로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된다는 것은 증명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형님.”
“그리고 모든 결정은 내가 하는 거다. 그놈을 위해서 내가 스승이 되어 준다? 아니야. 나를 위해 그놈이 제자가 되는 거지.”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K가 장단을 맞춰 주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K는 이미 천살노수가 강후에 대해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그를 곁에서 보면서 알게 된 특유의 화법이 있기 때문이다.
천살노수가 자존심을 더 높게 세우려고 할수록, 역설적으로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본인은 아니라 하겠지만, 원래 자기 자신에게는 객관적인 판단이 안 되는 법이다.
이쯤이면 강후가 천살노수의 시험만 잘 통과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듯했다.
물론 강후가 갑작스러운 시험에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언질을 주긴 해야 할 것이다.
K가 곧바로 강후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귀국하는 대로 자신에게 연락을 달라고.
천살노수도 언제까지 국내에 머물지 모르는 만큼, 만남은 최대한 서두를수록 좋다.
* * *
공략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온 강후와 박동재는 ‘박동재 루틴’에 맞게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오슬로 대성당 주변에는 벤치가 정말 많이 있어서, 어디든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실제로 관광 명소이기도 했기에 찾아와 사진을 찍는 관광객도 정말 많았다.
시원하게 맥주 한 모금을 쭉 들이킨 강후가 박동재에게 물었다.
“동재야.”
“어?”
“언제 말해 줄 거냐? 안에서 뭔가 얻었을 거 아냐. 나는 스킬이라고 얘기해 준 것 같은데.”
박동재는 히든 스킬이 없기 때문에 강후가 히든 스킬을 얻었다는 알림이 가진 않았을 터.
그래서 강후는 박동재에게 괜찮은 공격용 스킬을 하나 얻었다고 말해 둔 상태였다.
언젠가 히든 스킬의 존재가 알려지긴 하겠지만, 굳이 그 시기를 앞당길 필요는 없으니까.
“아차! 사실 약간 넋이 나가 있어서, 형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었어.”
“어쩐지 네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말을 안 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사람이 너무 기쁜 일이 생기면, 순간 멍해지고 할 말을 잃게 된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했는데.
산 증인이 눈앞에 있다.
박동재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 멈춰 있었는데, 아마 얻은 스킬에 대해 살피고 있는 중일 것이다.
“디버프 스킬을 얻었어.”
“오?”
의외였다.
버퍼와 디버퍼가 구분되는 이유는 보통 스킬의 특화도 그런 방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본 스킬 분화가 다르다. 버퍼는 꾸준히 플러스 요소의 버프 스킬을 얻게 된다.
강후는 박동재가 버프 쪽으로는 완성도가 꽤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그런데 여기에 디버프 스킬까지 추가된다? 그의 활용 가치와 응용 능력이 대폭 향상되는 셈이다.
“게다가 스킬 숙련도도 시작부터 MAX야. 미친 거지. 이건 정말 미친 거라고!”
양손을 부르르 떨고 있는 박동재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감동적이기까지 할 때의 표정을 보는 듯했다.
차원 강탈자의 효과를 보는 강후에게는 숙련도 최대가 항상 기본값이라 별 것 아니지만.
사실 대다수 헌터에게는 숙련도 최대 스킬은 하나를 만들기도 매우 어려운 형태였다.
부단히, 오래, 꾸준히 사용하면서 훈련해야 몇 년에 걸쳐 하나를 만들 수준인 것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숙련도 최대인 스킬을 떡 하니 얻었으니, 박동재가 이게 현실이 맞나 싶어 하는 것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무슨 스킬인데 그래?”
“패배주의.”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네.”
흥미로운 이름이다.
“일단 타깃을 하나 지정하면 방어력을 계속 약화시킬 수 있는데, 최대 50%까지 가능해.”
“미쳤는데?”
강후의 입에서도 바로 미쳤다는 말이 나왔다.
디버퍼가 다루는 디버프 스킬류 중에서 가장 높은 가치로 통하는 것은 방어력을 깎는 디버프다.
약칭 ‘방깎’ 스킬이라고 불리는데, 이 디버프의 가치가 높은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가 강할수록, 방어 능력이나 방어 스킬의 수준이 높을수록 감소 효과가 더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방어 능력이 좋아서 1의 대미지를 받고 끝낼 수 있는 공격도 2를 받게 된다.
감소 효과가 있는 만큼 보호막, 방어막도 동일 피해량에서 기존보다 빨리 파괴되는 것이다.
“지정 안 하면 광역으로 쓸 수 있어. 이때는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적이 최대 25%까지 약화. 스킬은 마력 먼저 소모하고, 마력이 부족하면 체력 갖다 쓰고.”
“방깎 졸업이네, 이거.”
“……믿기지가 않아, 형. 이거, 다 형 덕분인 거잖아. 형 따라와서 지금 내가 완전 대박 난 거잖아! 안 그래? 손 떨려, 살 떨려, 그냥 다 떨리는 것 같아…….”
박동재의 말대로 그가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떨고 있었다.
강후의 말대로 적의 방어력을 깎는 디버프 스킬 중에 최고 스킬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통 방깎이 10%, 15%만 들어가 줘도 대박이라고들 말한다. 없어서 못 찾는 디버퍼가 된다.
그런데 박동재는 광역 25%, 단일 50%를 얻은 것이다.
“축하해. 진짜 잘됐네.”
히든 스킬이라는 이름만 안 붙였지, 히든 스킬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만큼 사기다.
“형. 나, 이건 진짜. 이 스킬은 형을 위해서만 쓸…….”
“개소리는 그쯤하고.”
강후가 박동재의 뻘소리(?)를 미리 차단했다.
어쨌든 강후에게도 박동재의 디버프 스킬 확보는 아주 좋은 소식이었다.
이제 박동재와 던전을 공략하면 1+1=2.5 개념이 아니라, 1+1=3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듯했다.
“진짜 고마워, 형. 다른 건 몰라도, 이 스킬을 얻은 건 정말 형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연습 많이 해 둬. 나중에 아주 등골까지 빨아먹을 정도로 디버프 많이 쓰게 해 줄 테니까.”
“눈 감고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할 거야. 와…… 앞으로 며칠은 잠 못 잘 것 같네.”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간 기쁨이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박동재를 보니 뿌듯했다.
무결의 벽을 세우고.
박동재의 방깎 디버프에 걸려서 약해진 몬스터나 적을 쉽게 썰어 버리는 그림.
간단하게 상상만 해 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깔끔하고 완벽한 그림이었다.
이후.
강후는 바로 귀국했다.
항공편은 그루 길드의 배려로 노르웨이에 왔을 때와 같이 퍼스트 클래스였다.
오는 길에는 체력 안배 차원에서 강후도 잠을 계속 잤는데, 기내식 한 번 먹지 않고 잠만 잤다.
그렇게 돌아온 인천 공항.
박동재와는 다음에 그루 길드에서 던전 공략 요청이 오면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박동재가 리무진을 타고 떠나는 것까지 확인을 끝낸 뒤, 강후가 K에게 전화를 걸었다.
- 왔나?
“네. 방금 귀국했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 얘기는 잘 됐어. 내 별장에서 만날 자리를 잡을 것 같은데. 언제 올 수 있겠어?
“공항에서 바로 출발하죠. 가는 길이 좀 복잡하긴 하겠지만, 오늘 내로는 갈 겁니다.”
- 만나는 과정이 쉽진 않을 거야. 나름 자네에게서 테스트 해 보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야.
“그쯤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요.”
- 하긴. 신령이 만날 때도 그랬지? 온갖 함정을 다 거치고 나서야 겨우 만났으니.
“네. 어쨌든 어르신을 뵈는 자리니까 최대한 예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인사드릴 생각입니다.”
- 형님의 성격을 잘 아는군?
“뭐, 그 나이대 분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니까요.”
천살노수의 성격은 원작에서 직접 조형했기에 누구보다 잘 아는 강후였다.
투덜대면서 알려 줄 건 다 알려 주고, 싫어하는 듯하면서도 좋아하고 챙겨 주는 유형이다.
천살노수를 상대로는 쓸데없는 미사여구나 의미 없는 아부는 집어치우는 게 좋다.
그의 관심을 끌어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실력으로 검증받으면 된다. 그것뿐이다.
- 서울역까지만 와. 거기서 유리 랜드로 올 안전 리무진은 내가 마련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 그럼 곧 보자고.
천살노수를 이런 방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예전에 스킬 복사의 기회를 쓸 대상으로 생각했을 만큼, 천살노수는 실력 있는 암살자였다.
단지 스킬만 베끼기 좋은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았다.
원작에서도 장시환이 ‘내가 암살자였으면 천살노수에게 가르침을 청했을 텐데.’ 하는 멘트가 있을 정도다.
하물며 태생이 암살자인 강후로서는 깊은 가르침을 줄 천살노수와의 인연이 반가울 수밖에.
‘재밌겠어.’
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다만 천살노수의 ‘테스트’가 있다고 하니, 바짝 긴장해야 할 듯했다.
강후를 죽일 생각으로 테스트할 리는 없겠지만,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그와의 인연은 끝일 테니까.
강후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얼른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한편.
강후의 입국을 확인한 한 남자가 가져온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공항 내에서도 강후에게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강후를 알아보는 것은 쉬웠다.
남자의 시각은 정찰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확대, 축소해서 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의 이름은 김희운.
채관형의 직속 부하이자, 공유석과 고주희의 부탁으로 강후에게 파견된 ‘눈’이기도 했다.
주 직업군은 장시환과 같은 흑마법사지만, 미행과 정찰에도 특화된 별종이었다.
“도둑처럼 이렇게 미행을 하는 게 의미가 있나? 그냥 죽여버리면 미행할 필요도 없을 텐데.”
채관형의 직속 부하답게 김희운의 생각 역시 극단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놈을 계속 추적 관찰하라니 짜증이 날 수밖에.
“X발.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김희운이 욕을 내뱉고는 멀찍이서 강후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 거리에서 누군가 미행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것이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