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신호등 (2)
* * *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강후는 박동재의 버프 덕에 집중력이 한껏 올라간 상황을 이용해서, 전략적으로 초록 주먹을 맞았다.
경험치 바 위쪽에 반투명한 형태로 쌓이는 예비 경험치를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주먹을 맞을 때마다 예비 경험치가 채워지며, 빠르게 경험치 바의 끝까지 가더니.
몇 대를 더 맞자, 위쪽에 한 줄이 더 생기며 새로이 예비 경험치가 쌓였던 것이다.
그렇게 미리 쌓은 경험치가 레벨을 꽤 올릴 수준이 됐다.
데세오를 잡기만 하면, 바로 실제 경험치로 바뀌는 상태. 그러면 레벨이 쫙 올라 255가 될 듯했다.
‘박동재에게는 안 됐지만, 이건 독식이네.’
강후가 박동재를 흘깃 살폈다.
이왕이면 같이 혜택을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초록 주먹의 효과는 고생하지 않고서는 무임승차가 안 된다.
스르륵.
이내 데세오가 노란 주먹으로 바꿨다. 아마 초록 주먹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다 돼서일 터다.
‘계속 초록 주먹에 아슬아슬하게 맞는 형태를 유지한 것만으로도 밑밥은 충분히 깐 것 같은데.’
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암살자 입장에서 가장 좋은 상황은 상대의 생각을 간파하고, 역으로 노림수를 설계할 때다.
지금 데세오는 연이어 유효타 – 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하다 – 를 강후에게 먹인 상황.
그래서 사기가 크게 올라 있다.
실제로 강후가 초록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맞아 주려다가, 생각보다 깊게 맞았던 적도 있고.
그래서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강후에 대한 공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좀 더 받아 주다가 한 번에 역습을 걸어 버리면, 그때 확실한 타이밍이 잡히겠지.’
그림이 그려진다.
누군가를 뒤에서 밀치려고 했을 때, 밀침을 당할 뻔한 사람이 미리 알고 있다가 갑자기 피한다면?
밀치려고 했었던 사람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자기가 크게 다치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강후를 계속 찍어 누르고 있고, 그만큼 자신감도 붙어있는 데세오가 생각지 않은 역습을 당한다면?
단 한 번의 역습이어도 크게 다칠, 아니 죽을 수도 있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는 강후니까.
그래서 데세오의 공세에 장단을 맞춰 주는 연기를 하기로 했다.
상대의 호전성을 이용해, 역습 찬스를 만들어 내는 전략이다. 성공하면 효과가 매우 좋다.
강후가 박동재에게 미리 약속해 뒀던 손가락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박동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전투가 쭉 이어져 오는 동안, 중간에 꼬마 데세오들이 소환되는 패턴이 있었을 때.
박동재가 영리하게 버프를 활용해서 꼬마 데세오들을 괴롭힌 덕분에 전투가 수월했다.
가끔 마법을 쓰는 꼬마 데세오가 나왔을 때는 정신 집중 버프를 과도하게 걸어 죽이기도 했다.
정신 집중 상태를 너무 높인 나머지, 꼬마 데세오의 하찮은 뇌가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도 죽이는 것이 가능했다.
실제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시도했었던 박동재나 지켜본 강후나 모두 놀랐을 정도였다.
과부하가 걸려서 끝내 맛이 가버린 컴퓨터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렇게도 몬스터는 죽었다.
쿠오옷!
여전히 전투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데세오가 강후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앞서 전투에서 자신감이 올라간 탓인지, 초창기에 보이던 신중함도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림자 걸음】
강후가 그림자 걸음을 썼지만, 데세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강후의 본체만 쫓았다.
이미 강후가 전의를 잃은 듯이 한껏 연기를 하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검으로 허공을 헛치는 메소드 연기는 일품이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싸우는 것이 진정한 승리 아니냐고.
글쎄.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싸우다가 죽으면, 그건 진정한 패배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사람의 운명은 삶, 아니면 죽음으로 나뉜다.
멋지게 죽었다고 한들, 세상은 멋짐을 기억해 주진 않는다. 죽었다는 사실만 기억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강후를 끊임없이 승리하고,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온 원동력이었다. 데세오도 당연히 예외일 수 없다.
바로 그때.
‘지금이다.’
데세오를 후방에서 가장 노리기 좋은 타이밍이 왔다. 녀석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확 쏠렸다.
내면의 방어 기제 같은 것이 있었는지, 지금까지는 몸의 무게 중심을 줄곧 중간에 두고 있었는데.
승리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적극성을 이끌어 냈는지, 처음으로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파앗!
곧바로 강후가 데세오의 뒤에 있던 그림자와 위치를 바꿨다.
그리고 박동재의 가속 버프와 자신의 가속 스킬을 더해, 도약 스킬로 데세오의 목 뒤를 노렸다.
【대참수】
길게 잴 것 없이, 목 뒤에 대참수를 꽂자.
크아아아!
데세오에게 비명이 터졌다.
아무리 살이 두툼한 목 뒤쪽이라고 해도, 날카로운 검날에 무던할 수는 없었다.
평소와 같았으면 대참수 이후에 추가 공격을 이어 갔겠지만, 이번에는 전략을 바꿨다.
앞서 싸워본 데세오는 제법 맷집도 좋고, 무엇보다 고통에 대한 인내력이 제법 있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역습이 통했을 때.
곧바로 최종 단계까지 가지 않으면, 되려 역습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봤다.
【혈화】
퍼퍼펑!
바로 피의 꽃이 만개했다.
목 뒤에서 피의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데세오의 머리가 기형적으로 앞으로 꺾였다.
그 충격에 휘말려 몸 역시 앞으로 쏠렸고, 시야 역시 땅으로 꽂혔다. 강후의 위치를 놓쳤다.
【죽음의 불꽃】
강후는 이때 정확히 데세오의 목 뒤를 노리고, 죽음의 불꽃 스킬을 전개했다.
불꽃의 목적은 데세오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이걸로 한 번에 죽이는 것은 어렵다.
으크어어어!
목 뒤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휘말린 데세오가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냈다.
목 뒤에 상처가 생긴 것도 모자라, 폭발에 휘말려서 근육과 뼈에도 문제가 생긴 상태.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속살에 불까지 지져버리니, 몸이 제대로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리 근성과 인내로 버텨내는 정신력을 가졌다고 해도, 이 정도 고통은 규격 외였다.
데세오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강후에 대한 복수의 독기를 채워가는 동안.
【왜곡의 사선】
강후는 다음 페이즈를 준비하고 있었다.
최대치로 잡아당겨 만들어 둔 왜곡의 사선은, 적당한 높이에서 팽팽함을 유지했다.
선의 위치로 보면, 데세오의 목의 중간지점과 높이가 정확히 맞았다.
다음 순간.
경황이 없어서 강후의 위치조차 제대로 특정하지 못한 데세오에게 강후가 손을 뻗었다.
【납치】
이어지는 납치!
상대하는 몬스터나 헌터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근래 활용 빈도가 떨어진 스킬이지만.
무방비 상태에 있는 적을 상대로는 여전히 효과 좋은 스킬이었다.
다음 순간.
워억!
납치에 당한 데세오의 몸이 제대로 저항할 틈도 없이, 수평선을 그리며 강후에게 끌려왔다.
평소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오히려 강후와 데세오의 거리를 좁혀 주는 멍청한 짓이 됐겠지만.
‘살인 계획’이 착실히 설계되어 있는 지금은 달랐다. 데세오가 납치된 순간에 이미 상황은 끝났다.
왜곡의 사선이 펼쳐져 있는지도 모르고,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끌려온 데세오는.
뎅겅!
팽팽해진 상태로 날이 바짝 서 있는 왜곡의 사선에 걸려, 그대로 목을 베였다.
깔끔하게 가로선을 그으며 잘린 머리가 왜곡의 사선 아래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쿠웅!
이윽고 홀로 남은 데세오의 몸이 머리 잃은 닭처럼 제멋대로 몇 번 펄떡이고는 고꾸라졌다.
【레벨이 크게 올라 255가 되었습니다!】
레벨업 메시지가 떴다.
앞서 쌓아 뒀었던 예비 경험치가 전부 다 경험치로 바뀌었고, 덕분에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경험치 쌓기 없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략했다면, 레벨은 250을 겨우 찍었을 상황이었다.
“형! 레벨이 엄청 올랐어!”
심지어 강후처럼 따로 예비 경험치를 쌓지 않은 박동재도 갑작스런 폭렙에 놀랐을 정도.
하물며 대놓고 레벨을 크게 올린 강후의 기분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샤아아.
그때, 죽은 데세오의 몸에서 각기 다른 색깔의 구체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아이템이나 스킬북과는 전혀 다른 이펙트였다. 마치 구슬과 같은 것이 솟아오른 느낌.
동시에 강후와 박동재에게 메시지가 표시됐다.
【본 구체는 각각의 헌터에게 개별적으로 활성화된 보상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색깔의 구체에 손을 가져다 대면, 보상을 획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내부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0분이며,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공간에서 추방됩니다.】
‘드디어.’
강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장시환과 채관형에게 갈 뻔했던 큰 보상을 자신과 박동재에게로 화살표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단순하게 빼앗은 것으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다.
자신은 한 걸음을 따라가고, 상대는 거꾸로 한 걸음을 뒤로 뺀 셈이 됐으니까.
결과적으로 두 걸음 격차가 좁혀진 셈. 상대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채우는 과정의 큰 의미다.
“형, 이거…… 실화야? 나 이런 개별 보상으로 활성화되는 거 처음 봐. 맞춤형 보상인 건가?”
“들어가 보면 알겠지.”
강후가 웃으며 답했다.
좋은 보상이 있을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들어가면 다 알게 될 테니까.
“손이 왜 이리 떨리지?”
구슬 형태 구체를 가리키는 박동재의 손가락 끝이 가만히 있질 못하고 쉴 새 없이 떨렸다.
“들어가 봐.”
“형은?”
“나도 금방 들어갈 거야.”
고갯짓으로 구체를 가리켰다.
구체에 따라 보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어느 구체를 선택해도 자신에게 특화된 보상을 얻는 것은 똑같다.
“내가 가져도 되는 보상일까?”
“박동재. 내가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가져도 될까를 고민하지 말고, 갖고 나서 뭘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
“빨리 들어가라, 좀.”
“읍! 으앗! 알았어!”
강후가 감동에 찬 멘트를 쏟아내려는 박동재의 입을 틀어막고는 앞으로 쭉 밀었다.
팟!
그러자 박동재가 반사적으로 구체를 손에 쥐고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강후는 일단 죽은 데세오로부터 스킬 강탈을 마무리한 다음에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내심 데세오가 쓰던 신호등 주먹이 스킬로 분류돼 있었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아니었다.
아마도 고유 특성이었던 모양이다. 태생적으로 갖게 되는 특징을 보통 고유 특성이라고 부른다.
“어디 보자…….”
일단 스킬 목록을 쭉 살폈다.
전투에선 녀석의 신호등 주먹만 본 것 같은데, 정작 강탈 목록을 들여다보니 스킬이 꽤 많았다.
다만 강후에게 실속 있는 스킬은 적었다. 왜 녀석이 전투 중에 쓰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느낌.
한데 스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스킬을 왜 전투 중에 쓰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주먹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쓸만한 타이밍을 놓쳐서였을까?
【삼색진(三色陣)】
활용 가치가 높아 보이는 스킬의 설명 앞에서 강후의 시선이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