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신호등 (1)
* * *
“이중 던전은 말만 들었었는데, 진짜 들어와 보니 경험치가 장난 아니네. 형은 어때?”
“나도 꽤 올랐지.”
“와…… 진짜 미친 것 같네.”
박동재의 말마따나 여기서는 경험치 획득이 일반 던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레벨 1도 올리기 힘든 상황에서 3이나 올랐다. 현재 레벨은 248이었다.
다음에 13번 던전에 오는 헌터들은 이 특혜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보통 이중 던전은 한 번 외부인이 출입하고 나면, 불안정성이 해소되면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괜히 헌터들이 이중 던전에 들어가는 것을 기연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다. 흔한 일이 아니니까.
이동하는 동안, 강후와 박동재에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원작에서는 장시환과 채관형이 함정에 빠지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가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좋은 보상을 주되, 작정하고 굴릴 생각으로 들어가게 만든 이중 던전이라서 더 그랬다.
하지만 원작의 기억을 되돌려서, 안전 루트만 핀셋처럼 뽑아서 이동하니 아무 일 없을 수밖에.
그 덕분에 강후는 계속 박동재와 버프 연계 및 기동 연계를 훈련하며 공략을 진행할 수 있었다.
특히 박동재가 전투에서 다양한 변수를 창출할 수 있도록 강후가 꽤 집중적인 코치를 이어갔다.
강후와 몬스터에게 동시에 가속 버프를 걸어, 몬스터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하게 되는 그림.
마법 몬스터에게 정신 집중 버프를 ‘의도적’으로 과하게 걸어서, 되려 집중을 못 하게 하는 그림.
일부러 강후에게 버프를 걸어주지 않다가, 몬스터에게 반격할 때 순간적으로 걸어주는 그림.
이런 식으로 다양한 판을 짜 주었고, 흐름에 적응하며 박동재가 응용 능력을 키워갔다.
강후가 작정하고 방향성을 잡아 주니, 박동재의 학습도 꽤 빠르게 이뤄졌다.
무엇보다 박동재가 훈련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강후와의 시너지가 극대화됐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강후가 없는 다른 곳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욕심도 들었다.
지금보다 더 실력 좋은 버퍼가 돼서, 강후가 늘 1순위로 찾는 버퍼가 자신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다.
실전을 겸한, 다양한 훈련을 진행하며 전진하다 보니 어느덧 메인 보스 몬스터 구역이었다.
보스 몬스터의 이름은 데세오.
인간형의 몬스터로 복싱 선수와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주먹에 끼고 있는 글러브의 색깔이 LED 효과처럼 경우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 특징.
이 녀석을 죽여야, 원작에서 장시환과 채관형이 획득했던 기연을 활성화할 수 있다.
‘데세오의 첫 번째 패턴은 대결자를 지정하는 것. 이건 내가 받아 주면 되니까 문제는 없고.’
데세오는 시작과 동시에 한 명의 대상을 선정한다. 그것을 대결자 지정이라고 한다.
모든 어그로와 관심을 대결자에게만 쏟기 때문에 지정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원작에서는 장시환이 대결자 지정을 받는 바람에 초반에 근접전 양상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모든 패턴이 대결자에게만 집중되므로, 바꿔 말하면 대결자가 아닌 헌터는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빨간 주먹, 즉사. 노란 주먹, 마력 전체 증발. 초록 주먹, 피격 시에 획득 경험치 누적.’
그리고 신호등이라고 불리던 빨강, 노랑, 초록색 주먹에 대한 기억도 되짚었다.
빨간색 주먹은 맞으면 바로 죽는다. 그런 불합리한 판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싶지만, 진짜다.
가장 조심해야 할 주먹으로 이때는 죽고 싶지 않다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강제된다.
노란색 주먹은 피격당한 대상의 마력이 모두 사라지며 0이 된다.
강후에게도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나, 필요하다면 전략적으로 맞을 수 있는 주먹이기도 했다.
애초에 마력 총량이 적은 데다가, 어차피 강후의 마력 회복 메커니즘은 과민증에서 기인한 초고속의 마력 회복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통증이 유발되긴 하겠지만,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초록색 주먹은 데세오에게 잘 ‘얻어맞을’ 수 있다면, 꽤 좋은 주먹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대놓고 맞아버리면, 죽기 딱 좋다는 점이다. 마음 비우고 맞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영리하게 맞으면서 경험치를 누적한다면, 데세오가 죽었을 때의 보상은 상당히 커지게 된다.
“형, 괜찮겠어?”
“일단은 붙어보는 거지. 괜찮을지는 그다음에 보는 거고.”
“거리는 최대 거리로 잡아둘게. 내가 가까이 붙으면 괜히 어그로가 내 쪽으로 튈 수 있으니까.”
“그렇게 가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결자 지정 패턴이 있어서 강후는 어그로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이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박동재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고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버퍼의 포지션을 잘 안다.
카득.
강후가 품에서 꺼낸 매드 솔라키움 하나를 먹었다. 남은 개수는 12개. 아직은 넉넉하다.
“동재야.”
“어?”
“어깨 힘 좀 빼. 간다.”
강후가 거의 귀에 붙을 정도로 확 들려 있는 박동재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데세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강후를 맞이했고, 이내 양 주먹을 강후에게 뻗었다.
【‘광풍의 데세오’가 당신을 ‘대결자’로 지정했습니다.
당신이 죽기 전까지는 데세오의 모든 관심이 오로지 당신에게만 쏠릴 것입니다.】
길게 쓰인 알림 메시지.
한 줄로 정리하면, 난 한 놈만 패, 라는 뜻이다.
강후 입장에서는 박동재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으니 훨씬 편했다. 패턴이 있어서 고마울 정도.
바로 그때.
쿠오오옷!
데세오가 포효했다.
그러자 전장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는 주변 숲지대에서 한 무리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데세오를 쏙 빼닮은 작은 데세오들이었다. 꼬마 데세오라는 표현도 잘 어울릴 듯했다.
이 녀석들은 전부 노란 주먹을 장착하고 있는 상태. 한 대 맞을 때마다 마력이 초기화될 것이다.
원작에서는 채관형이 작은 데세오를 맡았지만, 지금은 강후가 양쪽으로 같이 커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크엣? 크에엣?
기세 좋게 등장하던 꼬마 데세오들이 갑자기 급발진하거나, 몸이 앞으로 확 쏠리더니.
이내 고꾸라지고, 앞에 있던 동족을 덮치고, 방향을 조절하지 못해 주먹이 얼굴로 날아갔다.
박동재가 놈들에게 통째로 가속 버프를 걸어버린 것이다.
예상치 못한 혜택(?)을 받은 녀석들은 제멋대로 움직인 몸을 가누지 못하고 사고를 내버렸다.
‘나이스 타이밍.’
판이 보기 좋게 깔렸다.
강후가 커버하기 전에 이미 박동재가 판단하고 상황을 만든 것이다. 원했던 그림이었다.
【분신술】
【그림자 걸음】
강후가 일단 분신을 만들어내서 데세오에게 붙였다. 녀석에게 잠시만 시간을 벌면 됐으니까.
그리고 꼬마 데세오들이 위치한 곳으로 그림자 하나를 보낸 다음, 바로 자리를 바꿨다.
으엣! 크엣!
그새 꼬마 데세오들이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래서 강후가 무리의 중심까지 파고들어서는, 한 번에 타격하기 좋은 선택지를 꺼냈다.
【뇌격진】
광역 공격 스킬.
꼬마 데세오 무리를 전부 타격할 수 있도록, 정확히 중심 지점에 뇌격진을 깔았다.
그리고 데세오 근처에 배치해뒀던 그림자로 다시 복귀.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다음 순간.
빠지지직! 빠직! 빠직!
으케케케켁!
무리 중심에 예쁘게 깔린 뇌격진이 강력한 전류를 쏟아내며, 일제히 모두를 타격했다.
‘좋네.’
강후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박동재가 현명하게 판단하고 시작부터 놈들의 스텝을 꼬이게 만든 덕분에.
뇌격진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뇌격진을 여러 번 쓰거나, 일부 녀석들은 단검을 써서 잡아야 했을 것이다.
‘이후로도 걱정 없겠어.’
데세오는 중간중간에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패턴을 발동시킨다.
보통 지원군을 소환하는 패턴인데, 지원군은 전부 강후를 타깃으로 삼게 된다.
그때, 지금처럼 박동재가 보조를 맞춰준다면 데세오에게 집중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듯했다.
크으으!
지원군의 몰살에 분노한 데세오가 노란색이었던 주먹의 색깔을 붉게 바꿨다. 즉사 주먹이다.
파앙!
그와 동시에 지면을 힘껏 박차며, 용수철처럼 강후에게 쇄도했다.
애초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날랜 녀석이기 때문에, 까딱 방심했다가는 크게 당할 수 있었다.
【신속 회피】
“흣!”
순간적으로 몸을 크게 비틀어가며 피한 탓인지, 입에서 자연스럽게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동재의 대지 모신의 가호로 활성화된 확정 회피 찬스는 무조건 빨간 주먹에 쓸 생각이었다.
현재 확정 회피가 활성화된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빨간 주먹을 대놓고 맞을 생각은 없었다.
후웃! 후웃!
그새 강후에게 다시 파고든 데세오가 원투 펀치를 간결하게 내밀었다.
움직임은 가볍고 경쾌한데, 주먹의 결괏값이 즉사라는 부분에서 상황은 매우 무거웠다.
그때.
강후에게 좀 더 유효한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어깨를 뒤로 빼는 데세오의 동작이 있었다.
데세오를 집중해서 보고 있어야 하기에 뒤를 전혀 돌아볼 수 없는 강후였지만.
박동재가 이 시기에 맞춰, 변칙적으로 버프 스킬을 쓸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앞서 이동하는 내내, 계속 박동재와 호흡을 맞춰 훈련해 온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강후는 박동재의 보조를 확신했고, 그래서 빨간 주먹이 위협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고속 전진했다.
……?
뒤가 아닌 앞으로 쏠리는 강후의 몸을 보면서, 데세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도약】
【대참수】
푸욱!
도약과 대참수를 연계한, 강후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일격이 데세오의 옆구리를 찢고 지나갔다.
크억!
후드드득!
강후 뿐 아니라, 데세오도 가속이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타격은 상당히 컸다.
보통의 상황이었으면 옆구리를 찢으면서 지나갔을 수준의 대참수 공격.
하지만 여기에 마주하고 다가오던 데세오의 가속이 더해진 탓에 피해 규모가 커진 것이다.
옆구리 살점이 주먹 반 정도 되는 크기로 찢겨 나갔다. 마치 다진 고기를 뭉쳐놓은 것처럼.
후웅! 후웅! 후웅!
생각한 것 이상으로 피해를 입었음을 직감한 데세오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이 틈을 노리고 강후가 다시 쇄도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름 영리한 판단이었다.
강후가 후방을 살짝 돌아보고는 박동재에게 엄지를 들었다. 딱 원했던 그림대로 연계가 이뤄졌다.
에엣!
이내 데세오의 주먹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주먹 색깔을 바꾸는 것은 데세오의 의지를 따라 가능하지만, 유지 시간에는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일정 시간 빨간색 주먹을 사용하면, 유지 시간이 끝났을 때 대기 시간이 존재했다.
결국 지금은 노랑, 아니면 초록을 고를 수밖에 없는데 녀석은 일단 초록을 선택했다.
물론 이 주먹이 상대에게 예비 경험치를 미리 누적시킨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데세오 기준으로 초록색 주먹은 다른 주먹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강한 주먹일 뿐이다.
‘이제 작정하고 경험치를 좀 쌓아볼까.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안 올 기회인데.’
강후가 완전히 풀린 가벼운 몸 상태를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여전히 데세오의 주먹은 위협적이지만, 잘 맞을 수만 있다면 위험을 큰 기회로 만들 수 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상황. 이건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