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노르웨이 (3)
큰 틀에서 보면 명가 길드도 아군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명가 길드와도 가까워질 필요가 있겠네. 그래서 나쁠 것이 전혀 없는 길드이기도 하고.’
나름의 셈이 빨라진다.
역시 정화 길드에 반감을 갖는 세력은 ‘없는’ 것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일 뿐.
“명가 길드와 좀 더 가깝게 지낼 방법이 있을까? 동재, 네가 다리를 놔주면 좋을 것 같은데.”
“형,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뭔데?”
“거기선 전부터 원하고 있었다는 거야. 형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내가 일부러 커트하고 있었어.”
“그건 몰랐군.”
“형이 원하기 전까지는 먼저 말 안 할 거라고 했거든. 그런데 이제 말해도 될 것 같네.”
명가 길드에서 강후가 정화 길드를 싫어할 듯한 냄새를 맡아서일까? 그 정도까진 아닐 것이다.
다만 꽤 이름을 날렸음에도 아직 정화 길드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보면…… 짐작은 하겠지.
“그럼 자리를 만들어 줘.”
“일단 형이 명가 길드와 친분을 원하는 그림 정도로 말해 둘게. 정화 길드에 딱히 형이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잖아?”
있지. 아주 많이 있다.
하지만 박동재에게 굳이 장시환과 자신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말을 할 필요는 없는 만큼.
박동재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어색한 웃음으로 넘겼다. 박동재도 더 묻진 않았다.
- 승객 여러분. 곧 착륙할 예정이오니,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라며. 좌석을…….
이내 들려오는 안내 멘트. 착륙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오슬로 공항이 눈앞이었다.
* * *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강후와 박동재는 마중 나온 현지의 남자 헌터를 따라 이동했다.
그에게 물어보니, 오유진의 요청을 받고 마중을 나왔다고 했다. 오유진과 친분이 꽤 있는 모양.
어차피 오슬로 공항에서 오슬로 대성당까지만 데려다주는 것이라, 여러 말이 오가진 않았다.
그래서 박동재와 창밖을 보며, 국내와는 다른 풍경을 두고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마침 대규모로 훈련 중인 헌터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언덕 위였다.
“저기 언덕에서 훈련하고 있는 헌터들은 전부 다 노르웨이 치안청 소속인 것 같은데.”
“응. 견장이 딱 치안청 견장이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노르웨이는 치안청 중심의 질서가 잘 잡혀있다고 들었어.”
“맞아. 여기선 치안청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헌터로서 명예로운 일이라고 하더라고. 실제로 특혜도 많이 받고 말이야.”
“우리와 영 딴판이군.”
“그러게. 씁쓸하게 말야.”
물론 노르웨이처럼 헌터 공기관이 주도권을 휘어잡고 있는 케이스는 그리 많지 않았다.
노르웨이가 오히려 특별한 케이스에 속한다. 대부분 국가의 기본값이 한국과 비슷했다.
미국은 치안청이 있긴 하지만, 각 주마다 쪼개져서 운영되는 탓에 서로 협력이 잘 안 됐다.
그러다 보니, 연방 차원의 통합 치안청을 설립했음에도 구속력이 없어 공조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은 아예 치안청의 목적성이 바뀌었다. 헌터 세계의 질서 중재가 아니라 민간인 보호인 것.
그래서 각지에서 길드마다 격전이 벌어지고, 대혈투가 반복되고 있음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대신 민간인을 함부로 건드리는 헌터에 대해서는 전력으로 그 죗값을 치르게 했다.
한국의 치안청이 추구하는 바도 이와 같았다.
적어도 정화 길드의 영향권 안에서는 치안청의 힘이 잘 발휘 되고 있는 중이기는 했다.
어느덧 도착한 오슬로 대성당.
현장에서 보니, 과연 열세 개의 던전이 보였고, 그 입구가 십자가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강후와 박동재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13번으로 넘버링이 된 던전의 입구로 향했다.
외국 헌터가 오는 일도 종종 있어서인지, 둘에게 딱히 관심을 보이는 시선은 없었다.
저마다 자기 할 일이 바쁜 모습이었다. 일단 둘이 누군지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편했다.
박동재가 마지막 정비를 위해서 잠깐 인근에 있는 마켓으로 갔을 즈음.
강후에게 새로운 메시지 하나가 표시됐다. 잠시 기억에서 잊고 있었던 내용에 대한 소식이었다.
【축하합니다. 정해진 대기 시간이 만료되고, 새로운 옵션의 활성화가 끝났습니다.】
‘아, 전에 타락한 신념에 왜곡 각성으로 단검을 먹였을 때. 새로운 옵션이 활성화된다고 했었지.’
기억이 돌아왔다.
그때도 메시지를 봤지만.
대기 시간이 언제 끝날지에 대한 기약이 없어서,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까먹었던 차였다.
아예 잊고 있었던 탓인지, 갑작스러운 메시지가 당황스럽기보다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갈구 – 적요석 3개를 이용하여 본 단검을 1등급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새 옵션의 내용은 적요석 3개를 제물로 해서, 단검을 한 등급 올리는 것이었다.
현재 강후가 갖고 있는 적요석은 총 2개. 하나를 더하면 가능해지는 계산이 선다.
‘적요석 하나를 추가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가. 워낙 구하기가 어려운 녀석이긴 한데…….’
적요석을 확정적으로 구할 수는 없다.
딱 한 군데, 적요석이 꽤 쌓여 있는 곳을 알고 있기는 한데 공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장시환이 다루는 아공간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림의 떡인 셈.
그나마 확률 높게 던전에서 구하려면 영국으로 가야 한다.
‘영국의 스핏파이어 길드를 이용하면 되기는 한데. 문제는 확률이군. 100%는 아니니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에 급하게 추진할 문제는 아닌 듯했다.
적요석은 뜬금없이 드롭되기도 하는 만큼, 이번 던전 공략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새로 추가된 옵션을 확인한 강후가 적요석 한 개의 필요성을 인지하고는 준비를 마쳤다.
박동재만 오면 바로 출발이다.
* * *
질주 본능.
정신 집중.
전략 통제.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강후에게 바로 들어온 버프였다. 전에 경험한 박동재의 버프 스킬이다.
【대지 모신의 가호】
【스킬에 대한 회피율이 소폭 증가합니다. 일정 시간 무피격 상태를 유지할 경우, 확정 회피가 가능한 가호가 활성화됩니다.】
“오호.”
“이건 처음이지?”
“그새 스킬이 하나 늘었네.”
“형한테는 효과가 아주 좋을 버프 스킬이지. 어때?”
“테스트를 좀 해 봐야겠는데.”
강후가 전에 없던 버프를 확인하고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스킬 회피율의 소폭 증가는 이 버프의 핵심이 아니다. 말 그대로 소폭 증가니까.
핵심은 특수한 조건을 달성하면 ‘확정 회피’가 가능한 가호가 활성화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강력한 스킬이 날아온다고 하더라도, 100% 회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확실히 버프 뽕이 없다가 생기니, 전투력이 평소보다 두세 배는 족히 올라간 느낌이었다.
버퍼를 한 번도 안 찾아본 헌터는 있어도, 한 번만 찾는 헌터는 없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 듯하다.
한편, 강후가 대지 모신의 가호 버프를 두른 상태로 피격 없이 시간을 쭉 보냈더니.
이내 몸을 감싸는 반투명한 형태의 기운이 생겨나며, 확정 회피가 활성화됐다.
마침 전방에서는 광기의 투석꾼이라는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름은 나름 한글화가 되어 있긴 한데, 돌멩이를 투척하는 고블린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했다.
강후가 일부러 녀석의 앞에 섰다. 그러자 녀석이 성난 표정으로 강후를 향해 힘껏 돌을 던졌다.
다음 순간.
휘익!
분명히 정상적인 경로로 강후를 타격했어야 할 돌멩이가 빗나가버렸다.
마치 순간적으로 같은 극의 자석이 만난 것처럼, 서로를 밀쳐내는 그림처럼 보였던 것이다.
“성능 확실한데.”
강후가 박동재를 보면서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이런 스킬이라면 강후에게는 활용 가치가 정말 높다. 스킬도 여유 있게 멀리 빗나가는 모습이다.
“형은 한 턴을 벌면 열 턴을 뽑는 사람이잖아. 이 버프 스킬 얻었을 때, 형 생각이 가장 먼저 나더라고. 어때, 개꿀이지?”
“이건 진짜 대박이네.”
“한 번 확정 회피하고 나면, 다시 활성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는 하는데. 그래도 충분히 좋지.”
“계속 활용해 보자. 전략적으로 어떻게 쓸지, 고민을 좀 더 해 봐야겠어.”
“콜.”
그때부터 강후와 박동재의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됐다.
새로운 버프 스킬까지 확인했더니 몸이 근질거리는 것이다. 참을 수 없었다.
* * *
이후, 초반의 공략은 딱히 변수 없이 진행됐다.
13번 던전이 크게 1구역에서부터 3구역으로 나뉘는데.
1구역에 해당하는 구간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일대 다수의 전투를 하지 않아, 복잡하게 흘러갈 일도 없었다.
덕분에 강후는 레벨을 243까지 확 끌어올릴 수 있었다. 경험치의 측면에서도 이득이 많았다.
1구역 끝자락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전투가 정리 페이즈로 들어가자 강후가 운을 뗐다.
“동재, 너. 버프가 더 좋아졌네. 숙련도 작업이 잘 된 것 같다.”
“맞아. 숙련도를 집중해서 많이 올렸지. 최근에 두 계단이나 올랐으니 체감이 많이 됐을 거야.”
“게다가 아까 역 버프 활용도 정말 좋았고.”
“괜찮았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逆) 버프.
몬스터에게 의도적으로 버프를 거는 행위를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왜 몬스터에게 좋은 일을 해 주는 건지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자기에게 딱 맞는 속도로 달려가던 몬스터에게 갑자기 예상에도 없던 가속 버프를 걸어버린다면?
스텝이 꼬여버리게 된다.
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고, 재수 없으면 발이 꼬여 넘어지다가 머리든 얼굴이든 깨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공격의 타이밍을 놓치거나, 오히려 노려지게 될 수도 있었다.
앞서 강후에게 목숨을 잃은 몬스터가 그랬다.
갑자기 가속이 확 걸린 탓에 강후의 공격을 피할 틈도 없이, 몸이 앞으로 쏠려 단검에 찔렸다.
심지어 단검에 입은 피해도 치명상으로 작용했다.
박동재에게 직접적인 전투 능력은 없다.
하지만 버프를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어지간한 전투 인력보다 효율은 더 좋았다.
그래서 강후의 체감은 박동재의 합류가 ‘1+1=2’ 정도가 아닌, ‘1+1=2.5’ 쯤은 되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강후 형.”
“응?”
“이건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형은 도대체 스킬을 어떻게 계속 추가하는 거야?”
“그건 영업 비밀인데.”
박동재여도 말해 줄 수 없는 부분은 존재한다. 성좌 그리고 자신의 태생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건 차치하고, 형이 쓰는 스킬마다 전부 출혈이 묻는 건 사기 수준을 넘어간 듯한데…….”
탐혈의 소마 성좌 덕분에 지금 강후의 모든 스킬 공격에는 출혈 효과가 발생하고 있었다.
지속 시간 자체는 길지 않지만, 일단 출혈이 발생한다는 자체로도 사기 소리를 듣기는 딱 좋았다.
하물며 버퍼의 입장에서 전장의 상황을 관조할 기회가 많은 박동재에게는 더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때.
주변에 더 이상 몬스터가 없음을 확인하고.
1구역 공략이 거의 끝났음을 확신한 박동재가 미리 준비해 놨었던 물병을 강후에게 내밀었다.
앞서 비행기에서 강후가 물병을 챙겨줬던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챙겨 주는 훈훈한 광경이었다.
다만.
“형. 그런데 형은 정화 길드의 장시환이나 채관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자연스럽게 이어진 박동재의 질문은 훈훈하지 않았다. 강후에게는 꽤 민감한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