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241화 (241/304)

241화 노르웨이 (2)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내게 거리감을 느낀다면, 당연히 도움을 제공할 리가 없겠지.’

가까워질 필요가 있는 사람과는 어느 정도 거리감을 줄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부터 보통 난이도가 아니었던 삶 때문에 지나치게 신중해진 것이 원인이다.

그 신중함이 어중이떠중이들을 엮이지 않게 한 것은 맞지만.

반대로 가까워져야 할 사람에게 벽을 치는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일 것이다.

박동재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강후의 마음에 좀 더 울림을 주고 싶었는지, 박동재가 말을 보탰다.

“형은 심지어 내 목숨을 구해 준 고마운 사람이잖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도 형이 조심하고, 거리를 두려는 게 느껴져.”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에게는 열어 줘. 그럼 더 많은 사람이 형에게 힘이 되어 줄 거야.”

“고맙다.”

“고맙긴, 무슨. 오히려 주제넘게 지껄인 건 아닌가 하는 자책도 잠깐 드네.”

“아냐,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네가 말해 준 게 고마울 뿐.”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박동재니까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강후의 눈치를 봤다면, 말의 시작도 못 꺼냈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만 해 줬겠지.

살짝 분위기가 딱딱해진 느낌이 들자, 강후가 화제를 바꿨다.

“동재야.”

“어?”

“혹시 이클립스나 흑사자에 대해 들은 것 있어? 궁금한 게 몇 가지 있는데.”

이어 강후가 말한 것은 앞서 바에서 바텐더 베니에게 들었던 썰이었다.

박동재가 들으면서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주의 깊게 듣는 모습이었다.

다 듣고 난 박동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안 그래도 요즘 세혁이 형 때문에 대전 쪽에 관심을 가져야 하다 보니, 그쪽으로 조사를 꽤 진행했었어.”

“역시.”

“하지만 워낙 썰이 많아서 가짜 정보가 많더라고. 블랙 네트워크를 통해서 교차 검증할 필요가 있었는데, 유의미한 결론이 나왔어.”

“흥미롭군.”

“일단 흑사자의 뒷배는 물증까지는 못 잡았지만, 까쉬마르 길드일 확률이 99%야.”

“증거가 없어 1%를 뺀 건가?”

“그렇지. 대놓고 본 것만 없고, 확인된 정황은 많아. 형, 모르지? 흑사자에서 숙청이 있었던 거.”

“숙청?”

처음 듣는 얘기다.

조직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니, 뉴스를 타고 밖으로 소식이 나갈 일도 없거니와.

원작에서도 흑사자는 깊게 다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전에서 청안 용병단, 이클립스와 대립각을 세웠으나, 가늘고 길게 오래 간 케이스였다.

딱히 정화 길드에 위협적인 조직도 아니었기 때문에, 장시환의 시점에서 다뤄질 일도 없었다.

“윗대가리 빼고 중견 간부들이 전부 물갈이당했어. 전부 친(親) 까쉬마르 길드 파로 바뀌었지.”

“까쉬마르 길드의 입김인가?”

“그것도 있겠고. 윗 대가리들이 까쉬마르 길드의 후원을 좀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알아서 체질 개선을 한 걸 수도.”

“어떤 그림이든 간에 까쉬마르 길드와 유착이 더 커졌다는 얘기인데.”

“맞아. 까쉬마르 길드가 여전히 국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해. 오쇼 용병단이 망해버렸잖아? 또 다른 수족이 필요한 거겠지.”

확실히 박동재는 정보통이 맞았다. 정보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서인지, 아는 것이 많았다.

베니에게 들은 썰보다 더 구체적이고, 검증의 출처 역시 명확하다.

박동재가 기내에서 제공된 샴페인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클립스는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해, 형. 강동현 위에 누군가 있어.”

“그 얘긴 전부터 있었지만, 강동현의 윗선이 나선 적은 없어서 다들 음모론으로 치부하더군.”

“아냐. 있어. 길드 간부 몇몇이 윗선과 관련된 길드에 유학, 전술 교류를 다녀온 정황도 있고.”

“오호.”

“정황상 포르투나 길드일 가능성이 좀 있어. 이건 확률로 따지면…… 50% 정도?”

“흑사자 케이스보단 낮군.”

“이클립스의 완전 내부 정보는 확인이 어려워서 그런 부분이 있지. 그런데 포르투나 길드가 맞다고 해도, 까쉬마르 길드처럼 적극적인 후원 포지션은 아냐.”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는 포지션을 잡고 있다?”

“빙고. 형도 알잖아? 포르투나 길드의 마스터가 얼마나 신중하고 치밀한 사람인지.”

“알지.”

포르투나 길드의 마스터, 케이시 렉스.

원작에서 장시환에게 그의 정화 길드가 북미, 남미 쪽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존재다.

속내를 다 말하지 않는 음흉한 구석이 있는 듯이 그려지기는 했어도, 장시환에게는 ‘항상’ 협조적이었다.

장시환의 요청이나 제안을 한 번도 거절하거나 넘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또한 엘리트들이 모여서 흐름을 선도하고, 악인을 단죄하며,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점에도 적극 공감했다.

그리고 같은 ‘마법사’였기에.

늘 장시환의 능력을 동경했다.

마법에 대해서 서로 많은 피드백을 주고받았고, 장시환 덕분에 많은 성장을 경험했다.

그래서 강후가 케이시 렉스를 장시환의 편에 설 헌터로 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장시환에게 등을 돌리기엔 그에게 진 마음의 빚이 많아서다. 마음을 많이 빼앗긴 상태기도 하고.

“어디서 들은 썰인지는 모르겠는데 꽤 날카롭네. 그 사람, 형이 둔 정보원이야?”

“아니, 그 정도까지는.”

강후가 베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칵테일 한 잔 값에 이런 고급 정보를 물어다 줄 줄이야.

예전에 클럽 하데스에서 얻었던 정보도 긴가민가했지만 진짜였는데. 정보의 신뢰도가 높다.

* * *

최대 고도에 오른 비행기.

승객들의 안정적인 수면을 위함인지, 승무원들이 전부 창문을 닫고 불을 껐다.

그러자 잠을 청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됐고, 박동재가 먼저 양해를 구하고 잠이 들었다.

한편, 강후는 아까 박동재와 나눈 대화 속에서 떠오른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었다.

‘원작은 장시환 중심의 서사로 전개됐지만, 여기에 가려져 있던 다른 인물들의 서사도 당연히 존재해. 그게 무조건 정의롭고 정상적일 수는 없어.’

아까 박동재가 이클립스와 포르투나 길드의 연관 가능성을 짚어줬을 때 들었던 생각이었다.

원작자로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글을 쓴 것은 맞지만, 보여줄 수 있는 부분만 보여줬다.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글에 녹여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다가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며 독자들로부터 비난을 듣거나, 분량 따먹기라는 지적을 받으니까.

그래서 케이시 렉스에 대해서도 원작의 장시환에게 필요했던, 긍정적인 일면만 보여줬을 뿐이다.

즉, 글자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선 자신의 ‘무의식’이 전부 채워버렸기에.

케이시가 진짜 음흉한 놈이었다거나, 장시환의 앞에서 선역을 연기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애초부터 원작의 부역자 엔딩에 맞물려, 지금 장시환의 모습도 달라진 상황 아닌가.

강후가 직접적으로 장시환의 상태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짐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녀석의 선은 위선(僞善)이라고.

선한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식이거나 이면에 묻혀버린 약한 자아일 뿐이라고.

‘국내에서 내 편으로 만들어 두면 도움이 될 세력이 심연만 있는 것은 아니지.’

생각이 확장된다.

이번에 전세혁과 평택 지부 기습을 함께하면서, 이현석을 살린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큰 가치를 갖는지 실감한 강후였다.

원작의 역사를 비틀었을 때, 강후에게 도움이 될 요소들은 여전히 더 남아 있었다.

‘명가 길드.’

바로 명가 길드다.

머지않은 시일 내, 명가 길드는 부산을 거점으로 둔 해영 길드에게 당해서 전부 몰살된다.

워낙 소수 정예였던 탓에 인해전술 앞에서는 답이 없었고, 모조리 쓸려버린 것이다.

물론 그 해영 길드도 결국 정화 길드에 먹힌다. 최종적으로는 정화 길드에게만 좋은 일을 한 셈.

“…….”

눈을 감고 있자, 머릿속에서 시간 흐름에 따라 원작에서의 국내 판도가 달라지는 것이 그려진다.

원작에서는 모든 것이 장시환을 중심으로 정리되고 통합되어야 했던 만큼.

그에게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정리가 되어갔다.

정화 길드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던 명가 길드도 마찬가지.

물론 장시환이 직접 나서게 만드는 악행을 그리진 않았다.

대신, 해영 길드라는 다른 칼을 빌려서 치는 차도살인지계로 깔끔하게 그들을 정리했다.

【장시환은 소수 정예이자, 능력 있는 헌터가 있는 명가 길드를 해영 길드가 공격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비록 서로 우호적인 관계까진 아니었어도 꼭 필요했던 엘리트 전력들.

그런 엘리트들을 단숨에 몰살시켜버린 해영 길드의 악행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이 원작에서 나온, 장시환이 해영 길드를 적으로 선포하고 공격하게 되는 이유다.

하지만 신강후의 입장에서 다시 해석하면 글쎄. 과연 저것을 선의라고 볼 수 있을까?

해영 길드가 명가 길드를 공격하도록 사주한 다음.

나중에 그것을 명분 삼아 해영 길드도 정리했을 수 있다.

장시환은 무조건 선(善)하다, 라는 전제만 필터에서 빼면 상황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달라지게 된다.

“나 참.”

강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엔딩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아니 거대한 공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치는 걸까.

자신이 직접 멱살 잡고 비틀어버린 미래이기에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원작에 적힌 내용이면 모두 꿰뚫고 있는 자신이기에 아는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내용을 곧이곧대로 해석해서는 안 됐다. 장시환에 대한 해석을 달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추리를 하듯이 상황의 퍼즐을 거꾸로 맞춰갈 필요가 있는 셈이다.

* * *

얼마 후.

강후는 곤한 잠에서 깨어난 박동재에게 시원한 물을 건넸다.

“잘 잤어?”

“대박…… 완전 꿀잠 잤어, 형.”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하나가 아니라 둘, 셋도 괜찮으니까 물어봐.”

“명가 길드의 기본 이념이나 방침에 대해서 혹시 들어 본 것이 있는가 해서.”

박동재는 명가 길드와 접점이 많은 헌터다.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

“한 가진 확실하게 얘기해 줄 수 있어. 명가 길드 사람들, 정화 길드라면 다 학을 떼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

“좀 더 자세하게.”

“정화 길드랑 척 질 이유가 없으면, 진즉에 정화 길드에 스카우트됐을 헌터들이지.”

“맞아.”

“전부 다 정화 길드의 민낯을 본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누명을 쓰고 척살당한 하얀 장미단에 지인이나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야.”

하얀 장미단. 강원도 정선에 본거지를 둔 용병단이다.

강남역 11번 출구의 테러 사건을 획책한 ‘범죄 조직’으로 누명을 쓰고 정화 길드에 토벌됐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지 얼마 안 돼서 뉴스로 접했던 소식이라 기억에 선명했다.

박동재가 말을 보탰다.

“정화 길드를 싫어한다는 공감대가 있는 헌터면, 세상 그 누구보다 가까운 동료처럼 생각할걸?”

이어진 내용.

그것은 꽤 흥미로운 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