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고요의 바다 (4)
* * *
아이템 테스트는 무려 2시간을 조금도 쉬지 않고 진행됐다.
중간에 김신령이 몇 번이고 강후에게 휴식을 권했지만, 정작 강후는 쉴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강후로부터 연신 불합격 판정을 받는 아이템을 보며 김신령이 시무룩해질 즈음.
강후가 갑자기 호기심을 보였다.
“이거. 이거는 괜찮은 것 같은데. 혹시 제가 구매해도 되겠습니까?”
김신령이 개조한 아이템에 대해서 가장 먼저 구매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강후가 김신령의 아이템 테스트에 적극적으로 응한 이유이기도 했다.
세상 그 어떤 헌터보다 먼저 성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신령이 물었다.
“그건 괜찮은 것 같아?”
“네. 억제 옵션에 빈틈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10분을 골고루 테스트했는데도 문제가 없네요.”
“팔찌인데 괜찮겠어? 가격도 2등급이라서 지갑을 좀 열어야 할 텐데?”
“이거 살 돈 정도는 있습니다.”
강후가 웃었다.
이 녀석은 2등급 ‘팔찌’로 기본적인 단가를 생각하면 최소 1,000억 원은 줘야 한다.
강후는 개조된 형태를 생각했을 때, 100억에서 200억 원 정도의 추가 지출 의사도 있었다.
“살 거야?”
“네. 얘는 욕심이 나네요.”
“좋아. 원래 팔찌 쪽으로 괜찮은 게 나오면 연락해 달라고 한 헌터가 있었거든? 하지만 녀석보다 너를 더 우선으로 챙겨줄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닌데.”
강후가 옵션을 다시 훑었다.
【고요의 바다 – 팔찌】
【등급 : 2등급】
【체력 +100】
【억제 –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암흑기, 신성력을 전혀 느껴지지 않도록 억제합니다.
상시 발동은 아니며, 계속 마력을 소모해서 해당 기운을 억제하는 구조입니다. 능히 미세적인 감지를 피해갈 수 있습니다.】
“원래는 마력을 200 올려주는 옵션이 있었어. 그런데 개조 과정에서 마력 옵션이 증발하고, 대신 억제가 들어간 거지.”
“마력과 바꿨다고 생각하기에는 억제 옵션이 너무 좋아 보이는데요.”
“자기 정체를 먼저 드러내기 싫어하는 헌터에게는 최고의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지.”
김신령의 말대로다.
기운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완벽한 은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암살자의 레벨 50 기본 스킬인 무영의 경우는 ‘기척’만 없애 주는 스킬이다.
즉, 소리나 발자취를 숨길 수는 있어도 헌터 특유의 자연적인 마력 방출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억제 옵션이 있으면, 통제가 가능하다.
마력을 사용해서 마력을 숨긴다는 것이 효율의 측면에서 볼 때는 나쁜 것이 사실이지만.
강후 같은 암살자에게는 은밀함을 강화할 수 있는 최고의 요소였다.
“제가 알기로 개조된 아이템은 시스템이 작명을 한 번 허가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맞아. 그래서 내가 이름을 바꿨어. 어때? 억제 옵션과도 결이 맞는 것 같지?”
“마음에 듭니다.”
고요의 바다.
달의 앞면에 위치한 평탄한 현무암질 대지 중 하나. 강후도 익히 들어본 이름이다.
되뇌이다 보니 이름이 각인되는 느낌도 있고, 김신령의 작명 센스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구매하겠어?”
“이왕이면 제가 기존에 착용하고 있던 팔찌는 팔고 싶은데요.”
“좋지. 내가 매입할게.”
“그럼 팔고, 사고. 이렇게 진행하시죠.”
“그래도 마지막 테스트에 가서는 합격점을 받은 것 같네? 나머지는 전부 불합격이지만 말이야.”
“원하시면 테스트 기준점을 낮춰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아냐. 그건 내가 싫어. 오히려 도전 정신을 자극받아서 좋은걸?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빈말은 못 하는 스타일이지?”
“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웬만해서는 안 합니다.”
능구렁이처럼 빈말 한 번 제대로 못 해서, 곁에 있는 사람이 섭섭해했던 적이 한두 번이던가?
하지만 안 되는 건 때려죽여도 안 된다. 되게 만든다고 한들, 어색해서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자, 그럼 거래 진행하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그러시죠.”
테스트도 끝났고.
강후가 원하고 있었던, 쓸만한 개조 아이템에 대한 쇼핑도 끝났다.
고요의 바다를 테스트하기 전까지는 만족스러운 것이 없어, 오늘은 공쳤구나 싶었는데.
막판에 일이 잘 풀렸다.
* * *
일사천리로 진행된 거래.
서로 돈이 오가고 나니, 통장에 남은 돈이 2,160억 원이었다.
많은 돈이 분명한데, 마음먹고 쓰면 1초도 되지 않아 없어질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
그래서 강후는 수중에 가진 돈이 많음에도, 돈이 많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계속 상위 아이템을 노리며, 스펙적인 부분에서 업그레이드를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현실의 안주를 주목적으로 한다면, 돈은 계속 쌓이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성장이 멈출 것이다.
이후.
김신령과 약속한 소환수 훈련이 진행됐다.
이번에는 전에 만났었던 흑랑이 아닌 은랑이 나왔다. 감지 능력이 극대화된 소환수였다.
녀석은 고요의 바다가 가진 억제 옵션을 테스트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스파링 파트너였다.
첫 시작부터 은랑은 강후의 위치를 전혀 특정하지 못했다.
김신령이 강후의 스킬셋이 가지는 사기성에 감탄했을 정도였다.
무영으로 기척을 숨기고, 기교의 장막으로 절대 은신 상태에 돌입한다.
여기에 은신으로 상시 투명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억제 옵션으로 기운까지 숨겨버리니.
어떤 갈래로 감각을 극대화해도 강후를 찾아낼 길이 없었다. 은랑은 바보가 됐다.
물론 파훼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일부러 강후를 기교의 장막 밖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장막은 범위형 스킬이고, 그 범위 밖으로 나가면 소멸하기 때문.
덕분에 강후도 겸사겸사, 기교의 장막 스킬이 가진 유일한 단점을 다시 되새기는 계기도 됐다.
완벽에 가까운 은신 상태인 강후를 찾기 위해.
은랑은 아주 작고도 미세한 변화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훈련이 됐고, 녀석은 자신이 발전시킬 수 있는 최대한도로 감각을 강화했다.
강후의 완벽한 은신이 은랑에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소환수 스스로가 자신의 지성을 자극해서 일으킨 변화인 것.
덕분에 강후도, 은랑도 서로 얻어가는 것이 많은 훈련으로 끝이 났다.
* * *
김신령과의 공식적인 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앞서 개조 아이템 테스트와 은랑 훈련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쓴 탓일까?
김신령이 건넨 차 한 잔을 마시며, 강후가 눅눅해진 몸을 소파에 깊숙하게 넣고 앉았다.
잡담이 오갔다.
딱히 귀담아들을 내용은 없지만 듣고 있으면 흥미로운,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김신령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후는 그녀가 천살노수에 대해 언급하자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천살노수와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천살노수 얘기는 궁금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살노수의 악명도 자자하고, 그의 스킬을 복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중국에 가지 못했기에 천살노수를 만날 기회조차 만들지 못한 것이 사실.
하지만 분명 천살노수는 강후의 레이더망에 들어와 있었던 중요한 인물이었다.
“아까 얘기했잖아. 천살노수와 K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젊었을 때부터 친했지.”
“그 말은…….”
“내가 K와 연인이 됐을 때, 천살노수는 나를 대놓고 싫어했어. 남자를 잡아먹을 관상이라나, 뭐라나? 이유도 참 같잖았지.”
“이유야 그렇다 치더라도, 3자가 남녀의 연애에 간섭할 필요가 있는 겁니까?”
“그러게 말이야. 문제는 깍듯이 존경하고 모시는 형님의 말을 흘려듣지 못하는 멍청한 남자였지.”
얼추 그림이 보인다.
강후의 생각과 달리, 우유부단한 K가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무너진 모양이다.
김신령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결국 우리는 헤어졌어. 나쁘게 헤어진 건 아니었기에 그 뒤에도 충분히 관계가 좋게 유지될 수 있었지. 그런데.”
“또 다른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천살노수는 내가 아이템을 개조하고 세공하는 것을 정말 싫어했어. 아이템에 장난을 치지 말라는데, 그게 왜 장난이지?”
“음.”
“자기는 원리원칙주의자라고 했던가? 순정이 아닌 개조된 아이템은 헌터에게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상한 개똥철학을 읊어댔지.”
“서로 감정이 상할 수밖에 없는 계기만 잔뜩 있었던 것 같네요.”
“응. 내게 있어선 연애부터, 그 이후의 헌터로서의 삶까지 전부 망쳐버린 미친 노인네지.”
“이해가 갑니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념이라는 것은 쉽사리 꺾이지 않는 만큼, 천살노수도 나름의 어떤 이유가 있기는 할 것이다.
다만 외골수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쌍방향 대화보다 일방적인 대화가 잘 어울릴 듯한 느낌?
어쨌든 그만큼 K와 천살노수가 가깝다면, 적극적으로 스승 요청을 해 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K의 속내를 들은 상황이다. 그는 자신과 천살노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려고 하고 있다.
‘꼭 스킬 복사가 아니더라도 배울 것이 많은 암살자이기는 한데……. 신념이 문제이려나.’
김신령의 말만 듣고 그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스승으로 둔다면 왠지 괴짜 스승이 될 느낌이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인격으로 보면 빵점일 것 같고.
실력으로 보면 만점일 노인.
그런 그가 K의 곁에 있다.
더 늦기 전에 확실하게 의사 표시를 해 두는 게 낫지 않을까?
* * *
김신령과는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다음 만남 때까지 김신령은 오늘 피드백 받은 아이템에 대한 수정 개조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강후로서는 그녀가 노력할수록, 구매할 만한 매력적인 아이템의 수가 늘어나는 것인 만큼.
헤어지기 전에 힘주어 응원 한 마디 더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낯간지럽게 파이팅! 같은 말까지는 못 해도, 기대하겠습니다 같은 말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렇게 별장을 떠나 포항역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오유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라티아 길드와 협의가 끝났다는 것이다. 일주일 안에만 도착하면 언제든 공략이 된다고 했다.
헌터그램을 통해 바로 관련 일정과 던전 정보까지 남김없이 인계받았다.
한편, 강후가 확인차 그루 길드의 요청은 무엇인지 묻자, 오유진이 메시지를 보냈다.
- 지정 구역에서 던전 입구까지의 이동, 공략 이후에 지정 구역까지 나오는 과정의 보안을 유지하고.
저희 소유 던전 중의 한 곳을 같이 가게 될 거예요. 당연한 얘기지만 ‘출혈’은 필수이고요.
강후 님의 노르웨이 건을 진행한 다음에 가도 괜찮으니까, 이후에 연락 주세요. 기다릴게요!
그루 길드 소유이면서, 보안이 필수인 던전. 평범한 던전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제주도에 던전이 꽤 많고, 그중에 가치가 높은 던전도 많은 만큼 기대는 컸다. 곧 알게 되겠지.
‘그러면 던전 공략은 확정이고. 이제 멤버 한 명을 확정해야 출발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마지막 퍼즐이 완성되지 않았다.
정유리, 타카시, 안영호, 전세혁, 반세영, 박동재, 아야네, 윤상미.
일단 최소 한 번은 가깝게 인연을 맺은 이름이 다시 떠오른다.
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누가 가장 자신에게 큰 이득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