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고요의 바다 (2)
* * *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잠시 그친 듯했던 폭우가 다시 시작되면서, 강후가 머무는 안전 호텔 창문도 연신 빗소리를 냈다.
밖에서 비를 맞을 때는 폭우가 달갑지 않지만, 안에서 쉬고 있으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방금 강복화에게 연락을 받은 강후는 일정을 다시 살피고 있었다.
일단 1등급 부적인 인페르누스를 가진 유족이 현재 베트남에 있다고 한다.
한국까지 오려면 아직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것이다. 짧게 잡아도 일주일.
강후로서는 굳이 또 서두를 것까진 없기에 알겠다고 했다.
다만 조만간 인페르누스를 손에 쥐어 볼 기회가 생길 듯했다. 여러모로 떨리는 작업이다.
한편.
습관처럼 틀어놓은 헌터 뉴스.
오늘은 무슨 소식이 있을까 싶어 봤더니, 마침 심연과 정화 길드의 전투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 현재 동두천시 일대에서는 범죄 조직 심연의 공격으로 인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화 길드의 마스터 ‘장시환’은 오늘부로 심연 길드와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악의 세력과 일체의 타협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이번 주 일요일까지 심연을 탈퇴하는 조직원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관용을 베풀겠다고도 말했습니다.
애초에 헌터 관련 언론 매체들이 전부 친(親) 정화 성격을 띠다 보니, 워딩에 이미 프레임이 짜여져 있었다.
헤드라인부터 범죄 조직 심연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선과 악의 구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매체에서 보도되는 내용들은 기자들이 즉흥적으로 쓴 내용이 아니다.
시청자들에게 전해질 단어의 의미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엄선해서 작성되는 것이다.
“음.”
스마트폰을 꺼낸 강후가 경기도 지도를 검색했다.
마침 원작을 쓸 때 참고했던 이미지와 똑같은 지도가 있어,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재 경기권 북쪽에서 정화 길드의 영역은 김포, 파주, 고양, 양주, 의정부다.
동두천은 심연의 영역에 둘러싸이게 되는 일종의 돌출부였다.
그리고 심연의 기반은 연천과 포천, 가평에 있고, 최근 양평, 남양주를 노릴 기회를 보는 중이다.
심연이 동두천에서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동두천에 던전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출부의 형태로 심연의 영향권에 들어왔기에, 삼면을 포위하듯 공격하기에도 좋았다.
즉, 방어하는 입장에서 전선이 넓어질 수밖에 없는 불리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 무렵에 이미 심연이 몰락했고, 정화 길드가 경기권 북부를 전부 장악했지만.
이현석이 원작과 달리,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있는 탓에 원작에 없던 전면전이 벌어진 셈이다.
누가 이길지는 쉽게 장담할 수 없을 듯했다.
정화 길드 간부 전원이 나선다면, 조기에 전면전의 불씨를 진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즉흥적이면서 파격적인 전략을 구사하기도 하는 이현석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리고 이현석의 명령이라면 죽음도 각오하는 흑호대와 적호대가 총동원된다면?
그때는 낙승을 장담할 수 없고, 핵심 간부의 목숨도 위협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레벨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헌터의 세계에 불사(不死)라는 개념은 없기 때문이다.
전략 전술의 열세나 인해전술의 공세 속에서 얼마든지 비명횡사할 수 있는 것이 헌터다.
“근황 확인 겸 연락이나 한번 넣어볼까 했는데. 지금 하면 민폐되기 딱 좋겠군.”
강후가 이현석에게 겸사겸사 메시지를 넣어볼까 하던 생각을 접었다.
그의 성격상 연락을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그런 거로 신경 쓰게 만들 때가 아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비 오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다 보니,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일단 장시환과 채관형의 기연을 가로채기 위해, 가기로 했던 노르웨이의 던전.
그루 길드 쪽에서 온 메시지에 따르면, 아직 협의 중이라고 했다.
2인이 강제되는 던전이기에 누구와 함께 갈까 고민 중인데, 어느 정도 마음을 정하기는 했다.
그리고 이예린을 통해서 중개를 받은 독일 쪽의 의뢰는 곧 답변을 들을 수 있을 듯했다.
아야네와 함께 손발을 맞출 기회가 생긴 만큼 기대가 됐다.
게다가 세트 아이템을 얻을 수 있으니 더욱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
그리고 요즘 강후를 자꾸 유혹하는 핵심 키워드인 북한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림자 걸음에 출혈을 추가하는 방향이나, 암흑기 파밍을 생각하면 북한행은 필수다.
원작의 업보(?)로 인해, 떡밥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가장 사전 지식이 부족한 곳이다 보니.
강후로서는 호기심이 많이 들면서도, 동시에 가장 긴장하게 되는 영역이기도 했다.
물론 성장을 위해선 반드시 가야 할 곳이다. 북한을 가지 않고 성장을 꿈꾸는 건 불가능하다.
“할 일이 많아서 나쁠 것은 없지. 할 것도 없고, 성장할 건덕지도 없는 게 문제지.”
강후가 앞으로도 빼곡하게 채워질 일정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는 성장을 해야 의미가 있는 존재다. 성장을 한다는 건, 늘 뭔가 할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즉, 할 것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때가 온다면.
그때는 헌터로서의 가치가 떨어진 때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드르르륵.
갑자기 울리는 스마트폰.
김신령의 연락이었다.
만날 준비가 되지 않으면,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었던 그녀다.
이제 준비가 된 모양이다.
“준비되셨습니까?”
- 응. 포항으로 올 수 있어? 계속 포항에 있기는 했는데, 일부러 위치는 말 안 하고 있었어.
“첫차로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 기다리고 있던 거야?
“그건 아니고요. 마침 일이 끝나서 쉬던 차입니다. 아 참,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는데요.”
- 뭔데?
“특수 재료를 하나 얻었습니다만. 세공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울러 아이템도 괜찮은 것이 있으면 판매해 주시고요.”
- 내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걸 물어보네? 얼마든지. 와서 직접 보고 얘기하자구.
“그럼 포항역에서 연락드리겠습니다.”
- 응. 도착 시간만 말해 줘. 내가 직접 나갈 테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 아직 면허증 압수당할 나이 아냐.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럼 곧 뵙죠.”
통화 종료.
시간이 살짝 뜨려는 찰나에 김신령으로부터 시기적절하게 연락이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일복이 있는 모양이다. 찾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끊이질 않는다.
* * *
다음 날 새벽.
포항에 내려온 강후는 역 앞에서 바로 김신령을 만났다.
보통은 가면을 쓰고 나오는 그녀인데, 오늘은 원래 얼굴 그대로 나왔다.
김신령은 자신의 얼굴을 두고 할머니니 노인네니 하지만.
강후의 눈에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동안 자체였다. 본래 나이에서 열다섯 살을 빼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바로 그녀의 차를 탄 강후는 이 차가 하나의 거대한 방탄 요새나 다름없음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타기 전부터 차체가 꽤 가라앉아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축된 안전장치들이 많았다.
“어쩌다 보니, 운전기사 역할까지 하시네요.”
“손님 모시러 온 건데, 뭘. 이번에는 내가 보자고 한 것도 있으니까 데리러 온 거야.”
“그럼 좀 편하게 가겠습니다.”
“아무렴. 내가 직접 운전해 주는 건데 편하게 가야지.”
룸미러로 뒤를 보다 강후와 눈이 맞은 김신령이 익살스럽게 윙크를 보냈다.
눈에 뭐가 들어가지 않는 이상, 한쪽 눈만 찡그리는 것은 안 되는 강후인지라.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뭐 하고 지냈어?”
“뭐. 북한에 다녀왔고. 무리 여왕을 잡았고. 담즙 하나를 얻어온 것이 최근 근황이네요.”
평택에 관한 얘기는 뺐다.
그녀가 알 필요도 없고, 알려줄 이유도 없는 정보니까.
북한 쪽 얘기는 공개해도 상관없을 것 같기에 별도의 검열 없이 오픈했다.
“담즙? 시체에서 그냥 짜낸 거야? 불순물이 꽤 많을 텐데?”
담즙이라는 말에 김신령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정제까지 다 한 완제품으로 받았습니다.”
“누가 정제를 했는데?”
“그건 모르겠습니다. 마스터 K가 업자에게 직접 맡긴다고 하셨습니다만.”
“그럼 그 할배가 한국에 와 있었나 보네.”
“그 할배?”
“누군지 몰라?”
“네, 업자가 누군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던데요. 당연히 저도 아는 바가 없기도 하고.”
“무리 여왕의 담즙. 이걸 순도 100%로 정제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어. 천살노수.”
“아……?”
“독으로 독을 정제하는 사람이거든. 천살노수 아니면 못 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천살노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강후가 자신이 갖고 있는 ‘스킬 복사’의 기회를 쓰려고 마음먹었던 헌터가 바로 천살노수다.
중국의 네임드 암살자이자 배울 것이 많은 헌터. 그가 마스터 K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가?
“전혀 생각 못 했습니다.”
“같은 암살자인데 안면이나 터보지. K가 일부러 말을 아꼈나 보네. 아니다. 천살노수, 그 노인네 성격이면 아무나 만나진 않지.”
김신령이 천살노수에 대해서 아는 바가 꽤 있는 듯했다.
마스터 K와 천살노수, 김신령 세 사람 사이에 얽힌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가 나에게 스승을 추천한다고 했던 그 사람이 천살노수였나? 재밌게 흘러가네.’
흥미로운 전개다.
다만 천살노수의 성격이 깐깐하고 지랄 맞은 것은 원작에서도 잘 구현되어 익히 알고 있다.
과연 마스터 K의 생각대로, 천살노수가 자신의 스승이 되어줄지는 의문.
김신령이 화제를 바꿨다.
“어쨌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겠어. 그나저나 얻은 재료가 뭐야? 그걸 못 들었네.”
“증오의 발톱입니다.”
“몇 개?”
“10개 얻었습니다.”
“오, 생각보다 많이 얻었네. 이거 국내에선 고정으로는 얻기 힘든 재료인데? 운이 좋았나 봐?”
“그러게요.”
“판정 레벨 350 이상의 보스 몬스터에게서만 나오는 재료잖아. 중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거기는 이미 전부 통제되고 있고 말이야.”
“애초에 마켓에선 구할 수 없는 재료 같더군요. 나와도 금세 팔려버리니.”
“맞아. 재료는 직접 구했고?”
“당연한 말씀을.”
“항상 볼 때마다 느낀 건데 말야. 자기 레벨보다 훨씬 높은 던전에서 노는 걸 즐기네?”
“그래야 수준이 좀 맞습니다.”
“거만하게 느껴져야 하는 게 정상인데, 왜 멋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호호.”
김신령이 웃었다.
그게 강후의 매력이기도 하다.
괜히 K가 강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김신령 본인도 강후에게 관심이 많다.
애초에 떡잎부터 다른 녀석이니 눈높이를 높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 레벨 수준에 맞추면 던전이 시시할 것이다. 동기부여도 전혀 안 되겠지.
정황상 레벨 350 이상의 보스를 강후 혼자 공략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야.’
그래서 관심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자꾸 가까이에 두고, 그 변화를 지켜보고 싶은 마음.
그런 소유욕이 늘 강후를 볼 때마다 생겼다. 물론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도 재밌겠네.’
자신의 별장으로 좀 더 빨리 가기 위해 엑셀을 밟는 김신령의 발에 설렘이 묻어났다.
세공과 아이템 판매, 그리고 소환수 훈련까지. 오늘은 꽤 흥미로운 일이 많이 생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