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고요의 바다 (1)
* * *
강후가 전세혁의 팀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였다.
전세혁의 팀이 얻은 전리품을 수습하고 정리할 시간을 배려한 것이다.
철저하게 분업했고, 각자 원하는 바를 이룬 만큼 서로 간의 만족도는 높았다.
전세혁은 우선 강후의 동의부터 얻고, 고경호의 시체를 수습할 헌터를 보냈다.
아울러 강후에게서 고경호의 유품을 사겠다는 뜻도 밝혔다. 물론 강후가 팔 의사가 있는 것만.
이유는 간단했다.
고경호의 유품과 살아있을 때 저질렀던 악행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알릴 사진을 올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클립스에 공포를 심어 주기에는 그만큼 좋은 화젯거리는 없을 테니까.
고인 능욕이라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죽어야 될 놈이 죽었는데 오히려 박수치고 환영하면 모를까. 그만큼 고경호는 ‘인간 쓰레기’였다.
그래서.
강후는 전세혁의 제안대로 사용할 아이템을 제외하고는 전부 그에게 판매했다.
감정 후, 대금으로 받은 금액은 450억 원. 통장에 3,080억 원의 잔액이 찍힌다. 미친 금액이다.
고경호 시체 수습, 평택 지부에 대한 약탈 마무리, 부상자 치료까지 마친 전세혁의 팀은 강후와 다시 합류해 전투의 결과를 공유했다. 헤어지기 전의 마지막 확인인 셈이다.
“대단하십니다, 모조님. 고경호를 도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는데요.”
“저도요. 내심 모조 님이 그쪽을 막아주겠다고 하셨지만, 아예 죽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습니다.”
팀에 소속된 헌터들이 앞다투어 강후의 성과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그들은 일대일로 고경호와 붙을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면, 바로 고개를 저을 사람들이었다.
이클립스에 대한 복수와 공격에 진심인 헌터인 것은 맞지만. 현실 판단도 냉정하게 하는 것이다.
당장에 전세혁도 예전에 고경호와 한 번 붙은 적이 있었고, 무승부의 결과가 나왔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퍼즐이 고경호였는데, 모조 님이 멋지게 잡아 주셨네요.”
전세혁이 다시 악수를 청했다.
다른 헌터의 칭찬은 별 감흥이 없어도, 전세혁의 칭찬은 늘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원작에서 그가 얼마나 이클립스에 대한 복수에 진심이었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같이 장식하고 있는 느낌이 든달까.
“모조 옵…… 님, 최고!”
닉네임까지는 잘 불러놓고, 무의식적으로 오빠를 붙이려던 반세영이 다급히 말을 돌렸다.
전투 직전.
걱정하는 반세영에게 전세혁이 했던 말 하나가 있었다.
- 신강후 님은 우리에게 변수가 아니라 상수야. 믿어 봐. 그 사람은 믿는 것 그 이상을 늘 해낸다.
누구보다도 강후의 실력을 믿는 반세영이지만, 그래도 고경호까지는 어렵지 않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새삼 반세영은 강후가 이클립스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
적으로 강후를 만났다면 글쎄? 지금쯤 열심히 도망치거나, 아니면 도망치기 전에 죽지 않았을까.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강후가 고루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전세혁이 씨익 웃으며, 불타는 평택 지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이클립스는 서로 믿지 못하게 될 겁니다. 2년 전에 구성을 끝낸 평택 지부에 내부자가 있는 것이 알려졌으니까요.”
“다시 한번 인내의 중요성을 느끼네요.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친구를 잘 둔 덕이라고 하면 맞을까요? 하하하.”
웃는 전세혁의 모습에서 이현석에 대한 감사와 믿음이 묻어났다.
이번 전투의 끝마무리는 강후가 했지만, 시작에 점을 찍어준 것은 이현석인 셈이다.
전세혁의 말마따나, 평택 지부에만 내부자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신뢰가 깨져버린 조직은 내분으로 붕괴되기 쉽다.
하물며 범죄자들의 집단이자 소굴인 이클립스라면, 더욱 서로에게 의심의 칼을 겨누겠지.
전세혁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이클립스 놈들 불알이 확 쪼그라들 테니. 당분간은 전략을 수정할 예정입니다.”
“어떤 전략인지는 얼추 감이 오는군요.”
전세혁의 생각이 보인다.
아마도 대전을 조여오듯, 그간 외부에서 안으로 치고 들어오는 형국이었으니.
방향을 돌려, 지방에 있는 이클립스의 위성 조직을 공격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리스트업이야 진즉에 다 해 뒀을 것이다. 이현석의 도움도 있을 거고, 박동재의 정보력도 있으니까.
“모조 님. 다음에도 함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 맨입으로 제안하진 않겠습니다.”
“오가는 것이 확실하다면야.”
“좋습니다. 또 연락드리죠. 자, 그럼 저희는 남쪽으로 쭉 빠지겠습니다!”
전세혁이 크게 손을 휘저으며, 후퇴를 알리는 수신호를 보냈다.
반세영이 강후와의 빠른 이별이 못내 아쉬웠는지, 몇 번이고 강후를 돌아보고는 전세혁을 따라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공식적으로 ‘강후’라고 부를 수가 없어서 말을 아끼는 눈치.
대신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 이번에 나름 활약했는데, 오빠가 못 봐서 아쉽네! 다음에는 진짜, 제대로 보여줄게!
- ㅇㅇ.
강후의 답변은 간결했다.
딱히 더 해줄 말은 없는 것 같다.
이 정도 답변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 * *
얼마 후.
평택 지부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받은 강동현이 엽궐련을 입에 물었다.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보고서를 가지고 온 간부의 얼굴을 휘감았지만.
간부는 필사적으로 기침과 재채기를 참고 버텼다.
강동현의 심사가 제대로 비틀려 있을 지금.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곧바로 저승행이다.
간부의 이름은 임정완.
이클립스의 서열 6위 간부로 어제 막 귀국한 상태였다.
쌍검술의 달인인 그는 강동현이 아끼고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실력자이기도 했다.
“흠…….”
극대노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임정완의 예상과 달리, 강동현은 미간만 살짝 찌푸린 것으로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는 모습이었다.
임정완은 말을 아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주제넘게 운을 떼지 않는 것이 좋다. 학습된 두려움이다.
아니나 다를까.
임정완이 말없이 조용히 서 있자, 강동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포르투나 길드 동향은 어때?”
“천조국 헌터들의 전쟁 아닙니까. 케이스가 국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큽니다. 하루 만에 헌터가 500명씩 죽어 나가더군요.”
“유학이 일찍 끝나서 아쉬웠겠어. 마음 같아서는 나도 좀 더 네가 미국에 있길 바라긴 했는데.”
“아닙니다. 대장의 곁을 보필하지 못하고, 그저 도움만 받으면서 외국물만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은할 때가 됐지요.”
“이번 일. 어떻게 보지?”
“…….”
“편하게 말해 봐. 네 말 가지고 꼬투리 잡겠다고 묻는 게 아니야. 너는 합리적이잖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말해 봐.”
“일단 상황만 보면 허를 제대로 찔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고경호까지 죽었으니까요.”
“어. 완전히 당했지.”
후우우욱.
강동현이 들이켜는 연기의 양이 심상찮다.
입에만 머금고 뱉을 법도 한데, 그는 매캐한 연기를 그대로 삼켜 버렸다.
“평택 지부 자체는 그리 크지는 않기 때문에 인적인 손실은 메꿀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상징성이죠.”
“정리하면?”
“저희 조직 차원에서는 나쁜 소식입니다. 처음 세력을 확장한 의미 깊은 지부가 당했다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내부자가 있었잖습니까?”
“X발.”
강동현은 내부자라는 단어에 바로 욱하며 욕을 내뱉었다.
임정완이 화제를 돌렸다.
“헌터 그램에서 전세혁이 자신이 고경호를 죽인 것처럼 어그로를 끌고 있지만. 아니라는 것은 대장이 더 잘 아실 겁니다.”
“CCTV 영상을 확인했어. 고경호가 죽었을 시간에 놈은 평택 지부 안에 있었더군.”
“별동대로 누가 움직인 겁니다. 근데 그 별동대가 레벨 400인 고경호를 중간에 컷트해서 죽인 거고요. 전세혁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떤 새끼지? 이현석이 직접 움직였나? 아냐, 그랬더라면 우리가 먼저 알았겠지.”
“그놈이 누군지를 알아내는 게 우선입니다. 내부자 색출이나 상징성 파괴는 나중 문제입니다. 고경호를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면, 대장도 위험합니다.”
“너 역시 두말할 나위 없겠지.”
“예. 분명 ‘그놈’은 전세혁과 같이 움직이는 놈입니다. 빨리 찾아내야 합니다.”
“갈수록 태산이군.”
강동현은 결국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얼음을 잔뜩 채워뒀던 보드카를 들이켰다.
고경호를 죽인 의문의 존재.
그가 이번 사건의 핵심이다.
고경호가 도망칠 틈도 없이 죽임을 당했다면.
자신은 차치하더라도 이클립스의 간부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놈이라는 얘기가 된다.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닐 터다.
그때.
헌터 그램의 보안 계정을 통해 보이스가 걸려 왔다.
음질이 썩 좋지는 않지만, 헌터 그램의 폐쇄성 덕분에 종종 애용되는 음성 통화 시스템이었다.
상대의 계정명은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라 누군지 특정할 수 없었지만, 연락 올 사람은 뻔했다.
강동현이 슬쩍 눈짓을 하자, 임정완이 바로 자리를 비웠다.
그가 나가고 난 다음, 강동현이 연락을 받았다.
“네.”
- 나다.
“유우지 형님?”
- 어.
“무슨 일이십니까?”
- 무슨 일일 것 같은데?
유우지의 말 하나하나에는 전부 날이 잔뜩 서 있었다.
강동현도 일본에서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닌 터라,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예상은 갑니다만.”
- 나, 한국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네가 길 좀 뚫어줬으면 하는데. 공식 입국은 어려우니까.
“가능은 합니다.”
- 너, 신강후라는 놈이 싫다고 했지?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지? 내가 죽여주마.
유우지의 말을 듣는 순간, 강동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 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유우지의 성격상, 자신에게 한 방을 세게 먹인 강후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터.
유우지가 강후에게 당한 것은 단순히 몸뿐만이 아니라 자존심에도 깊은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
내심 유우지가 빨리 나서주기를 바랐는데, 몸이 회복되자마자 바로 복수에 나서는 모양이다.
“오시죠. 길은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 착수금은?
“착수금은 무슨. 형님이 들어오신다는데 아우가 당연히 길을 뚫어야죠. 금방 연락드리겠습니다.”
- 그 새끼는 반드시 내가 죽일 테니, 기다리고 있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 두면 더 좋고.
“예. 알겠습니다.”
이내 끊긴 통화.
다시 강동현이 웃었다.
“신강후…….”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화가 오르는 녀석이다.
청명 수용소에서부터 시작된 악연이 얼마나 질기게, 또 길게 이어지고 있는가?
이 녀석 때문에 아끼던 부하도 죽었고,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의 첫 공략도 갖다 바쳤다.
사실 그날의 일은, 부하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흑역사 취급을 당하고 있기도 했다.
명색이 조직의 대장이라는 사람이 눈앞에서 침입자를 놓쳤으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전세혁만큼이나 강후 때문에 발목 잡힌 것이 많은지라, 유우지가 나서주면 너무 좋았다.
솜씨 좋고, 날이 벼르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일본산 회칼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림이 재밌게 그려질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