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수중전 (5)
고경호의 눈빛에서 복잡해진 생각을 읽은 강후가 다시 공격의 템포를 끌어올렸다.
그가 광화 각성을 쓰게 되면, 여러모로 신경 쓸 것이 더 많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적이라는 변수가 추가되기 때문에 시간 활용에서 골치가 아파질 가능성이 컸다.
강후가 이번에는 눈높이에 맞는 목을 노렸다.
‘뻔하군.’
너무 정직하게, 보란 듯이 들어오는 공격.
고경호가 강후의 속내를 의심하면서도, 공격을 흘려보낼 수는 없기에 검으로 막았다.
위장이나 기만, 혹은 횡 이동의 노림수가 있을 줄 알았는데 별다른 조짐은 없었다.
까앙!
이내 검과 부딪힌 강후의 단검이 불꽃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강한 한 방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막아낸 터라 살짝 감탄만 하고 말 뿐이었다.
그런데.
솨악!
“끅……!”
사고가 터졌다.
분명 강후의 단검은 지나간 이후인데 엇박자로 목을 뭔가가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동시에 목 앞에서 시큰한 느낌이 들더니, 이내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경동맥이 절단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목젖 앞이 베였다.
‘이단 베기?’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스킬이 되돌아왔다.
시간차로 마력 베기가 들어가는 이단 베기는 희소성이 상당히 높은 자신의 스킬이었다.
애초에 검사 전용 스킬이라, 암살자인 강후가 배웠을 리 만무하다.
설령 배웠다고 해도, 이렇게 베일 만큼의 대미지값을 가지진 못할 터. 그런데 똑같이 당했다.
후웅! 후웅!
고경호가 어지러이 검을 좌우로 휘두르며, 바로 이어질 수도 있는 강후의 접근을 차단했다.
체계적이지 못한 반격이었지만, 강후에게 당한 공포감과 무력감에 휘말린 고경호는 냉정할 수가 없었다.
‘뭐가 얼마나 달라진 거지?’
신강후에 대한 관련 파일은 일찌감치 숙지를 해 뒀던 자신이다.
강후는 이미 겁대가리 없는 놈으로 소문나 있고, 전세혁처럼 언제고 이클립스와 마주칠 헌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동현의 관심사 중 하나이기도 한 만큼, 심복인 자신은 절대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제는 파악된 정보에 없는 스킬이 증식하듯,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업그레이드가 돼도 너무 됐다.
오히려 숙지해 뒀던 정보의 틀에 생각이 갇혀있는 탓에 예측하지 못한 변수에 더 쉽게 당해 버렸다.
목 앞쪽과 어깨에서 피가 계속 쏟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지혈할 틈도 없고, 계속 쏟아지는 장대비 때문에 피를 멎게 만들기에는 최악의 환경.
이대로 계속 가다간, 강후의 페이스에 휘말려 과다 출혈로 죽을 판이었다. 승부를 내야 한다.
“하아압!”
기합과 더불어 고경호가 선택한 스킬은 사방으로 검기를 방출하는 스킬이었다.
난격.
검사의 레벨 200 기본 스킬이다. 아울러 그가 꾸준하게 훈련해 온 숙련도 높은 스킬이기도 하고.
시이잉!
고경호의 검이 우는 소리를 내며, 매섭게 검기를 쏟아냈다.
구덩이 안쪽이 넓지 않다 보니, 검기 한두 개만 막아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파팟. 팟.
하지만 강후는 미리 밖에 배치해 뒀었던 그림자와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회피를 쉽게 끝냈다.
강후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
고경호는 자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던 강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미 강후는 구덩이 밖으로 나간 상황. 타깃을 잃은 검기가 애먼 구덩이만 열심히 파댔다.
구덩이 밖의 강후는 안을 쓱 훑어보고는 기분 나쁜 비웃음과 함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개새끼!”
고경호가 욕을 내뱉으며 다시금 도약으로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강후의 전광비도와 밀쳐내기를 염두에 두고, 공중에서 회피할 준비도 마쳤다.
몸을 최대한 비틀거나, 아니면 굽혀서 날아드는 단검을 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
별다른 이슈 없이 구덩이 밖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타이밍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과도한 스킬 사용으로 마나 활용에 문제가 생긴 걸까?
어쨌든 강후는 10m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쭉 빠져서는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살짝 숨을 몰아서 쉬는 모습도 보이는 것이 아마도 체력적인 문제에 봉착한 듯했다.
‘그럼 그렇지.’
여러 스킬을 연달아 쓴 데다가, 옆구리에 상처를 입었으니 강후도 멀쩡하진 않을 터다.
시종일관 굳어있던 고경호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이 밀어붙이기 가장 좋은 시점이다.
판단에 확신이 더해지자, 몸 전체에 힘이 확 돌았다.
왼쪽 어깨의 고통도 어느새인가 잊어버린 고경호가 양팔로 힘주어 검을 쥐고는.
타닷!
힘껏 지면을 박차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과 동시에 발목에서 이질감이 들었다.
아래를 내려보자,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아이보리 색깔의 실선이 빛나고 있었다.
“좆…….”
‘됐다’라는 말을 이어붙이기도 전에 사고가 터졌다.
낮게 깔아 둔 왜곡의 사선에 걸린 고경호의 발을 보는 순간, 강후가 왜곡을 발동했던 것이다.
노림수의 성공이었다.
고경호가 감정적으로 크게 올라온 것도 있거니와, 악천후의 날씨 탓에 감각이 분산된 것이 컸다.
평소 같았으면, 그리고 꼼꼼하게 탐지했다면 느낄 수 있었을 왜곡의 사선 특유의 이질감.
하지만 계속 떨어지는 빗방울이 몸의 촉각을 자극하면서, 온전히 하나의 감각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카드드드득!
“끄아아아!”
고경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비명을 내질렀다.
왼쪽 발목에서, 마치 톱을 대고 발목을 자르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통에 집어삼켜진 정신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빠르게 물들어가기 시작하자.
고경호가 바로 광화 각성을 발동할 준비에 들어갔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적어도 무적이 되는 시간 동안은 고통에서도 해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너무 속 편한 생각이었다. 세상일은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혈화】
퍼퍼펑!
눈앞에 현현(顯現)한 혈화.
고경호는 볼 수 있었다.
직전까지 자신의 몸에 온전하게 잘 붙어있던 왼발이 보란 듯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광화 각성은 발동됐지만, 왼발을 이미 잃은 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왼쪽 어깨에 난 상처에서도 같이 폭발이 일어났고, 근육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직접 보는 것이 두려워 시선을 돌리진 않았지만, 걸레짝이 된 것은 틀림없었다.
그 사이.
강후는 분신술과 환영술, 그림자 걸음을 연달아 사용해 전방 시야를 차단해 버렸다.
반대편에 있는 고경호의 눈에는 강후를 닮은 환영과, 그림자가 한가득이라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쏴아아아.
들리는 것은 그저 빗소리뿐.
비와 피가 뒤섞여 지면을 적실 때마다, 고경호의 자존심도 물에 젖은 종이처럼 눅눅해져 갔다.
스르륵.
이내 그의 몸을 황금빛으로 감싼 기운이 잠시간 무적이 되었음을 체감하게 만든다.
고통도 이 순간만큼은 사라지고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한 만족감을 들게 만든다.
“아직 안 끝났어.”
고경호가 잘려 나간 왼발로 어떻게든 지면을 내딛고는, 강후에게 검 끝을 겨눴다.
비겁하게 뒤로 물러서서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저놈에게 꼭 한 방을 먹이고 싶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고경호가 검으로 크게 세로 선을 그으며, 거친 검기의 폭풍을 일으켰다.
참격.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기로 악명이 높은 고경호의 필살 스킬이었다.
과아아앙!
굉음을 내며 날아간 참격이 떨어지는 빗방울들까지 하늘로 밀어 올리며, 질서를 역행시켰다.
이윽고 참격에 휘말린 그림자와 분신, 환영 역시도 희뿌연 연막이 되어 흩어졌다.
시종일관 강후에게 유린만 당했던 고경호.
광화 각성을 발동한 지금부터는 전황에 유의미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시작은 바로 저 용맹스러운 참격이 될 터였다.
그런데.
챠앙……!
연막 속으로 파고 들어간 참격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저것은 강후가 낸 비명도, 살점이 베이는 소리도, 단검이 박살 난 그런 소리도 아니었다.
뭔가 서로 맞부딪혀서는 유리잔처럼 시원하게 깨진 느낌. 청명한 소리였다.
다음 순간.
후욱!
연막을 걷고 나타난 것은 강후를 타격한 참격의 흔적이 아니라, 박살 난 ‘조각’이었다.
산산이 흩어지는 참격 스킬의 파편을 뒷배경으로 삼아, 강후의 흑월참이 파공음을 내며 날아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으로 흑월참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 이미 흑월참의 투사체는 고경호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씨…….”
다급하게 검을 들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늦었다. 흑월참은 거침없이 고경호의 목을 날렸다.
서걱!
“……발.”
목이 잘리기 전에 내뱉은 한 음절이 고경호의 마지막 말이 됐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참격과 흑월참의 대결에서도 형편없이 판정패를 당해버린 고경호는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히든 스킬이 일반 스킬에 당하면 섭섭하…… 크윽.”
강후가 신음을 토하며 제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끝까지 악으로 깡으로 참긴 했지만, 역시 아까 고경호에게 당한 역습의 여파가 있었다.
공격 레퍼토리 상, 허리와 몸통을 회전시킬 일이 잦기에 옆구리의 부상은 확실히 불편감이 컸다.
고경호가 죽은 것은 확실했다.
성좌 강탈이 바로 이루어졌으니까. 순흑의 위선자와 탐혈의 소마가 줄줄이 성좌창에 등록됐다.
솔직하게 말하면 순흑의 위선자는 앞으로 쓸 일이 없을 듯했다.
아무리 힘이 필요하더라도 수명을 걸고 하는 거래는 글쎄. 한 번이 쉽지, 두 번이 어려울까?
【동생과의 다급한 정리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군. 계약자여, 고생 많았다.】
순흑의 구도자가 자신이 할 말만 남기고는 사라져버렸다.
물론 시험을 통과한 것에 대한 보상은 바로 이루어졌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특전의 오픈이다.
단, 당사자는 대화를 나눌 겨를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다급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신속했다.
【형을 만났으니, 적어도 다른 데에 팔렸던 정신은 찾겠네.】
차원 강탈자가 중얼거렸다.
이야기의 결을 보니, 구도자-위선자 형제가 엮인 사연이 있는 듯했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축하한다.】
심드렁하게 툭, 내뱉는 차원 강탈자의 축하가 들리고.
【역시 내 계약자! 항상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번에도 네 품격과 고귀함을 증명해 냈어!】
황야의 전략가가 있는 힘껏 비행기를 태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반응이다.
그때.
좀처럼 말을 잘 꺼내지 않는 성좌, 대재앙 – 어둠도 덩달아 말을 보탰다.
축하까지 일일이 하기에는 낯간지러웠는지,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모습이었다.
【순흑의 위선자는 대성전에서 5%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일탈 성좌다.】
“일탈 성좌라고 하면?”
【알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변질된 성좌라는 것이다. 정신병이든, 세뇌든, 억압이든 말이다.】
“신의 바람과도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건 나도 알아보고 추적해야 할 문제다. 성좌라고 해서 다 아는 건 아니다. 대성전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미지의 영역이니까.】
성좌도 모르는 성좌의 문제.
일탈 성좌는 원작에서 나온 적이 없는 설정이다. 결국 무의식의 영역에서 파생된 설정인 셈이다.
어차피.
당장 답이 안 나오는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 봤자, 역시 답이 안 나온다.
‘일단 특전부터.’
그래서 강후도 관심의 화살표를 돌렸다.
순흑의 구도자로부터 새로이 추가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특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