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수중전 (3)
* * *
그 무렵.
바깥일에서 제대로 허탕을 친 고주희와 공유석이 채관형의 사무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던 ‘바깥일’이란, 강후의 거주지와 거주 지역을 특정해 눈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록상으로 적혀 있는 강후의 집 주소를 찾아갔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없다, 이런 수준의 내용이 아니라 아예 그 주소는 폐허가 되어 버린 곳의 주소였다.
예전에 강후가 썼던 정선규라는 가명으로도 검색해서 흔적을 찾아 봤지만, 성과는 제로.
그 바람에 하루를 통으로 날려 먹은 상태였다.
보통 대도시의 안전 지역에 있는 아파트나 보안 저택에 사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을 생각하면.
거주지를 특정할 수 없는 강후의 생활 패턴은 의외였다.
이래서는 집 없이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면서,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관형님보다 이예린을 한 번 더 찾아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
채관형의 사무실로 이동하던 도중, 고주희가 어두워진 낯빛으로 공유석에게 말했다.
채관형을 좋아하지 않는 고주희는 그와의 만남이 영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공유석이 고개를 저었다.
“이예린은 요즘 너무 자주 만났어. 우리 길드가 그렇게 과도하게 관심을 보이는 인상을 줘서 좋을 건 없는 여자야.”
정화 길드와 이예린 사이의 관계는 좋았다.
하지만 공유석의 말대로 지나치게 의존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이예린의 본질은 의뢰꾼을 다루는 용병단의 단장이기에…….
강후를 가지고 장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중재 가치를 높이려 할 수도 있다.
“흐음.”
“관형님이 선 넘는 말을 하거나 너를 모욕하면, 내가 확실히 나설 테니까 걱정하지 마.”
“미안해.”
“미안은 무슨.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거지. 신경 쓰지 마. 그 사람이 뭘 하고 있든 간에.”
심란해진 표정의 고주희를 달랜 공유석이 어느덧 채관형의 사무실 앞에 섰다.
그런데 수행원들도 명령으로 자리를 비웠는지, 주변에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살짝 열려 있는 사무실 문을 쓱 밀어보니,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하이힐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남자 신발로 보이는 것은 채관형의 것 한 개. 그 순간, 고주희가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
공유석이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 ‘무시해’라는 말을 고주희에게 전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채관형 대장, 계십니까? 공유석입니다. 의논드릴 것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찾아왔습니다.”
대장.
채관형이 좋아하는 호칭이다.
대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없었던 열정도 생겨나고,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 든다나 뭐라나.
‘진짜 대장’인 장시환이 있지만, 유독 대장이라는 호칭을 좋아하는 채관형이었다.
호칭에 혼선이 생길 법했지만.
정화 길드의 대장은 채관형 한 명뿐이다라는, 장시환의 교통정리 덕분에 그의 유일한 호칭이 됐다.
“X발, 누구야? 내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어떤 대가리에 X 박힌 놈이 무시하고 들어와서 나를 불러?”
공유석의 조심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것은 시작부터 귀에 찰지게 박히는 욕이었다.
욱하는 고주희를 공유석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때로는 쓴소리도 기꺼이 들어 주는 장시환과 달리, 채관형은 귀에 거슬리는 말은 못 참는 성격이다.
괜한 일에 휘말려 사랑하는 연인이 험한 꼴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공유석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장시환 마스터의 승인이 떨어진 일을 진행하다가 막힘이 생겨, 바로 대장을 찾았습니다.”
“기다려 봐! 팬티라도 쳐 입고 나가야 대화를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X발, 그건 왜 또 너가 입고 있는데?”
“…….”
안에서 상황을 짐작하기 어려운 대화가 오간다.
“수건이라도 줘봐. 어. 그래.”
이내 긴 샤워 타올로 하체만 대충 가린 채관형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나왔다.
공유석과 고주희에게 공평하게 경멸 어린 시선을 박아 주는 채관형의 눈빛에는 거침이 없었다.
저 눈빛은 채관형이라는 인물의 기본값이다.
유일하게 기본값이 사라질 때가 있는데, 그게 장시환을 만났을 때다. 그때는 눈빛이 다르다.
“내가 본 게임 전이라서 다행인 줄 알아. 아니었으면 일단 누구든지 패고 시작했어.”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채관형의 날 선 말을 공유석이 영리하게 흘려내고는 고개를 숙였다. 고주희도 예를 갖췄다.
이내 채관형이 신경절직으로 유리잔에 부은 위스키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뭔데, 그래?”
“괜찮은 추적자가 필요합니다. 역 추적이나 발각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녀석이라면 내가 여럿 부리고 있으니까 문제는 없지. 그런데 누구를 추적하는데?”
“신강후라는 헌터입니다.”
“신강후? 이름부터 촌스러운 새끼네. 걔가 누군데? 어떤 듣보잡인데 내가 부리는 눈까지 붙여?”
“그게…….”
졸지에 듣보잡이 되어버린 강후의 위상.
강후 본인이 알았더라면 헛웃음을 터뜨렸을 현장이지만, 채관형의 말은 진심이었다.
채관형에게 강후는 전혀 인지가 되어 있지 않은, 하찮고 형편없는 헌터일 뿐이었다.
“사진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공유석이 이야기의 시작점을 잡았다. 긴 이야기가 될 듯했다.
* * *
반세영과 헤어진 뒤.
강후는 그녀가 화두로 던졌던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대충 둘러댔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었고, 그래서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더 자세한 걸 말해 줄 수는 없다고.
하지만 고경호에 대해서만큼은 강후도 뚜렷한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성좌 시험의 통과를 위한 희생양일 뿐이고.
알고 보니 진짜 나쁜 놈이어서, 그럴듯한 이유까지 붙은 것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차원 강탈자가 새로운 성좌 시험을 제시하고.
그 시험이 강후와 가까운, 혹은 죄 없는 착한 헌터나 일반인을 죽이는 것으로 주어진다면.
과연 그 시험을 도전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포기하는 것이 맞는가.
회색 영역의 삶, 검은 영역과는 결이 다른 문제다.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을 수 있느냐.
그래도 최소한의 선(善)은 지키겠느냐의 문제였다. 단순한 듯하지만 아주 복잡한 문제인 것이다.
성좌가 시험이나 계약 조건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너무 수동적인 생각이다.
“…….”
강후가 단검, 타락한 신념에 살짝 남아 있는 핏자국을 쏟아지는 빗물에 씻어냈다.
이미 묻힌 피가 많다.
여기에 조금 뜨거운, 그리고 순수한 피를 묻힌다고 해서 큰 죄가 될까? 될 수 있겠지. 아니, 된다.
“지랄.”
강후가 욕을 뱉으면서 신경질적으로 단검에 묻은 빗물을 털어냈다. 건강한 고민이 아니다.
차라리, 이런 부분은 성좌와 한 번 부딪혀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허심탄회한 대화 말이다.
* * *
다음 날 저녁.
어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악천후로 변하면서, 기습에는 가장 최적인 날씨가 만들어졌다.
본격적인 공격 시작에 앞서.
전세혁이 이끄는 본대와 나뉘기 전에 강후가 먼저 앞길을 뚫어 주었다.
평택 지부로 향하는 길에는 조악한 형태이기는 해도, 나름 전진 초소가 몇 개 있었다.
그곳을 강후가 내부까지 은밀하게 침투해서, 일거에 헌터 여럿을 제거했던 것이다.
성좌 계약도 이루어지지 않은, 레벨이 한참 낮은 헌터이다 보니 대참수에 ‘즉사’했다.
그 말은 즉, 상대한 헌터가 레벨 80 미만의 수준 낮은 헌터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용자 레벨의 33% 미만에 해당하는 레벨을 가진 몬스터, 헌터는 일격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대참수의 이 옵션 때문이다.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게 왜? 라고 할 만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차피 그거야 죽는 놈 사정이니, 강후 입장에서 알 바는 아니었다.
“저 모조라는 분. 정말 대단하기는 하네요. 한 놈도 공격 두 번까지 버티지를 못하네. 그냥 단검이 꽂히면 죽는 것 같은데.”
현장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전세혁의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몇몇은 저 암살자가 강후라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리고 강후를 정말 처음 보는 헌터들은 순식간에 초소의 헌터를 제압한 강후의 모습에 감탄했다.
기습의 핵심은 속도다.
특히 이런 초소를 노릴 때는 단 한 명이라도 경보나 경고 신호를 보낼 수 없게 하는 게 중요하다.
강후는 바로 이 부분에 특화되어 있었다.
신속, 정확, 종료.
세 개의 키워드로 정리하면 지금의 상황이 맛깔나게 요약이 될 듯했다.
그렇게 몇 개의 초소를 무력화한 강후가 소리소문없이 팀원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자신이 팀으로서 할 몫은 끝났다. 평택 지부와의 칼춤은 전세혁과 팀원들이 출 차례.
강후는 바로 방향을 틀어, 고경호가 올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으로 향했다.
목표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고경호.
‘순흑의 위선자’를 메인 성좌로 두고 있는 녀석을 죽여야.
그만큼 순흑의 구도자 성좌의 네 번째, 다섯 번째 특전을 얻어내고 성장할 수 있다.
* * *
15분 후.
“X발……! 내부자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
이클립스 평택 지부로부터 다급하게 연락을 받은 고경호는 호텔을 나와, 지부로 향하고 있었다.
폭우에 도로가 완전히 진흙탕이 되어 있는 터라, 있던 차도 두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산사태가 일어나기라도 했는지, 도로에는 온통 흙탕물과 쓸려 내려온 흙이 한가득이었다.
차를 버리고 도보 이동을 선택한 것은, 지금 상황만 놓고 봤을 때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한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평택 지부에 내부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세혁 일당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지부의 모든 문이 통째로 다 열렸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어용으로 구축해 둔 외부 결계도 모조리 무력화되었고, 지부 전체가 깡통 건물 신세가 됐다.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부자는 일단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 알아낸 바에 따르면, ‘심연’에서 심어 놓은 내부자였던 모양.
평택 지부의 이클립스 조직원들이 최소 2년 이상 호흡을 맞췄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2년 전에 미리 내부자를 심어 뒀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를 한 걸까.
어쨌든 일이 제대로 꼬였다.
방어 시설물이 하나도 제 기능을 못 한 탓에 시작부터 지부의 일선이 전부 쓸려 나갔다.
전세혁 일당은 전장에서 뼈가 굵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악명이 높다.
자신이 가서 수습을 해 주지 않으면, 어어 하는 사이에 평택 지부 전체가 무력화될 수도 있었다.
첨벙첨벙!
몸 여기저기로 튀는 흙탕물이나 흠뻑 젖어버린 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지부에 도착하게 되면, 뜨거운 피로 샤워를 하게 될 몸이니까.
“전세혁, 이 새끼를…….”
고경호가 이를 까득 갈며, 더욱 속력을 높였다.
앞으로 7분 정도만 전속력으로 달리면, 일단 지부가 가시권에 들어올 듯했다.
그런데.
“뭐야, 이건 또…….”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앞길을 막아서는 뭔가가 있었다.
비에 흠뻑 젖어 가라앉은 앞머리 사이로, 살기가 가득한 눈빛을 쏟아내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시선은 정확히 자신의 가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고경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신강후?”
이클립스의 1급 척살 대상자.
강동현이 그토록 찾고 싶어 하던 ‘악당’이 웬 떡인지 여기에 있었다.
어쩌면…… 공을 세울 기회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