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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231화 (231/304)

231화 수중전 (2)

물론 전세혁은 구체적으로 지원 세력의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다. 현명한 판단이다.

유추가 어렵지는 않다.

일단 이현석이 있다. 경기 북부와 북동부에 거점을 두고 있는 군벌, 심연의 대장.

그리고 청안 용병단의 이예린과 흑사자를 떠올릴 수 있다. 이클립스와는 적대 관계니까.

머리 좋은 전세혁이라면, 당연히 이들의 이용 가치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민했을 터.

자신에게는 말하지 않은 모종의 거래나 협력 관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다.

‘그래, 이거야.’

강후가 스스로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전율을 느낀 것은 바로 이현석의 존재 때문이다.

전세혁의 가장 큰 뒷배이자, 막역지우이기도 한 이현석. 그는 원작의 이 시점에는 없었다.

문유석에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 미래를 바꾼 것은 다름 아닌 강후 자신이었다.

이현석을 살린 나비 효과가 단순히 정화 길드의 대항마인 심연을 유지하도록 만든 것을 지나.

지금의 전세혁에게도 영향을 미치도록 만든 것이다.

심연이 뒤를 봐준다면, 전세혁이 이클립스를 도모할 생각을 하는 것도 현실적인 얘기가 된다.

‘원작의 전세혁도 이 시기에 이클립스를 노리고 싶어 했을 수 있지. 하지만 나는 그런 내용을 쓰지 않았어. 개연성이 없었으니까.’

원작을 쓸 때도 전세혁이 과감하게 이클립스를 노리는 그림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심연이 몰락해 버렸기에 전세혁과 그의 동료들만으로는 이클립스를 도모할 수 없었다.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여서다.

그러나 지금은 심연이 건재하다. 전세혁이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개연성이 만들어진다. 인과 관계의 완성이다.

강후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그물을 살살 당겨선 놓치기 마련이죠. 한 번에 그물을 당길 겁니다. 그래야 수확이 좋죠.”

“이클립스 전체를 일망타진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규모가 크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명치에 세게 한 방 먹일 수는 있겠죠. 오래도록 멍이 들 만큼.”

전세혁이 웃었다.

괜히 강동현이 전세혁을 가장 껄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전세혁은 잠잘 때 빼곤 늘 이클립스를 괴롭힐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두루뭉술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전세혁은 이클립스를 괴롭힐 나름의 계획을 만들었을 것이다.

곧 있을 전투는 전초전인 셈이고, 해일처럼 밀려올 대재앙은 그 이후의 얘기가 되겠지.

“오빠! 나 최근에 제대로 된 스킬 하나 얻었어. 한 번 볼래?”

“스킬북?”

“어! 던전에서 나온 거너 전용 스킬북! 세혁 오빠가 양보해 준 덕분에 바로 배웠지.”

“보자.”

강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자, 반세영이 바로 지하 주차장의 벽면을 조준했다.

이미 수십 차례 시연을 했었는지, 벽면 전체에는 온통 그을음이 가득했다.

철컥, 타앙!

반세영의 총구가 불을 뿜자, 백색 빛깔의 탄도가 그려지며 마탄이 날아갔다.

여기까진 기존의 마탄 공격 형태와 같았다. 딱히 스킬북으로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

그런데.

퍼석! 화르르르륵!

벽면 일부를 박살 낸 마탄이 이내 불꽃을 일으키며, 주변을 불길로 휘감기 시작했다.

불길의 시작이 마치 꽃 모양을 닮아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반세영의 설명이 덧붙여졌다.

“마화탄! 내 새 스킬!”

“좋네.”

“……응? 그게 다야, 평가가?”

“좋으면 다 아닌가?”

“죽음의 선을 그리듯이 이어지는 탄도에 대미를 장식하는 처형의 불꽃. 누가 봐도 아름다운, 실로 대단한 스킬.”

“누가 그렇게 평가를 해?”

“……접니다.”

“아.”

두 글자로 끝내버린 강후의 총평을 지적한 이야기의 불똥이 전세혁에게까지 튀었다.

확실히 살상력이 높아진 형태라 반세영의 가치를 높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했다.

저러면 헌터들이 무리 지어 있는 곳에도 사격하기 좋다. 불꽃에 휘말리면 여럿이 부상을 입을 테니.

강후가 슬쩍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이용 가치가 정말 높겠어. 좋은 스킬이 생긴 것 같다.”

“쳇.”

내심 강후에게 디테일한 호평과 인정을 받길 바랐던 반세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강후가 멋쩍은 얼굴로 반세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전세혁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최근에 활을 바꿨습니다. 광전사적 특성이 있는 활이라 요긴하게 쓸 것 같아요.”

“어떤 활이죠?”

“체력이 떨어질수록 스킬 캐스팅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지는 활입니다. 나름 2등급이죠.”

“스킬이었으면 호환이 안 됐을 텐데, 무기에 붙은 광전사적 특성이라 시너지가 좋겠네요.”

“맞습니다. 기대가 커요.”

역시 성장은 자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 전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전세혁이 화제를 돌렸다.

“이시하라 유우지 말입니다.”

“네.”

“강동현과 연결되는 고리가 있다는 점은 알고 계십니까? 6촌 친척이더군요.”

“그것까진 몰랐습니다.”

“저희도 최근에 알게 된 것이기는 합니다만. 조사해 본 결과 정말 친척은 맞더라고요. 6촌이라 멀다면 멀 수도 있지만, 인연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당당하게 한국으로 들어올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강후의 눈빛이 깊어졌다.

유우지와는 짧고 굵게 만들어진 악연이 있는 만큼, 그와의 충돌도 늘 머릿속에 두고 있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때 유우지에게는 제대로 한 방을 먹였을 것이다.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아쉬움이 남는 쪽에 속했다. 죽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다음에 유우지와 다시 마주치게 될 일이 있다면, 그때는 반드시 어느 한쪽이 죽고 끝나겠지.

“항상 생각은 하고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강동현이 작정하고 길을 열면, 입국은 쉬울 겁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정보라고 말하기도 그렇죠. 어쨌든 강후 씨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전세혁이 수북한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확실히 예전의 이미지와 달라서인지 낯설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흉터를 가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염이 어색한 입 모양을 숨겨 주는 느낌이랄까?

‘더럽게 안 나는 내 수염으로는 어림도 없는 꿈이겠지.’

잠깐이나마 그처럼 수염을 길러볼까 생각했던 강후는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내시처럼 수염이 안 자라는 이 뽀얀 얼굴로는, 남성미 넘치는 수염은 꿈속의 바람일 뿐이다.

직접 그리지 않는 이상에야…… 누구 말마따나 오히려 창백한 흡혈귀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

* * *

만남의 기쁨을 적당히 나눈 후.

심도 있는 브리핑이 이어졌다.

강후는 전세혁과 반세영의 팀과 끝까지 함께 움직이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내용은 착실히 들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미리 알아 두지 않으면, 변수가 발생했을 때 우왕좌왕할 수 있다.

일단 전세혁이 평택 지부를 노리는 근거와 성공 가능성은 강후도 높게 평가했다.

물론 좀 더 유심히 살펴본 것은 이번 상황에서 고경호를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 역시도 OK.

전세혁은 강후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꼼꼼하게 체크했고, 짚어 주었다.

출발 시기가 정해졌다.

오늘은 제외.

고경호가 평택 지부의 부하들을 격려하고, 주변의 보안 시설을 점검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일 밤으로 확정이 됐다. 오늘보다 비가 더 거세질 예정이라 시기상으로는 좋았다.

‘박동재가 없는 게 아쉽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브리핑을 마치고 나니 박동재의 공백이 아쉬웠다.

그가 있었으면 강후는 물론, 여기 있는 다른 헌터들도 꽤 많은 시너지가 났을 텐데.

녀석은 명가 길드에서 긴급하게 지원 요청이 와서, 던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외부인과의 연계에 꽤 배타적인 명가 길드가 ‘긴급’, ‘지원’ 요청을 할 정도라니.

새삼 박동재의 실력을 되새기게 되는 강후였다.

박동재는 대성할 녀석이다. 그런 만큼, 곁에 두고, 꽉 잡고 있어야 한다.

* * *

쏴아아.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진 빗줄기.

콸콸콸.

그 빗줄기가 한곳에 모여, 하수도 안으로 쉴 새 없이 밀려 들어갔다.

수용 능력을 상실한 몇몇 하수도는 담았던 빗물을 거꾸로 토해내며 역류하기도 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아파트 3층.

통째로 창문이 깨져나간 복도의 끝자락에서 강후가 그 광경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멍, 물멍이라고 하면 맞을까?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기에는 제격인 그림이었다.

그때,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온 반세영이 자연스럽게 강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브리핑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강후가 어디로 갔는지 찾다가 여기로 온 것이다.

그녀의 손에는 직접 내린 드립 커피가 담긴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고소한 향이 정말 좋았다.

“오빠는 뭐해,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려고 왔지.”

“마셔, 오빠.”

“고마워.”

커피를 제법 좋아하지만, 드립 커피를 마셔 본 기억은 거의 없는 강후였다.

이유는 단순한데, 그 시간이 귀찮아서다. 이미 만들어진 완제품을 먹는 것이 편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수고를 남이 해 준다면 얘기는 다르다.

한 모금 마셔보니, 믹스 커피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입안을 감도는 원두 향이 일품이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서로가 할 말을 굳이 찾지 않아도,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의 대화가 됐기에.

그렇게 5분쯤 흘렀을까?

반세영이 말문을 열었다.

“싸우기는 딱 좋은 날인데. 왠지 꿀꿀하네.”

“왜지?”

싸우기 딱 좋은 날이라는 반세영의 말에 적극 공감했다.

많은 헌터가 비 오는 날씨를 싫어한다. 그것은 일반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창문 밖으로 감상하기에는 좋아도, 직접 마주하기에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강후처럼 날씨도 유불리의 판단 근거로 삼는 헌터에게는 악천후가 최고의 조건이었다.

특히!

암살자에게는 더 그랬다.

쏟아지는 빗소리는 암살자의 발소리와 기척, 살기를 말끔히 지워주기 때문이다.

물론 비 때문에 은신이 쉽게 간파될 가능성이 존재하나, 그 불리함을 유리함이 상쇄하고 남는다.

“내일이 기일이거든.”

“아.”

누구의 기일인지는 안다.

예전에 반세영이 말했었던, 사별한 남자친구의 기일인 거겠지.

“복수의 날이기도 하고. 이제는 정말 제대로 복수를 해 주고 싶어. 이클립스 새끼들, 지긋지긋해.”

반세영이 이를 까득 갈았다.

그녀와 전세혁이 이클립스에 가지는 반감은 강후가 가진 반감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크다.

강후가 차소희를 죽였을 때.

분명 강동현과 자신은 전략적인 휴전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런 대화가 오가기도 했고.

즉, 강후는 이클립스와 깊은 악연은 아니었다.

강동현이 먼저 선을 넘어서 그렇지, 넘지 않았다면 아슬아슬한 평화는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세영은 사랑하는 사람을 이클립스에 잃었고, 전세혁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은 이클립스에 소속된 모두에게 적대적이었다. 한 명도 살려 두고 싶어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분노를 자극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클립스를 ‘탈퇴’하는 것.

그때.

“오빠는 고경호를 꼭 죽이고 싶다고 그랬지? 오빠에게도 그럴 만한, 아픈 이유가 있는 거야?”

그녀가 의외의 질문을 꺼냈다.

강후에게는 의외지만, 사실 반세영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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