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수중전 (1)
라르스가 원작에서 장시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장시환, 너보다 네가 가진 풍요로운 모든 것이 부럽고 좋다.
네가 이것들을 잃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네 곁에서 내 욕심을 채우며 널 도울 것이다.
그러니 잃지 마. 그게 네 가치고 나에게는 동기부여니까. 그게 없는 너는 시체일 뿐이야.】
워낙 속물처럼 그려진 탓에 원작에서 라르스에 대한 여론은 정말 좋지 않았다.
주인공에게 빨대 꽂는 개새X가 아니냐는 욕부터 시작해서.
라죽답(라르스는 죽이는 게 답)이라는 말도 유행어처럼 돌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엔딩 시점까지 라르스는 장시환의 곁에서 그를 적극적으로 보조하고 도왔다.
던전에서 장시환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누구보다 가장 먼저 그를 도왔던 것이 라르스였다.
목적이야 어찌 됐든 간에 장시환에게 큰 도움이 된 존재는 맞았던 것이다.
원작 속의 기억에 푹 빠져 있는 사이, 말없이 강후의 답을 기다리던 이예린이 물었다.
- 강후 씨?
“아. 잠깐 슈타크 길드에 대한 기억을 더듬느라. 제가 더 알아야 할 것은?”
- 아야네가 필요한 이유는 공중에서 날아드는 대강하 독수리라는 몬스터 때문이라고 하네요.
“어떤 느낌인지 알겠습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몬스터에 붙은 이름과 필요성을 들으니 추측이 된다.
일단 공중에서 날아오는 몬스터는 강후에겐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유능한 저격수가 필수다.
- 그럼 던전의 라이센스 확보가 우선되는 대로 의뢰를 진행한다고 통보할게요.
“그렇게 하죠.”
의뢰 조율이 마무리됐다.
이번 의뢰를 통해서 타락 시리즈의 흉갑까지 확보하면, 스펙 업그레이드가 확실히 될 것이다.
특정 세트 아이템의 등급이 오를 수도 있고, 세트 스킬이 생길 수도 있으며.
혹은 히든 스탯 일부가 오르거나, 그에 관련한 상승 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독일 쪽에서 세트 아이템을 얻고 나면, 그다음 목적지는 이유 불문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겠지.
착착, 잘 진행되고 있다.
* * *
얼마 후.
무리 여왕의 담즙을 수령한 강후가 K에게 연락했다.
마침 업무 중이 아니었는지, K는 신호음이 한 번을 다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 잘 받았나?
“예. 파손 없이 깔끔하게 잘 배송됐습니다.”
- 실력 좋은 배달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단독으로 100건 이상 맡겼지만 사고율 제로야.
지역마다 치안 상태가 천차만별인 지금 같은 세계에서 안전한 배달은 생각보다 어렵다.
괜히 운송에 관련된 사업을 길드들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안전성 때문이다.
당장 서울에서 부산으로 물건을 보내려면, 육로나 항공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항공 운송은 값이 비싸니 결국 도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한데 그 과정에서 거쳐 지나가야 할 영역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이다. 세력, 관할도 각각 다르다.
당장 경기권 밖으로 나가도, 심심찮게 도로변에서 혈투가 벌어지는 일이 잦다.
대전처럼 어느 정도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라면 별문제 없이 도로를 이용할 수 있지만…….
예를 들어 김천 해방구, 홍천 해방구가 있는 위치를 지나가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단기간에 문제없이 배송된 것만으로도 합격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 업자를 불러서 불순물 제로로 정제했어. 생각하는 것보다 효과가 훨씬 좋을 거야.
“안 그래도 담즙이 담긴 병 안을 보고 있는데, 아주 조금의 티끌도 없네요. 훌륭합니다.”
- 그래. 내가 괜히 자신만만했던 게 아니라고. 아참, 그런데 말이야.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얼마든지.”
- 자네는 스승 없나?
스승.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물론 사전적인 의미로의 스승은 없다. 왜냐면 자기 자신을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강후이기에.
원작에 쓰고, 기억하고, 느꼈던 모든 것에 스승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면 어느 정도 결은 맞는다.
“없습니다.”
-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괜찮은 암살자 스승 하나를 추천하면 배워 볼 생각 있나?
“그건 저보다 스승이 되실 분의 의사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저를 미리 알고 계실 리는 없고.”
- 토 달지 말고! 질문에 대답이나 해 봐. 생각 있어, 없어?
텐션이 제법 올라 있는 K의 목소리에서는 살짝 신난 듯한 느낌도 든다.
마치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자신이 꼭 연결해 주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당연한 얘기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다.
배움은 언제나 옳다. 배울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있다면 마다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있습니다.”
- 좋아. 알겠어. 있다고 했으니, 나중에 잊어 버리지 말라고.
“네, 알겠습니다.”
- 조만간 형서랑 보혜가 올 거야. 매드 솔라키움을 추가로 확보하면 말해 주지. 부적 건도 수시로 소식 업데이트 해 주고.
“예, 잘 부탁드립니다.”
- 그럼 또 연락하자고.
통화를 마무리하고 나니, K가 말한 스승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K의 인맥 중에 자신의 ‘암살자 스승’이 되어줄 헌터가 누가 있을까?
원작에서 K의 인맥에 대해서는 디테일하게 다뤄진 바가 없어, 쉽게 추측이 되진 않았다.
그와 비슷한 연배 혹은 나이가 제법 있는 노인일 가능성이 큰데, 적당한 인물이 누구일까.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물음표만 가득.
하지만 K가 스승으로 추천해 줄 만한 인연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호기심은 커졌다.
도대체 누굴까?
* * *
내일부터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와 달리, 강후가 평택역에 도착한 시점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아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에 강풍까지 불어서 우산은 존재 가치 자체가 없었다.
날이 이런 탓인지 거리에도 사람이 없었다. 흔히 보이는 차들도 아주 가끔 지나갈 뿐이었다.
‘왜 베니가 평택을 떠나서 다시 대전으로 왔는지 알겠네.’
역 밖으로 나온 강후가 역 근처의 번화가를 보며, 베니가 이곳을 떠난 이유를 실감했다.
유동 인구가 확 줄었다.
단지 날씨가 이래서가 아니라, 새 주인 없이 공실로 남겨진 건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역 근처의 번화가면 못해도 1층은 다 채워져 있어야 정상인데, 8할 이상이 공실인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나부끼고 있었을 길드의 인장들도 전부 찢어지거나 색이 바랜 채로 방치됐다.
이유가 있기는 했다.
얼마 전부터 이클립스가 현지에 있던 군소 길드를 전부 몰아내 버렸기 때문이다.
딱히 평택이 이권이 많이 걸린 도시는 아니라서 의문스러운 행보이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청안 용병단과 흑사자에 밀리고, 전세혁 일당에게까지 뺨 맞은 화풀이를 애먼 곳에 하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강후는 계속 은신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도로를 거닐며 빠르게 이동했다.
강후가 은신한 외형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따라 드러났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행인은 한 명도 없었다. 마치 이곳은 유령도시인 것처럼 조용했다.
얼마 후.
강후가 전세혁으로부터 받은 주소에 맞게 도착한 곳은 버려진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애초에 도시의 2할 이상이 무인지대가 된 평택이라, 버려진 아파트가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헌터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살았을 공간.
하지만 지금은 그때 살던 사람들이 전부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생활 흔적이 아무것도 없었다.
‘접선 장소로는 누추하지만, 그래서 최적의 아지트군.’
강후가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물씬 풍기는 쉰내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냄새야 익숙한 악취이기에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없으면 이상했을 것이다.
우선 방수용 백팩에서 꺼낸 옷으로 갈아입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마당이라 축축한 옷까지 여기서 입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갈아입고, 좀 더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자 반가운 얼굴 둘이 강후를 맞이했다.
전세혁과 반세영.
연락은 계속 하고 지냈지만, 얼굴을 본 지는 제법 시간이 흘렀다.
“오빠, 오랜만?”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오는 길에 별일 없으셨습니까?”
반세영과 전세혁이 차례대로 말을 건넸다.
못 본 사이에 반세영의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강후를 만나자마자, 의식적으로 머리카락을 묶었다.
포니테일 스타일의 묶음. 얼굴이 갸름한 반세영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다.
전세혁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가면을 벗었을 때의 흉터를 가리고 싶었는지.
오른쪽 입꼬리 끝에서 눈 아래까지 이어지는 흉터 라인이 가려지게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다.
풍성하게 수염이 나는 스타일이라서 그런지 제법 멋졌다. 무엇보다 흉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네. 도시가 조용하네요.”
“기존에 있던 길드 세력이 쭉 빠져나가니까 완전히 황량해졌죠. 빈껍데기만 남았달까.”
“수염이 잘 어울리십니다. 저는 아무리 기르려고 해도 나질 않던데…….”
강후가 매끈한 턱 피부를 쓸어내렸다. 농담이 아니라, 이상하리만치 수염이 안 자란다.
남들은 하루에 두 번도 한다는 면도를 강후는 일주일에 한 번 하면 많이 하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보기 싫게 수염이 조금 자란 것을 정리하려는 쪽에 가까웠다.
“일단 복면부터 하시죠. 저희도 내부에서는 이름을 직접 부르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좋네요.”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과는 이미 안면이 있으니 서로 거리낄 것이 없지만.
전세혁과 함께하는 일행은 강후와는 하나 건너의 인맥이기 때문이다.
굳이 정보를 노출할 필요가 없다.
물론 전장에서 스킬만 몇 개 봐도 알아채겠지만,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과 아닌 것은 다르다.
“별칭을 하나 정하시죠. 내부에서는 다들 서로 그렇게 부릅니다. 저나 세영이만 예외지만요.”
“음…… 적당한 닉네임으로 쓸만한 것이라면 모조 정도가 괜찮겠네요.”
“모조품의 그 모조입니까?”
“그건 아니고요. 나름의 사연이 있는 닉네임입니다. MOZO. 이걸로 불러주시죠.”
“알겠습니다, 모조 님.”
“알겠어요, 모조 오빠.”
호칭 정리가 끝났다.
모조.
강후가 원작자이던 시절에 썼던 필명이다.
그래서 사연이 있는 닉네임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을 이름은 아니다.
사실 서로 별칭을 부를 일도 크게 없을 듯했다.
전세혁의 팀과 함께 움직일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는 개인 플레이를 할 것 같아서다.
강후의 목적은 오래전부터 고경호 한 명이었다. 이클립스 구성원에 대한 처단은 그다음이다.
이미 전세혁에게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 확실히 말해 뒀던 만큼, 이 부분은 사전 조율이 끝난 상태다.
강후가 전세혁의 안내를 따라, 지하 주차장보다 한층 아래의 비밀 공간으로 향했다.
팀원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논의가 끝난 계획에 대해 전달할 생각인 듯했다.
반세영이 어디선가 잽싸게 믹스 커피를 타왔고, 덕분에 셋만의 대화가 오붓하게 진행됐다.
마침 몸이 으슬으슬하던 차, 뜨거운 커피가 몸에 들어가니 긴장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각자 한 모금씩 커피를 들이켠 후에 전세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일단 이번 전투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평택 지부 전체를 박살 낼 겁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으로 약만 올리는 식이었을 텐데.”
“이제는 윗대가리를 좀 끌어내야죠. 강동현이 직접 안 나오면, 바로 그 아랫것이라도 볼 수 있게 말이죠.”
전세혁이 손으로 가리킨 강후의 뒤쪽 벽에 이클립스 간부 전원의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저마다 압정이나 클립 대신, 단검으로 단단히 고정해 둔, 나름 의미 있는 장식이었다.
“전면전이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이클립스가 제대로 나서면 이쪽도 희생을 각오해야 할 텐데요.”
강후가 넌지시 물었다.
전세혁이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복수에 대한 일념 하나만으로 무리하게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 치밀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분명 뒷배가 있는 거겠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세력이 더 있는 걸까?
그러자 전세혁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와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대로 나서는 순간부터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이클립스가 될 겁니다. 생각보다 아군이 많거든요.”
역시.
이클립스라는 대어를 낚기 위해 그물을 뿌린 것이 전세혁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다음 순간.
강후는 항상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원작의 전세혁에게는 없던 우군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클립스를 노리기에는 차고 넘칠 지원군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