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업그레이드 (4)
“김신령이 제격이겠네.”
이런 재료를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김신령밖에 없다.
증오의 발톱은 상당히 세심하게 다뤄 줘야 하는 재료. 야매 업자들에게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다.
* * *
강후가 던전 밖으로 나오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한승혁이 서 있었다.
던전 공략은 시간의 기약이 없는데, 언제부터 여기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감시를 하려고 왔다기에는 던전 밖에 조용히 있던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잘 보이기 위해 온 걸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미스테리 던전 내부까지 정리해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말의 흐름을 보니, 처치 곤란의 던전을 정리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러 온 듯했다.
명가 길드에 외주를 맡겼더라면 거꾸로 비용이 지출됐을 텐데, 문제없이 해결이 됐기 때문이다.
강후가 무심하게 손에 들고 있던 초록색 마석 3개를 한승혁에게 휙 던졌다.
“이게 뭡니까?”
“다음에는 미들 보스, 메인 보스가 많은 던전을 알아봐 줘. 수준은 지금보다 낮지 않은 곳으로.”
“아! 알겠습니다. 다른 지역 길드에서 다루기 까다로워하는 던전이 있는지도 살펴보죠!”
이제는 알아서 던전을 물어오겠다는 약속까지 하는 한승혁. 역시 자본주의의 힘은 대단하다.
“내가 연락받지 않거든, 메시지라도 남겨 놔. 용무 외의 메시지는 사양하지.”
“물론입니다!”
“수고하고.”
강후가 유유히 사라졌다.
이후 한승혁의 지시를 받은 수습 짐꾼들이 던전 안으로 향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쓰진 않았다.
콩고물을 여럿에게 묻혀 놓아야, 나중에 또 군말 없이 따르는 법이다.
* * *
시원한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와 조용히 걷고 있던 강후에게 전화가 왔다.
전세혁의 전화였다.
지금 시점에 그에게 연락이 올 이유는 하나뿐. 강후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신강후입니다.”
- 세팅이 다 됐습니다.
“생각보다 빠른데요?”
- 이쪽은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저쪽이 알아서 판을 깔아 주네요. 제게 말씀하셨던 고경호도 확인됩니다.
고경호.
강후가 순흑의 구도자 성좌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반드시 죽여야 하는 헌터다.
사실 성좌 시험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고경호는 죽을 이유가 차고 넘치는 악당이었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이미지가 꽤 괜찮은 편인 강동현과 달리.
고경호는 이클립스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청소부였다. 정화 길드의 신태석 포지션이다.
미스테리 던전에서 쌓인 피로감이 없진 않지만, 이 정도 피로는 늘 패시브 스킬처럼 달고 있다.
그래서 뻐근한 어깨를 몇 번 돌려 주는 것으로 휴식을 대신하고 말을 이어 갔다.
“어디로 이동하면 되겠습니까?”
- 평택 남쪽으로 오시죠. 정확한 주소는 제가 헌터그램의 보안 DM으로 보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대전 외곽을 줄기차게 공략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치가 확 바뀌었군요.”
- 뭐, 나름의 성동격서 전략이죠. 지금도 이클립스의 대다수 전력은 대전에 있을 겁니다.
고경호가 아무 이유 없이 평택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평택 남쪽에 위치한 이클립스의 지부는 생각보다 규모가 제법 되기 때문이다.
대전에 기반을 두고 있던 이클립스가 처음 세력을 확장한 곳이기에 의미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고경호 쯤 되는 서열의 간부가 왔다는 것은 아마도 조직원 독려 차원일 것이다.
최근 전세혁을 비롯한 그의 무리들에게 집요하게 괴롭힘을 받고 있으니, 사기가 땅에 처박혔겠지.
그런 시기에 간부가 와서 모두를 격려하고, 힘을 불어넣어 주는 건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강후에게는 최고의 기회.
전세혁이 이어 물었다.
- 합류하시겠습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다.
당장 타카시나 아야네, 김신령을 만날 일정도 없고, 다급한 외부 일정 역시 없다.
시간이 붕 뜨는 상황이라, 이런 시점에 적절하게 기회가 온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이동하겠습니다.”
- 바로 와 주시면 더 좋을 듯합니다. 디데이인 내일 밤부터 경기 남부에 호우 특보가 있거든요.
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최고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 날씨다.
자신에게 묻는다면, 강후는 비를 선호하는 쪽에 속했다.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어둠을 벗 삼아야 하는 암살자 입장에선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주니까.
빗소리는 발소리를 없애고, 비구름은 밝은 햇빛을 지운다. 암살자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주소 주시죠.”
강후가 방향을 수원역으로 잡았다.
* * *
그 후.
수원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두 차례 연락이 왔다.
첫째는 K로부터 온 연락이었는데, 담즙 정제가 일찌감치 끝났으며 ‘배송’이 시작됐다고 했다.
강후가 미스테리 던전에 들어가기 전, K에게 간략하게 현재 위치를 얘기해 뒀던 터라 배송을 위해 고용된 업자가 이미 그쪽으로 출발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수원역에 있는 무인 보관함에 보관해 줄 것을 요청했다.
판매자, 중개자, 구매자의 대면이 일체 없는 과정이라 서로 얼굴이 노출될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이예린에게도 연락이 왔다.
그녀에게서 올 연락은 해외 의뢰에 관한 것밖에 없는 터라, 강후가 부지런히 전화를 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몇 일 분량이었을 통화를 하루에 몰아서 하는 느낌이었다.
- 독일 쪽에서 용병 의뢰 하나가 들어왔어요. 처음부터 지명으로 들어온 던전 공략 의뢰에요.
“들어 보죠.”
- 일단 지명된 헌터는 강후 씨와 아야네 씨에요.
“출혈 유지만 필요한 게 아닌 모양이죠?”
- 네. 아야네 씨가 없으면 강후 씨도 꽤 고전할 수밖에 없는 의뢰라더군요.
호기심이 동한다.
저격수가 꼭 필요한 던전 의뢰면, 보통 공중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몬스터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환경이기에 암살자와 거너가 한 묶음으로 움직여야 하는 걸까?
일단.
자세한 내용을 듣기 전에 먼저 거꾸로 제안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강후가 독일을 최우선 의뢰지로 염두에 둔 것은 타락 시리즈의 세트 아이템 때문이다.
현재 남은 아이템 중에 흉갑의 위치가 바로 독일이었다.
정확히는 드레스덴에 있는 츠빙거 궁전 인근에 있는데, 코드 분류 13번의 던전에 있다.
현재 해당 던전을 소유 중인 길드는 독일의 캄프 길드다.
“일단 의뢰 보수를 대체할 다른 보상을 먼저 협의하고 싶은데. 대화 가능합니까?”
- 그럼요. 지금 클라이언트 쪽과도 아예 연결돼 있어요. 실시간 중개가 가능하죠.
“드레스덴. 츠빙거 궁전 인근. 코드 분류 13번 던전 공략 라이센스를 보상으로 받고 싶습니다만.”
- 잠시만요.
보통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그 던전에 뭐가 있어요? 하고 되묻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후와 전혀 연고가 없는 해외의 특정 던전을 짚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던전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예린은 이유는 절대로 묻지 않고, 바로 클라이언트와 대화를 이어 갔다.
능숙한 독일어가 들린다.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라틴어, 영어에 능한 강후지만 독일어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지금은 아쉽게도 그녀의 유창한 발음을 임의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약 3분의 대화가 이어졌다.
사실 바로 답이 나오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결과가 빨리 나왔다.
- 가능하다네요. 독일은 국내와 달리 라이센스 대여나 트레이드가 활발한 곳이잖아요? 그래서인 것 같아요.
“그럼 의뢰 내용을 확인하는 대로 수락하죠. 아야네는 뭐라던가요?”
- 아직은 연락 안 한 상태에요. 출혈 유지가 없으면 애초에 성립도 안 되는 의뢰거든요.
“그렇군요. 들어 보죠.”
- 샤프리히터라는 식물에서 진액을 채취해 주면 된다고 해요. 그게 전부지만, 그래서 어렵다네요.
“샤프리히터라…….”
샤프리히터. 한국식으로는 사형집행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식물이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 식물이지만 공격 능력을 다수 보유한 돌연변이 식물이었다.
일전에 그라운드 제로에서 마주쳤었던 돌연변이 해바라기와 결이 비슷한 녀석이다.
- 문제는 진액을 채취하려면 출혈이 최대 중첩이어야 하고, 출혈 유발자는 집중 공격을 받는다고.
“한 마디로 출혈을 계속 유지하면서 방해를 계속 받아내 줄 업자가 필요하다는 건데.”
- 맞아요. 그런 실력자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강후 씨에게 문의가 들어온 듯해요.
“앞서 실패했던 의뢰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까?”
- 13전 13패. 나름 쓸만한 광전사, 암살자를 보내 봤지만 모조리 실패한 모양이에요. 사망한 케이스도 여섯 차례 있어요.
“희망 고문까지 있는 모양이네.”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의뢰꾼들이 의뢰에 진심인 것은 맞지만, 목숨을 걸고 하지는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다가 실패할 것 같으면 미련 없이 그만둔다는 얘기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중간에 포기하면 해당 클라이언트와 거래가 끊기고, 용병단에서 보는 가치가 깎이긴 하겠지만.
용병단이야 새로운 곳을 찾으면 그만이고, 의뢰를 줄 클라이언트는 차고 넘치는 곳이 이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세 번의 케이스 중에 여섯의 케이스가 죽었다면…… 이유는 하나다.
될 듯 말 듯, 도전하는 의뢰꾼을 희망 고문하는 요소가 상당히 많다는 뜻이다.
즉, 악질적으로 침입자를 유린하는 몬스터라는 얘기다. 보통내기가 아닐 터다.
“진행하죠. 호기심이 크게 동하네요. 게다가 보수 변경도 동의해 줬으니 불만도 없고요.”
강후가 의뢰를 받았다.
타락 시리즈 흉갑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못 먹어도 고다.
그때.
- 클라이언트가 밝혀도 되는 정보라고 해서 미리 말씀드려요. 독일의 슈타크 길드에요.
“슈타크?”
- 네. 좀 생소한 이름이죠?
아니다. 익숙한 이름이다.
강후가 슈타크 길드를 아는 것은 여기에 열세 개의 별에 합류하지 않은 헌터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저스티스’로 명칭된 열세 개의 별에는 총 여덟 명의 헌터가 있다.
아직 다섯은 합류하지 않은 상황.
그중 한 명에 해당하는 인물이 슈타크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로 있다.
‘라르스 아벨.’
원작에서 야심가로 그려진 인물이다.
그랬기에 장시환이 라르스에게 ‘신세계’를 보여 주겠다며, 열세 개의 별에 영입했었다.
당시 세계적인 인맥과 수준급의 동료를 보유한 장시환은 라르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합류 시점은 2년 후. 지금보다 장시환이 몇 단계는 더 성장해 있을 시점이다.
‘이렇게 연결고리가 생기네.’
라르스도 큰 틀에서 보면 골수 열세 개의 별은 아니다.
포섭이나 설득이 불가능한 장시환, 채관형, 케이시 렉스, 빈센트 마이어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물론 타카시 같은 녀석을 다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야심가의 마음을 얻어내는 방법은 하나뿐이니까. 야심을 채워 주는 것밖에는 없다.
필요에 의해서 우선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의 의뢰. 여기서 의외의 물꼬가 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