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업그레이드 (1)
* * *
한승혁을 만났다.
철저하게 저자세로 나오는 한승혁을 상대로 강후는 넉넉하게 선심을 써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약 한승혁이 이용 가치가 없었다면, 저자세는 곧 그를 무시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승혁은 온누리 길드에서 소유한 던전 전반의 관리와 조율을 담당하고 있는 헌터였다.
그렇기에 한승혁에게 먹이는 돈은 곧 온누리 길드의 던전에 대한 접근 권한을 얻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투자가 아깝지 않은 것이다.
넉넉하게 돈을 갖고 있지만 던전이 없는 강후와 던전에 대한 권한은 있지만 돈은 없는.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지니, 서로 윈-윈인 셈이다.
“이건 또 무슨 돈입니까?”
“건강보험비.”
“예?”
“길드 던전을 통째로 관리하느라 과로가 일상일 텐데, 건강 관리에도 돈을 아끼지 말라고.”
“아……! 그런 거였군요! 감사합니다!”
한승혁이 강후에게서 건네받은 한 뭉텅이의 돈을 잽싸게 수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 돈은 온전히 한승혁의 소유가 되는 돈이지만, 가장 의미 있게 쓰이는 돈이었다.
던전 한 곳의 공략권만 얻어내도, 거기서 스킬을 얻어내는 것은 확정적이다.
어지간해서는 미들 보스, 메인 보스는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최소 2개의 스킬이 확보되는 셈.
스킬 하나의 가치가 몇십, 몇백억은 우습게 넘어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승혁의 입에 열심히 부어 주고 있는 몇억 원의 돈은 푼돈이라는 것이 강후의 생각이었다.
“공식 책정된 라이센스 대여 금액에 20%는 무조건 따로 챙겨 주지. 요령껏 대여가를 낮추면, 차액은 네가 가지면 되고.”
외모로만 봐도 노안인 한승혁이 강후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화의 균형추는 달랐다.
헌터 세계에서는 힘과 돈이 곧 서열 아니던가. 한승혁에게 돈 많은 강후는 영원한 ‘형님’이다.
한승혁이 강후에게 받은 지폐를 세느라 정신없는 동안, 강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용을 보탰다.
“하지만 책정가를 갖고 장난치다 걸리면 모든 장난을 소급해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아우, 모가지 날아갈 일 있습니까?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주기적으로 대여가도 공유해 드리죠.”
강후는 돈으로 하는 대화가 편했다.
그리고 한승혁은 적당히 자기 앞가림도 하고, 들키지 않게 운영하면서 필요 이상의 욕심은 내지 않는 적절하게 부패한 수준의 관리자였다.
한승혁이 물었다.
“어떤 던전을 원하십니까? 최대한 공통 키워드가 많은 쪽으로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온누리 길드가 소유한 던전의 특성은 모두 꿰고 있는 건가?”
“자기 물건인데 모르고 파는 판매자가 있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레벨 300에서 400 수준으로 혼자 공략할 수 있는 던전으로.”
“……예?”
“못 들었어?”
“아, 그게 아니라 너무 눈높이를 높게 잡으신 것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레벨 300 이상의 던전을 ‘솔플’하려면 레벨이 400 이상은 되어야 한다.
그것도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는 없고, 상당한 실력을 가진 레벨 400의 헌터일 때 가능하다.
당장 온누리 길드에서도 혼자서 공략할 수 있는 헌터는 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넉넉하게 준 돈이 오히려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모양이네.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싶어.”
“아,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있습니다! 마침 묵혀지고 있는 던전이 있거든요.”
점잖은(?) 강후의 경고에 한승혁이 판단이라는 행위 자체를 중단하고, 목적에 충실했다.
그가 서류철에서 잽싸게 꺼내서 내민 것은 첫 줄부터 흥미로운 타이틀을 달고 있는 던전이었다.
‘미스테리 던전.’
전에 명가 길드원들과도 간 적이 있는 부류의 던전이다.
던전을 처음 발견한 헌터가 던전에 입장하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들어갈 때마다 내부 구성이 완전히 바뀌어, 공략법이 의미가 없는 던전.
그런 던전이 온누리 길드 소유의 던전 중에도 있는 모양이었다.
한승혁이 설명을 이었다.
“사실 공략은 한 번도 안 됐습니다. 하지만 탐색 과정에서 파악된 수준은 그쯤 됩니다.”
“계속 들락날락하면서 파악해 낸 초입 몬스터의 수준이 그쯤 된다는 얘기지?”
“예, 맞습니다! 사실 조만간 명가 길드 쪽에 외주로 맡겨서 처리할 예정이었습니다만…….”
“대여비는?”
“20억 원입니다!”
“…….”
강후가 말없이 품에서 꺼낸 타락한 신념을 살살 만지기만 하자, 한승혁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처치 곤란이 되어버린 터라, 무료로 입장 가능하십니다.”
“커미션은 넉넉히 챙겨 줄 테니까, 내겐 영업할 생각하지 마. 마지막 경고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차 서로 간에 쓸데없이 힘 빼지 말자는 얘기야.”
“예! 어쨌든 이 던전은 바로 입장 가능하십니다. 열쇠가 될 헌터도 마침 대기 중이고요.”
“동행은 거절하고 싶은데.”
“그래서 입장만 같이 유도해 드리고 바로 나올 겁니다. 재입장도 없을 거고요.”
“대여 처리는?”
“외주로 처리해야지요. 따로 기록 복잡하게 남기지 않을 생각입니다.”
한승혁의 말은 즉, 강후에게 던전 라이센스를 대여했다는 기록도 안 남기겠다는 얘기였다.
골치 아픈 처치 불가의 던전을 외주로 처리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기겠다는 얘기.
온누리 길드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여기저기 이름을 출석부처럼 남기는 일은 줄이고 싶었다.
어쩔 수 없다면 남기겠지만, 어쩔 수가 ‘있다면’ 안 남길 방법을 찾는 건 당연한 얘기다.
터억!
강후가 백팩에서 꺼낸 5억 원어치의 돈뭉치를 던져 줬다.
이렇게 돈을 주고도 여전히 통장에는 2,630억 원의 잔고가 보란 듯이 찍혀 있다.
값비싼 아이템을 사지 않는다면 사실,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어려운 것이 지금의 강후였다.
“앞으로도 수고 좀 해 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님!”
강후의 듬직한 한 마디에 한승혁이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역시 돈 많은 헌터가 형님이고, 선배고, 존경하는 손님이다. 한승혁의 사고 구조는 간단했다.
* * *
한승혁의 말대로 열쇠가 되어 줄 온누리 길드의 헌터는 강후와 입장만 함께한 뒤에 바로 빠졌다.
한승혁이 헛짓거리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100% 신뢰할 생각도 없기에.
【제3의 눈】
【지정한 지점에 제3의 눈을 설치하여 해당 눈의 시야만큼 시야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제3의 눈은 투명한 형태라서 보이지 않으나, 마나의 흐름에 민감하여 쉽게 파손됩니다.】
눈을 설치했다.
다른 곳을 보게 할 필요가 없었기에 시야의 방향은 던전 입구 쪽으로 잡았다.
두 눈으로 본 시야와 별개로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던전 입구 시야가 공유되는 상황.
처음에는 그렇게 되면 정보 판단에 혼선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전략 게임으로 따지면 미니맵, 방송으로 따지면 분할 화면을 보는 느낌으로 파악이 가능했다.
‘좋네. 시야도 선명하고, 실시간으로 확인되는 CCTV 하나 설치한 느낌이군.’
앞으로도 쭉 가치 높은 스킬로 활용할 수 있을 듯했다.
후방을 살피고 싶을 때, 이런 스킬이 없으면 결국 인력을 써야 해서다.
그 ‘한 명’을 절약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지는 가치를 경험한 헌터라면 모두 알 것이다.
꾸욱.
강후가 타락한 신념을 왼손으로 쥐었다.
전투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만큼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무조건 왼손을 주 손으로 할 생각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특징적으로 한 손만 쓰는 것도 결국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조건 오른손으로 단검을 쓰는 암살자는 바깥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은 반드시 우측에서밖에 할 수 없다.
그 말은 즉.
상대하는 입장에선 바깥쪽 공격을 좌측으로 파고들면서 대응하면 된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다가 옵션을 하나 더 추가해서 훈련을 해야겠군.”
추가할 옵션은 공세적 회피.
공세적 회피란, 적의 공격을 피하는 건 맞지만 뒤가 아닌 앞으로 피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회피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역습으로 이어져서다.
일반적인 회피는 피하는 것으로 결과가 끝이 나고, 상대에게 계속 공격권을 주게 되지만.
공세적 회피는 피하면서 동시에 공격권을 내 쪽으로 갖고 오기 때문에 전략의 선택지가 많아진다.
“무리 여왕과의 전투가 내게는 정말 많은 의미가 된 것 같다.”
자극이 크게 됐던 전투였다.
매드 솔라키움과 각신환까지 들이부어 가면서 이겼으니,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지금 자신이 레벨 200 중반을 겨우 넘보는 시점에 너무 높은 곳을 보고 있는 것도 맞았다.
무리 여왕도 레벨로 따진다면 500에 가까운 수준은 되니까.
하지만 그쯤 해야, 레벨 300대, 400대의 헌터와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몬스터는 몰라도, 헌터는 각성제나 마약으로 자체 버프가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킬이나 약제를 통한 능력 상향은 강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만들어 낼 수 있는 변수다.
그래서 눈높이를 늘 높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힘의 격차에 당황하는 일이 없어진다.
“무슨 스킬이 있으려나.”
강후가 호기심으로 가득 찬 표정과 함께, 유유히 투명해지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잔챙이에는 관심 없다.
빠른 공략으로 미들 보스, 메인 보스에게 스킬을 악착같이 강탈하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였다.
* * *
2시간 후.
‘재밌군, 재밌어.’
강후는 갈수록 중력이 늘어나는 던전의 환경에 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마치 수련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져서다.
그래서 계산한 것보다 더 빠르게,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가속 스킬을 써야 했다.
게다가 중력의 압박에 몸을 익숙하게 만들기 위해, 좀 더 효과적인 자세를 연구해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이 흥미로웠다.
가치 역시 컸다.
헌터 중에는 중력장 형태의 공격을 구현하는 능력자도 있기 때문이다.
중력의 강화는 허무맹랑한 환경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는 변수다.
‘이래서 미스테리 던전을 긁어 보지 않은 재밌는 복권이라고 말하곤 하지.’
누군가에겐 지독한 시련일 수도 있지만 강후에게는 즐거운 자극이다. 이런 경험을 하긴 쉽지 않다.
강후가 미들 보스를 죽이고 얻은 스킬을 확인했다.
창을 쓰는 녀석이라서 상대하기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빈틈이 많은 녀석이었다.
【화룡창】
【스킬 숙련도 : Lv. Max】
“이름 마음에 드네.”
스킬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창과 창술을 기본으로 하는 스킬이었다.
초감각 덕분에 강후는 생전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창술에 대해서 기본적인 학습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예전에 허정태에게 빼앗은 뒤에 갖고 있던 ‘강격의 장창’도 있으니 무기도 있는 셈.
그래서 복잡할 것 없이, 곧바로 스킬의 화력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강격의 장창 – 무기】
【등급 : 4등급】
【근력 +100】
【원하는 만큼 장창의 길이를 자유자재로 줄일 수 있습니다. 단, 최대 길이는 정해져 있습니다.】
품에서 강격의 장창을 꺼낸 강후가 녀석을 최대치로 늘린 다음, 화염창을 시전했다.
그 순간.
화르르륵!
거대한 화염룡이 장창을 휘감은 채로 거칠게 불을 뿜어내며, 강맹한 기운을 일으켰다.
그것은 분명.
화룡창에 휘말린 모든 것을 불태우고 녹여 버릴, 용의 분노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