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225화 (225/304)

225화 만남 (5)

파트너십 계약.

서로를 ‘이용’할 기회를 각 한 차례씩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형식적이기는 하나, 치안청에서 개설해 둔 파트너십 계약 홈페이지에 계약이 공시된다.

치안청의 기능이 수도권 안으로 한정되는 지금, 큰 구속력과 영향력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계약을 위반했을 때, 이 부분을 자세하게 공시해서 평판을 박살 낼 수 있는 위력 정도는 있었다.

계약 위반에 대한 배상이나 이행을 강제할 수는 없어도, 해당 헌터의 신뢰를 끝장낼 순 있었다.

만약.

강후가 그루 길드 소유 혹은 그들이 대여받은 던전의 공략을 요청했고 완료했다면?

다음에는 그루 길드에서 요청하는 던전 공략에 참여해 줘야 했다.

물론 파트너십 계약은 던전 공략에만 한정되므로, 특정 세력을 공격해 달라는 계약은 불가능했다.

철저하게 중립의 의무가 들어가는 만큼, 오픈형 던전으로 들어가는 계약도 불가능했다.

그 안에서는 분쟁 이슈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아서다. 가능성의 원천 차단인 셈.

‘내겐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지.’

강후의 입장에서는 결국 던전을 두 번 가게 되는 것과 같았다.

강후의 필요에 의해 던전을 요청할 것이고, 저쪽도 그런 이유로 던전을 안내할 테니까.

그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분야는 출혈 셔틀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예상하고 있는 바.

어떤 식으로 돌려 봐도 이득이라 거절할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질 정도다.

이미 결정을 내린 강후지만, 살짝 대답을 유보하고 있자 오유진이 좀 더 어필했다.

“저희 길드는 아시다시피 중립이다 보니, 예전부터 국외 길드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 왔어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특히 북유럽 쪽 길드와의 인맥에 강점이 커요. 많은 나라를 가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해요.”

북유럽 쪽에도 매력적인 던전은 많다. 나름의 사연과 스토리를 가진 곳도 많고.

더 나아가 장시환과 채관형에게 ‘기연’으로 작용하는 이슈가 담긴 던전도 있다.

여러모로 전략적 가치가 큰 곳이 많으므로 강후에게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1회로 먼저 계약을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강후가 역제안했다.

보통은 파트너십 계약의 총량을 2회에서 3회를 하는 편이다.

한 번으로는 서로에 대해 판단하기가 어렵고, 간을 본다는 인상을 크게 주기 때문.

파트너십 계약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어느 정도 밑에 깔고 하는 것이다 보니…….

2회에서 3회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강후는 그루 길드에 대한 신뢰가 아직은 없는 만큼, 횟수를 제한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실까요?”

“네, 그렇다면 진행하겠습니다.”

“홈페이지 공시에는 동의하실까요? 형식 절차이지만, 동의가 없으면 진행이 안 되긴 하니까요.”

“물론입니다.”

그루 길드와의 파트너십 관계가 알려진다 해서 나쁠 것은 없다.

어느 한쪽 편에 기울어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문제지, 그루 길드는 완벽한 중립이니까.

그렇게 계약이 진행됐다.

만약 강후가 미들 보스, 메인 보스 몬스터로부터 스킬을 강탈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다면?

이 계약이 얼마나 강후에게 이득이 될지 알고는 조건을 바꿨을 것이다.

다양한 던전을 가 보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되는 강후로서는 쌍수 들고 반길 제안이니까.

하지만 모르는 입장에서는 출혈 딜러를 확실하게 한 번 써먹을 기회를 얻었다 여기겠지.

굳이 그들의 기분 좋은 오해를 깨 주고 싶지는 않다. 행복한 착각은 하도록 두는 게 더 좋기에.

이후.

오유진 일행이 강후와의 파트너십 계약을 마무리하고 다시 제주도로 돌아오는 길.

오유진이 계약서에 선명하게 적힌 강후의 서명을 보면서,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작은 원래 다 이렇지. 점점 우리 길드에 스며들게 하는 거야. 자신 있어. 우리 인맥이라면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될 거야.”

오혜진과 마진호의 반응도 같았다. 지금 길드 내에 있는 유능한 헌터들은 다 그렇게 합류했다.

강후 역시 그루 길드의 매력에 푹 빠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유능한 암살자 인재가 그루 길드의 이름으로 활약하게 될 것이다.

정작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지만, 떡 받을 사람 셋은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 * *

다시 호텔로 돌아온 강후는 그루 길드에게 어떤 던전을 요청할지 고민했다.

이왕에 온 기회라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고, 그루 길드는 그럴 만한 수완이 있는 곳이기에.

이현석과 약속된 심연의 던전에 대한 공략 건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쪽은 잡은 물고기와 같으므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천천히 진행해도 문제는 없다.

‘해외로 나가면서, 동시에 장시환이나 채관형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을 가는 게 좋겠지.’

기연 가로채기.

강후가 항상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장시환이 ‘주인공 보정’으로 얻은 기연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인연이 닿게 될 기연을 미리 가로챌 순 있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으니까.

노르웨이, 오슬로.

오슬로 대성당 인근에는 던전이 한 곳에 몰려 있는 장소가 존재한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총 열세 개의 던전 입구가 십자가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서 사람들은 성스러운 던전이라고 부르곤 했다.

실제로 던전 주변은 다른 곳에 비해 압도적으로 치유력과 회복력이 좋아, 따로 병원까지 지었다.

일종의 영구 버프인 셈인데, 근거 없는 낭설이 아닌 과학적, 의학적으로 입증된 영역이었다.

여기서.

훗날 장시환은 쓸모 있는 흑마법 스킬북 하나를 얻게 되고, 채관형은 1등급 대검을 얻는다.

원작에서는 ‘구원의 성녀’ 엘리자베스가 입장할 수 있도록 손을 써 줘서 들어갈 수 있었다.

오슬로에 기반을 둔 ‘그라티아’ 길드와 대성당에 인맥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들어갈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던전.

그래서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강후는 접근할 엄두를 내 볼 수조차 없었다.

용병단을 통한 문의는 아예 받지도 않기에 이예린을 통한 접근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루 길드와 계약을 맺게 되면서, 생각지 않았던 활로가 열리게 된 것이다.

‘문제는 갈 수 있게 되더라도 반드시 동행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건데.’

성스러운 던전 13개는 전부 인원 제한이 걸려 있다. 최소 2인, 최대 2인이다.

즉, 무조건 2인만 입장할 수 있는 던전인 셈. 3인도 안 되지만, 1인 역시 입장이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원작에서도 장시환이 동료 채관형을 데려갔고, 함께 기연을 얻었다.

만약 강후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자신과 함께 기연을 누리게 될 한 사람을 선택해서 들어가야 한다.

‘애초에 원작에서 채관형의 힘도 같이 끌어올려 줄 생각으로 짰던 던전이라 독식도 안 돼.’

개별적으로 활성화되는 기연이라, 둘이 들어가서 혼자 다 해 먹는 그림은 불가능하다.

결국 강후가 가장 신뢰하고, 끝까지 갈 것 같은 사람에게 기연을 나눠 줘야 의미가 생기는 상황.

여러 얼굴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박동재. 유능한 버퍼이고, 강후에 대한 충심(?)도 높다.

그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정유리. 원작에서 경험한 성장 곡선을 생각하면 그녀의 급성장에 날개를 달아줄 가능성이 높다.

안영호도 리코우 길드에서의 전폭적인 성장 지원을 등에 업고 있는 만큼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기연까지 더해진다면, 이 녀석 역시도 기량이 만개할 확률이 높다.

“아니면…… 타카시?”

신뢰의 영역에서는 아직 점수를 낮게 줄 수밖에 없지만.

기연을 얻었을 때 파급력이 가장 큰 존재를 생각하자면, 타카시가 제격이다.

물론 여전히 열세 개의 별에 소속되어 있고, 자신과 구축한 신뢰가 높지는 않은 만큼.

이 선택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열세 개의 별 소속 일원에게 힘만 더해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신중해야 할 문제네.”

과연 어느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면서 가장 큰 도움이 될까.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확실한 건, 일단 장시환과 채관형의 입에 들어가게 될 기연은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다른 동반자에게 나눠 주는 기연이 헛수고가 되어도, 저 둘의 배를 불리는 일은 막아야 한다.

* * *

그루 길드와의 만남까지 마무리하고 나니 시간이 떴다.

K에게 담즙을 받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고, 김신령도 이후에 연락은 없는 상태.

정해 놓은 던전 공략 이슈가 없다 보니, 몸은 가벼운데 할 일이 없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강후는 수원역으로 다시 방향을 잡았다. 온누리 길드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앞서 한승혁에게 넉넉하게 돈을 먹여 둔 덕분에 온누리 길드 소유의 던전 라이센스를 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마침 연락을 넣자 한승혁이 깨어 있었고, 만남도 바로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미련 없이 수원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수원역으로 가는 길.

역사 전광판을 통해 보이는 뉴스에서는 정화 길드의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산의 범죄 세력이 모두 평정되고, 정화 길드가 ‘재건’에 나섰다는 얘기였다.

정화 길드가 짓밟고, 정화 길드가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그림.

거기에 거창하게 재건이니, 중점 사업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역겨웠지만.

“오산으로 이사나 갈까? 정화 길드에서 직접 관리하면, 치안은 확실하잖아?”

역시나 사람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이제 오산도 살만해지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더 많았다.

정화 길드가 오산 일대의 모든 이권을 차지하게 됐으니, 사람들의 말대로 되긴 할 것이다.

적어도 민간인의 입장에서는 정화 길드를 반길 수밖에 없다.

문득, 치안청이 떠올랐다.

지금의 치안청은 정화 길드 2중대라고 불릴 정도로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동행이 원작에서 끝까지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깨지는 이슈가 생긴다.

치안청이 장시환과 채관형을 위시한 정화 길드 간부를 모두 암살하고.

그들이 가진 이권과 영향력을 차지하려다가, 발각되어 거꾸로 당한 사건.

원작에서야 당연히 치안청이 악마보다 더 타락한 자들로 그려져, 불의를 박살 낸 쾌거가 됐지만.

정말 그들이 ‘불의’의 세력이었을지는 엔딩에 맞춰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 장시환으로부터 테러를 획책한 범죄 조직이라는 누명을 쓰고 토벌된 하얀 장미단처럼.

치안청에게 ‘가짜 죄목’이 붙여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치안청까지 정화 길드 관할로 들어가면, 그때는 공권력까지 휘두를 수 있게 돼. 지금은 형식적으로라도 협력의 그림이지만…….’

치안청의 존재를 삼국지연의의 내용에 비교해 보면, 후한 황제를 옹립한 세력에 비유할 수 있다.

비록 꼭두각시이기는 해도 황제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던가? 지금의 치안청이 딱 그렇다.

하지만 황제가 사라지고, 그 정통성을 승계받게 된다면? 그때는 황제 그 자체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괴물.’

장시환을 떠올리면 괴물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괴물을 잡으려면 그보다 더 악랄한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드라마 속의 대사도 기억난다.

어떻게 하면 정화 길드의 이름으로 단단하게 구축된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게임 체인저는 없는 걸까?

덜컹거리는 열차 안.

품속의 단검을 움켜쥔 강후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전히 이 세상은, 빌어먹을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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