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224화 (224/304)

224화 만남 (4)

* * *

숙소로 돌아온 강후는 A4 용지에 국내 지도를 간략하게 그렸다.

직관적으로 느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내의 판도가 어떤 그림으로 돌아가는지를.

먼저.

서울에 정화 길드의 이름을 적고, 붉은색을 칠한다. 붉은색은 잠재적인 적의 색깔이다.

‘서울은 정화 길드와 치안청의 영역. 내가 장시환과 맞서는 순간부터 완전히 적이 된다.’

지금으로선 서울이 장시환의 기반이자, 그가 쌓아 올려온 거대한 요새와 같다.

이것은 서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착실하게 믿음을 쌓아온 장시환의 노림수니까.

그다음, 경기도 북부와 북동부에 빗살 형태로 푸른색을 쭉쭉 그었다. 잠재적 우군의 색깔이다.

‘심연의 영역. 그쪽을 완전히 장악한 덕분에 심연은 북한 쪽으로의 접근성이 좋지.’

영향력이 닿는 면적으로만 본다고 하면, 심연이 훨씬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헌터와 헌터 간의 싸움은 땅따먹기가 아니다.

규모와 질을 봐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심연이 확실하게 열세다.

다음으로는 강원도.

이곳은 동해에 가까운 도시를 제외하면, 정화 길드 산하의 위성 길드가 많은 곳이다.

애초에 활동 헌터 자체가 적은 곳이기는 하지만, 포괄적으로 본다면 정화 길드의 영역이다.

‘심연이 포위되는 형태지. 이래서 이현석도 완전히 서울만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샌드위치처럼 양쪽으로 정화 길드와 위성 길드에 눌려 있는 형국이라 심연의 활동폭이 억제된다.

게다가 강후의 눈에 볼 때야 위성 길드지, 실제로는 정화 길드와 관련 없는 ‘척’하는 길드도 많다.

그래서 심연이 위성 길드를 잘못 건드렸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정화 길드와 전혀 관련도 없는 길드에 누명을 씌워, 그들을 살육했다고 말이다.

게다가 서울을 노리기에는 이현석의 전력이 넉넉하지 않다.

이래저래 포위망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구조.

외부에서 다른 요인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런 교착 상태에는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부산 쪽에는 해영 길드가 있다. 정화 길드와 상호 협력하기로 한 길드.

해영 길드의 기반은 부산이나, 넓게 보면 경상권에 알음알음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이러면 국내의 남동부 역시 정화 길드의 입김이 닿는, 옅은 적색의 영역은 되는 셈이다.

‘포인트는 여기인가.’

강후가 선을 쭉쭉 그었다.

경기 남부권과 대전을 포함하는 중부 권역을 영역으로 담는 두 개의 직선.

현재 이곳은 춘추전국시대라는 표현이 잘 맞을 정도로 다수의 길드가 각축전을 벌이는 곳이다.

당장 대전만 해도 세 단체가 뒤엉켜 있는 상황. 그래서 역설적으로 서울의 입김이 안 닿는다.

‘교착을 깨려면, 경기 남부권과 대전을 포함한 중부 일대가 반 정화 라인으로 가야 해.’

이 영역이 만약 정화 길드에 대적하는 영역으로 바뀌면, 그때는 서울도 둘러싸이는 형태가 된다.

“후.”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침대에 누웠다.

그림 놀이를 한다고 해서, 현실에서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앞으로의 전략에 방향성을 만들어 줄 수는 있다. 지금으로서는 대전 일대가 중심으로 보인다.

마침 거기엔 이예린의 청안 용병대가 있다. 하지만 잠재적 적수로 흑사자와 이클립스가 있다.

“대전, 대전…….”

자꾸 입에 감기는 이름.

이곳이 앞으로 국내 판도 변화에 있어 중요한 위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강후는 원작자의 삶을 살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많은 것이 신강후에 동화되어 기억에서 거의 잊혀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꿈은 잊은 기억과 무의식을 끄집어내, 실감 나는 현실처럼 눈앞에 만들어 놓았다.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완결 회차를 올리고, 푹 자고 일어난 꿈속의 자신.

기분 좋게 스마트폰을 열고 들어간 연재 플랫폼 게시판은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온갖 비난, 비판으로 도배된 완결 회차의 덧글과 하루아침에 2점 가까이 떨어진 별점까지.

손이 파르르 떨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요동쳤다.

그 순간, 깨달았다.

완결을 잘못 내도 한참은 잘못 냈다는 것을.

남들과 다른 완결을 낸답시고, 차별화를 준 것이 결국 차등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후회하고 자책하고 절규했지만, 수습은 불가능했다.

성난 독자의 마음은 완결 에피소드를 수정한다는 공지에 오히려 더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그럴 거면 왜 부역자 엔딩을 냈냐는…… 원작자로서는 변명 불가능한 지적이었다.

그래서 소리쳤다.

바로 잡고 싶다고.

되돌리고 싶다고.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끝내버린 내 소설의 끝을 바로잡고 싶다고!

* * *

그리고 지금.

“꿈 한 번 더럽군.”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깬 강후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꾸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돌아갈 수나 있을지 모르는, 아니, 빙의하기 전의 삶을 떠올리고 싶진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이다.

뒤돌아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후우.”

옆에 놓아 둔 유리컵 속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TV를 켰다.

뉴스에서는 정문 제4 연구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속보로 다루고 있었다.

외부 헌터와의 전투가 아닌, 자체적으로 일어난 내부 폭발이라는 것이다.

“내부자 소행인가?”

가능성 높은 추론이다.

부역자 엔딩에 맞물려 역산한다면?

정문 제약 안에 정화 길드에서 심어 놓은 내부자가 있을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원작대로면 각신환의 유통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

다만 유통사는 정문 제약이 아닌 라이머 제약…….

“내가 왜 이걸 지금 떠올린 거지?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었군.”

갑자기 번뜩 떠오른 생각에 강후의 표정이 변했다.

1년 새에 같은 약제를 두고 유통 및 공급 제약사가 바뀌었다는 것은 정문 제약의 내외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

지난번 제1 연구소 건으로 정화 길드가 정문 제약에 비틀린 욕심을 갖고 있다는 건 확인했다.

다국적 용병대를 따로 제어하지도, 그들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거나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훗날 정문 제약의 새 이름인 라이머 제약은 해외 자본과 입김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를테면 케이시 렉스가 이끄는 포르투나 길드의 영향권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장시환이 채관형에게 라이머 제약으로부터 각신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만 나온다.

이후에 공급이나 제약사에 관련된 이슈가 생긴 것은 없어, 따로 다뤄질 일이 없었다.

‘장시환과 정화 길드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지. 독점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얘기다.

“이러면…….”

정문 제약의 몰락이 더 이상 남의 일만이 아니게 된다.

각신환의 압도적인 효능은 이미 강후가 온몸으로 체감한 상태.

이게 그대로 흘러 들어간다면?

아직은 레벨과 성장에서 우위에 있는 장시환에게 더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엮일 수밖에 없는 건가.’

강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문 제약을 흘러가는 대로 두고 1년을 벌지, 아니면 1년 후의 비극을 미리 막을지.

계산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 * *

그 무렵.

K의 유리 랜드에는 특별한 손님이 와 있었다.

마침 조용히 국내 여행을 하고 있다가 K의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와 준 고마운 사람.

그는 최상의 보존 상태로 보관되어 있던 무리 여왕의 시체에서 담즙을 추출하고 있었다.

K는 옆에서 그를 보조했고, 그는 능숙하게 작업을 진행하며 농담까지 하는 여유를 보여 줬다.

“내가 이 나이 먹고도 장거리로 출장까지 하면서 이런 잡일을 해야 하는 거냐?”

“아시잖습니까. 완벽한 추출과 정제는 형님 아니면 못 한다는 것을요.”

“칠십이야. 찬 바람에 뼈가 시린 나이라고. 그리고 난 여기 특유의 한기가 너무 싫단 말이다.”

“그래서 제가 형님에게 좋은 약재 위주로 준비해 둔 것 아닙니까. 많이 준비했습니다.”

“주려는 녀석이 암살자라고 했던가? 무리 여왕을 잡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형님, 꽤 실력 있는 암살자입니다. 여러모로 떡잎이 많이 보이는 친구죠.”

“네가 암살자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겉멋만 든 놈이 십중팔구야.”

“형님은요?”

“나? 나는 그중에 하나지. 뼛속부터 다듬어진 자객(刺客).”

“형님.”

“왜, 자꾸 불러.”

“이제 천살노수라는 악명은 그만 높이시고, 후학 양성에 힘쓰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가 찾아가서 죽인 것도 아니고,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찾아온 놈만 죽였을 뿐이야.”

“그게 그거 아닙니까.”

“물러터진 네 X 같은 성격을 나한테 강요하지 말고, 그쯤만 해 둬라.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산다.”

“으흠…….”

K가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백발의 노인.

그의 본명은 위중양.

중국인으로 본명보다는 ‘천살노수’라는 별칭으로 훨씬 많이 알려진 암살자다.

무리 여왕의 담즙을 완벽히, 부작용 없는 액체로 정제할 수 있는 기술자가 흔하지 않다 보니.

K가 그를 직접 유리 랜드로 부른 것이다.

둘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로, 젊었을 때부터 북경 무술단에서 함께 한 사이기도 했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거다. 나도 네가 부인 치마폭 안에서 사는 거, 뭐라 하지 않잖냐.”

“그거랑 이건 다르죠, 형님.”

“됐고. 머리 아픈 얘기는 그쯤 하자고. 얼른 정제 끝내고 고량주나 한 잔 마시자.”

“예, 형님. 제가 너무 주제 넘었네요.”

“아직 기운이 있어서 그래. 너가 내 나이 돼 봐라,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

앓는 소리를 내는 천살노수.

하지만 K의 눈에 보이는 그의 몸은 20대 못지않은 근육질의 몸이었다. 매끄럽고 탄탄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천살노수의 밑에서 강후가 배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성장을 할까 하고.

그럴 만한 자질과 기대감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자를 만든 적이 없다.

* * *

그루 길드의 간부 셋과의 만남이 아침 일찍부터 이뤄졌다.

어쩌다 보니, 길드의 서열 1위부터 3위까지 한 번에 만나게 된 셈이 됐다.

길드의 기둥이 총출동한 셈이라 강후도 정화 길드의 두 사람을 만났을 때보다는 살짝 긴장이 됐다.

만나자마자 1분 정도는 대화에 집중이 안 됐다.

어쩔 수 없는 통과 의례라고는 하지만, 너무 뻔한 올려치기에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자, 느낌이 싸했는지 마스터인 오유진이 본론을 꺼냈다.

“저도 예전에 큰 길드에서 영입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어요. 하지만 걷어차고 직접 길드를 만들었거든요. 강후 님도 같은 생각이실 거라고 생각해요. 길드에 ‘들어오라’고 말씀드리면 거절하시겠죠?”

“제 속마음까지 다 읽어내신 것 같아서 추가할 말이 없네요.”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루 길드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필요한 곳인가 아닌가의 문제다.

뻔한 얘기를 해 보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본론은 따로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저희는 실력 있는 암살자가 필요해요. 그리고 강후 님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던전이 필요하겠죠?”

“맞습니다.”

“그래서 제안드려요. 파트너십 계약은 어떠세요?”

오유진이 변화구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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